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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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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3김’의 체취가 난다

결정적 순간 예상 밖 결단 내리는 안철수 스타일
개인 중심 세력화 가능한 ‘스타 정치인’의 특권이자 한계
등록 2014-03-12 14:13 수정 2020-05-03 04:27
안철수 의원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내놓는 결단은 정치권과 언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2011년 9월6일 안 의원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 및 박원순 변호사 지지선언 기자회견장.한겨레 김태형

안철수 의원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내놓는 결단은 정치권과 언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2011년 9월6일 안 의원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 및 박원순 변호사 지지선언 기자회견장.한겨레 김태형

“사흘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석 달쯤 된 것 같습니다.”

3월5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첫 연석회의를 국회에서 열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사회를 보면서 첫 공식 발언의 기회를 안철수 의원에게 돌렸다. 안 의원은 3월2일 창당·통합 발표 뒤 ‘일각여삼추’였던 심경을 털어놨다. “어려운 결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입니다.”

사흘이 석 달, 닷새가 1년 같았던…

안 의원은 2011년 9월6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서울시장 불출마 및 박원순 변호사 지지 선언을 한 뒤 기자회견장을 떠나며 “지난 5일이 1년 같다”고 했다. 9월1일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 결심 임박’이란 한 인터넷 언론 기사로 시작된 거대한 소용돌이를 본인이 일단락시킨 데 대한 소회였다.

사흘을 석 달로, 5일을 1년으로 ‘늘렸던’ 것은 안철수 자신이었다. 정치 불신과 정권 교체의 기대 속에서 ‘정치인 안철수’의 가능성은 지난 2년6개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했다.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 그가 내린 결정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때가 많았다. ‘안철수의 결정’이 야기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지던 여론은 늘 허둥지둥 쫓아가기 바빴다. 결국 그의 시간은, 그와 그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2011년 9월로 돌아가보자. 8·24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승복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틀 뒤 사퇴했다. 졸지에 닥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놓고 야당에선 기회다 싶었는지 자천타천으로 10명의 후보가 거론됐다. 김한길 현 대표도 그중 하나였다.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사석에서 강한 유감을 표했다. ‘나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에서 “서울시장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했다. 이 내용이 측근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면서 정국이 요동쳤다.

그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을 대변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단번에 지지율이 50%대로 올라섰다. ‘안철수 현상’의 시작이었다. 정치권은 ‘경험 부족’을 내세워 연일 그를 깎아내렸다. 이른바 ‘멘토’라 했던 주위 사람들도 싸잡아 폄하당했다. 이것이 기득권의 몸부림으로 비치면서, 안 원장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언론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쫓았다.

분명 한계는 있었다. 기업을 경영해봤으니 행정도 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설득력이 약했다. 기업인 출신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 빗대 ‘착한 이명박’이란 비아냥도 그래서 나왔다. ‘비정치인’ 출신이란 같은 색채이면서도, 시민운동가로 풍부한 현장 경험을 자랑하던 박원순 변호사가 나선 것도 사람들을 고민하게 했다. 안철수에 열광한 사람들은 내심 ‘안철수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 했다. 지지율이 너무 높았다. 안 원장 본인도 끝까지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안 원장은 박원순 변호사를 17분 동안 만났고,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제가 출마 안 하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랍니다”라는 단 세 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곧장 기자회견을 통해 불출마 선언을 해버렸다.

예상 벗어나되 무리하진 않는다

2012년 18대 대선도 보자. 대선 한 달여를 앞둔 11월6일 당시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단일화 추진에 합의했고, 곧장 실무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 직후부터 안철수 후보가 양보할 거란 관측이 나왔지만, 안철수 캠프는 선거자금을 위한 국민펀드 모집을 시작(11월13일)하면서 양보론을 잠재웠다.

문재인 후보 캠프의 핵심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안철수 양보론’을 거론하면서 협상이 중단됐다(11월14일). 안 후보는 민주당에 혁신을 요구했다. 민주당의 ‘이해찬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고 문 후보가 ‘단일화 방식은 안 후보에게 맡기겠다’고 나선(11월18일) 뒤에야, 협상이 재개됐다(11월19일).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TV토론(11월21일) 때는 두 후보가 협상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안철수 캠프는 최종제안(11월22일)을 했지만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후보등록일을 이틀 앞둔 11월23일 안철수 후보는 서울 종로경찰서에 나타나 후보 등록에 필요한 범죄기록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출마를 강행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날 마지막 ‘특사 담판’도 끝내 결렬됐다. 저녁 8시20분 기자회견에 나오기로 한 안철수 후보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두 경우에서 안철수 의원은 갈등과 관심이 고조되는 결정적 순간에 예상 밖의 결정을 과감하게 내렸다. 최근 통합 선언에서 안 의원이 보인 행보도 유사했다. 안 의원의 새정치연합은 17개 광역단체장 후보를 모두 낼 것이라며 단일화 불가의 뜻을 밝혔고 창당 절차도 밟았다. 그대로 갔다면 야권의 표 분산과 새누리당의 어부지리가 뻔했다. 우려가 증폭되는 가운데 안 의원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고, 모든 상황을 직접 정리시켰다. 그가 무대에 설 때마다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하다.

안 의원의 결정은 예상 밖이었지만, 한편으론 무리하지 않는 쪽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가 결정을 내리고 나면, 세간에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거나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하는 이들이 꼭 등장한다. 합리적인 선택이란 얘기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서울시장 출마는 무리한 선택지다. 2012년 대선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을 분열시켜 자신도 패배시키게 될 독자 노선 완주도, 결국 마찬가지 맥락에서 안 의원이 ‘절대 가지 않을 길’이었던 셈이다. 그 결정이 ‘예상 밖’이었던 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감안한 통상적인 정치권 논리를 따르지 않았던 탓이다.

정치권에선 안 의원이 결정적 순간에 모든 것을 관둬버리는 ‘중도포기형’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대선도, 창당도 도중에 그만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하지만 대중이 그에게 열광한 게 그만뒀을 때만은 아니었다. 그가 2012년 9월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도, 지난해 4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도 분명 정국의 주인공은 ‘안철수’였다. 심지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지난 2월24일 ‘기초선거 무공천’ 발표마저도, 결과적으로는 통합신당의 표면적인 교두보가 됐다.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이중성

안철수 의원이 이렇게 예상 밖의 선택을 과감하게 내리고 힘있게 밀고 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에게서 과거 ‘3김’과 노무현, 박근혜 등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대중적 지지를 누리는 ‘스타 정치인’, 곧 오롯이 자기 개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화가 가능한 정치인이란 점에서다. 그렇기에 안 의원은 각종 정치세력의 합종연횡에서 한발 떨어져 자신의 고민을 견지할 수 있다. 대중은 분명 리더십 없는 정치세력을 싫어하고 비판하지만, 너무 강력한 리더십도 곱게만 보지 않는다. ‘만기친람’형인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적인 예다. 안 의원에 대해서도 ‘지독한 독재’라는 볼멘소리가 간간이 터져나온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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