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서 검찰은 E. H. 카의 가 불온서적이라는 한 연구소의 감정 결과를 제시한다. 저자가 소련에서 오래 살았다며 공산주의자가 쓴 책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사 송우석은 이 연구소가 국가안전기획부와 주소지가 똑같은 곳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영국 외교부에 의뢰해 받은 문서를 꺼내 읽는다. “E. H. 카는 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며, 영국이 자랑스러워하는 학자다.” 이 영화가 다룬 부림사건(1981년) 재판 때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건에 실재했던 일에서 따온 장면이라고 한다. 빨갱이라는 ‘확신’을 ‘증거’라고 포장하는 공안 검찰에 맞서기 위해 변호사가 찾아낸 건 선진국의 권위가 아니다. ‘사실’이다. 증거는 사실이어야 한다. 설사 피고가 진짜 간첩이라 해도 말이다. 하물며 2014년이다.
세 가지 문서마다 각각 두 개 버전 존재검찰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2심 재판에 낸 ‘회심의 증거’가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중국 정부가 밝히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탈북 화교 출신인 유우성(34)씨의 여동생을 폭행·회유·협박해 간첩으로 몰았던 국가정보원이 혐의를 억지로 입증하려고 증거를 위조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이 위조 여부를 알고도 눈감았는지, 모르고 법정에 제출한 것인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유씨가 어머니 장례 이후에도 북한을 드나들었는지 여부다. 검찰은 1심 때 없던 ‘새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검찰이 증거로 내놓은 유씨의 북한-중국 출입경기록은 변호인단이 중국에서 떼온 기록과 달랐다. 재판부는 주한 중국대사관에 어느 게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고, 중국대사관 영사부는 지난 2월13일 이렇게 밝혔다. “변호인이 제출한 문서(2건)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합법적인 정식 서류다. 검사 쪽이 제출한 문서(3건)는 모두 위조된 것이고, 위조 공문은 중국 기관의 공문과 도장을 위조했다.” 검찰·국정원은 위조 사실을 부인했으나, 이후 공개된 사실은 위조 의혹을 뒷받침한다.
검찰이 제출한 문서는 크게 세 가지다. 세 가지 문서마다 각각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하는 게 특징이다.
우선 북한-중국 출입경기록이다. 검찰은 지난해 6월20일 외교부와 중국 선양 주재 한국총영사관(이하 선양영사관)을 통해 ‘지린성 공안청’에 기록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심 첫 공판을 앞둔 9월 말, 국정원이 출입경기록을 보내왔으나, 발급처 표시가 없어 증거로 내지 못했다.
‘출-입-입-입’을 ‘출-입-출-입’으로 위조?검찰은 10월 중순 국정원으로부터 허룽시 공안국이 발급했다는 출입경기록(문서①)을 2부 받게 된다. 하나(①-1)는 공안국 관인만 찍혀 있고, 다른 하나(①-2)는 공안국 관인과 공증처 관인이 찍혀 있다. 검찰은 10월24일 선양영사관에 “허룽시 공안국에 출입경기록(①-2)을 발급했다는 확인서를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출입경기록을 공식 절차를 거쳐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선양영사관을 통해 중국 쪽의 확인서를 받는 사후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쪽 출입경기록은 유씨에게 불리하게 돼 있다. 유씨는 2006년 어머니 장례를 치른 뒤 5월27일 오전 10시24분 중국으로 돌아왔다. 여기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검찰 쪽 문서에는 유씨가 같은 날 오전 11시16분에 북한으로 다시 갔다가 6월10일 중국에 돌아온 것으로 돼 있다. 중국 정부가 맞다고 인정한 변호인단 제출 문서에는 두 번 모두 ‘중국으로 나왔다’고 돼 있다. 중국 정부는 흔히 나타나는 시스템 오류일 뿐, 북한을 드나든 사실이 없다는 변호인 쪽 문서가 맞다고 밝혔다. 결국 시스템 오류로 인해 ‘출-입-입-입’ 순으로 부자연스럽게 돼 있는 문서를 검찰과 국정원이 ‘출-입-출-입’으로 바꾼 게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된다. 그렇게 기록돼 있어야 유씨가 북한에 다녀온 게 되기 때문이다.
검찰이 발급처 표시가 없어 증거로 내지 못했다고 밝힌 문서에도 ‘출-입-입-입’의 순서로 적혀 있다. 국정원은 수사 과정에서도 ‘출-입-입-입’ 순서로 적힌 자료를 근거로 유씨를 추궁했다고 한다. 검찰은 1심 공소장에서 유씨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넘어갔다고 주장했는데, 북한으로 나간 ‘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찰은 2심에서 ‘출-입-출-입’으로 순서가 바뀐 문서를 제출하면서, 두만강을 건너간 게 아니라 정식으로 출경했다고 말을 바꿨다. 검찰이 진짜 기록을 확보하고도 꿰어맞춘 뒤 증거로 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검찰 쪽 문서는 유씨의 여권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예컨대 유씨의 여권 기록에는 2003년 9월15일 북한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검찰 쪽 문서에는 거꾸로 돼 있다. 문제가 된 2006년 5월27일 기록뿐 아니라 유씨의 출입경기록 전체에 나타난 시스템 오류를 전부 ‘출-입’ 순서가 자연스럽게 되도록 바꾸다보니 여권 기록과 맞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유씨의 중국 여권을 갖고 있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여권 기록과 우리가 제출한 기록에 왜 차이가 나는지 우리도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문서 양식과 도장에 찍힌 담당 부서 이름도 다르다. 옌볜조선족자치주 공안국이 발급한 변호인 쪽 문서에는 유씨의 생년월일, 호적, 주소지, 신분증 번호 등이 모두 적혀 있지만, 검찰 쪽 문서에는 생년월일만 나와 있다. 발급처가 왜 유씨와 아무 관계가 없는 허룽시 공안국인지도 의문이다.
공안몰이 거셀수록 ‘조작 유혹’도…두 번째는 허룽시 공안국이 출입경기록을 발급했다는 확인서(문서②)다. 검찰이 선양영사관에 요청했고, 선양영사관이 지난해 11월27일 허룽시 공안국으로부터 받아 검찰에 보냈다. 이 문서 역시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하고, 맞춤법이 틀린 대목이 있다.
이날 오전 9시20분에 수신된 문서(②-1)는 선양시 번호가 찍혀 있다. 오전 10시40분에 수신된 문서(②-2)는 발신번호가 허룽시 공안국이다. 검찰은 “화룡시 공안국이 처음에 팩스 발신번호를 잘못 찍어 보냈고, 문제가 될 수 있어 공식 팩스번호로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검찰은 번호가 잘못됐다는 ②-1 문서를 12월6일 재판부에 제출했다가, 이 문서와 같은 날 받은 ②-2 문서를 12월13일에 다시 증거로 제출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이 없다.
가장 큰 의혹은 선양영사관이 공식 절차를 밟아 중국 기관으로부터 발급받은 문서②에 대해서도 중국 정부가 위조라고 밝혔다는 데서 나온다. 특히 외교부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문서가 재판에 제출된 것과 동일한지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며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동일하다면 허룽시 공안국이 위조 문서를 보냈다는 얘기인데 설득력이 떨어지고, 동일하지 않다면 허룽시 공안국이 보낸 공문을 누군가 위조했거나 보내지도 않은 공문을 꾸몄다는 얘기가 된다. 변호인단은 누군가 공문을 위조해 선양시에서 팩스로 보냈다가 발신번호가 잘못 기재된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다시 보낸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세 번째 문서는 국정원이 삼합세관으로부터 받았다는 ‘정황설명에 대한 답변서’(문서③)다. 변호인단이 유씨의 출입경기록에 시스템 오류가 있다는 삼합세관의 정황설명서(11월26일 발급)를 제출한 뒤, 삼합세관으로부터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작업인의 입력 착오로 ‘출’과 ‘입’ 기록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정반대 내용의 답변서(12월13일 발급)를 받았다. 검찰의 ‘출-입-출-입’ 주장과 들어맞는 내용이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이 답변서 역시 원본으로 추정되는 문서에는 영사의 인증이 없는데, 며칠 뒤 영사의 인증이 찍힌 답변서 사본이 제출됐다”며 위조 가능성을 제기했다.
위조 의혹이 숱하게 제기되자, 해당 기관들은 ‘폭탄 돌리기’를 했다. 검찰은 국정원에서 받았다고 하고, 국정원은 선양영사관에서 받았다고 하고, 윤병세 외교장관은 “문서② 외에는 모르겠다”고 하고, 황교안 법무장관은 “문서 3건 모두 외교 경로를 거쳤다”고 했다.
의혹의 눈길은 국정원에 쏠린다. 문서①과 문서③은 국정원이 입수한 것이고, 선양영사관이 받았다는 문서②와 관련해서도 외교관이 외교 마찰을 빚을 공문서 위조에 관여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2월21일 국회에 출석한 조백상 선양총영사는 문서①과 문서③에 대해 “(국정원 직원인) 이아무개 영사가 유관 정보기관이 획득한 문서에 대해 내용을 번역하고 사실을 확인한 개인 문서”라고 말했다. 이 영사에게 문서를 넘긴 인물도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된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된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2월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죽이려고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냈다. 국정원이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유씨는 오세훈 시장 시절 특채됐지만, ‘간첩사건’이 터지자 당시 보수·극우 단체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간첩사건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대선 개입으로 위기에 몰린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계속 ‘공안몰이’를 해온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공안몰이가 거세질수록 부실 수사나 ‘조작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야당 국조·특검 요구, 여당 국정원 감싸기검찰은 ‘셀프 수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2월18일 대검 진상조사팀이 구성됐다. 위조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의 협조를 얻어 진상을 규명한다고 한다. 야당들은 국정조사와 특검, 국정원 수사권의 폐지·이관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새누리당은 국정원 걱정뿐이다. “어떻게 해서 구했다는 걸 다 대놓고 얘기하는 자체가 국정원의 정보활동이 노출되는 거다. 아주 위험한 거다.”(김진태 의원, 2월19일, YTN) “국민적 관심이 없는 사건이에요, 솔직히.”(박민식 의원, 2월20일, CBS 라디오) 강압 수사와 증거 위조로 삶이 망가진 탈북 화교 남매는 고통이 끝나고 다시 만나 살 수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희 가족과 저를 그만 좀 괴롭혔으면 좋겠어요.”(유우성씨, 2월16일 기자회견)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란?
유우성씨는 탈북자다. 화교 출신으로 중국 국적을 가졌지만, 북한에서 살았다. 2004년 한국에 들어와 2011년 6월 탈북자 특채로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이 됐다. 2012년 10월 탈북해 중국 옌지시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데려왔다.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로 보내진 여동생과 연락이 끊겼다. 유씨는 2013년 1월10일 체포돼 2월2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2006년 5월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북한에 갔다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돼, 탈북자 수백 명의 정보를 넘기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거였다. 오빠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는 여동생은 4월27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국정원 직원들로부터 폭행·회유·협박을 당해 허위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여동생은 중국으로 추방됐다. 8월22일 유씨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검찰은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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