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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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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공방만 키운 대화록 기습 브리핑

참여정부 인사들 검찰 출두 앞두고 설익은 잠정 결론… “기초연금 파동 잠재우려는 국면 전환 카드” 의심도
등록 2013-10-08 20:16 수정 2020-05-03 04:27

찾긴 찾았다. 실종됐다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말이다. 그러나 있어야 할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는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복사해 경남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던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이지원’(봉하 이지원)에는 있었다. 검찰은 봉하 이지원에서 삭제됐던 한 부(초본)를 복구했고, 이와 별도의 대화록 한 부(최종본)를 발견했다. 최종본은 국가정보원이 지난 6월 무단 공개한 대화록(국정원본)과 똑같은 것이다. 대화록을 찾았으나 의문은 더 증폭되고 있다. 대화록이 왜 기록관으로 옮겨지지 않았는지, 초본은 누가 어떤 이유로 삭제했는지, 초본과 최종본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을 놓고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참여정부 인사들 “우리도 영문 모른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김광수)가 10월2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정식 절차를 밟아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기록물 가운데 대화록은 없다. 대화록이 기록관에서 빠져나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검찰이 8월16일부터 48일 동안 대통령기록관에서 이관용 외장하드, 대통령기록물관리시스템(팜스), 이지원 소스코드 및 데이터 저장매체(나스), 서고에 저장된 비전자 기록물 등 755만 건 기록물 전체를 열람한 결과다. 그러나 봉하 이지원에서는 대화록 두 개가 나왔다. 봉하 이지원은 청와대 이지원을 통째로 복제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인 2008년 2월 복제해 봉하마을에 가져갔다가 기록물 유출 논란이 일자 그해 7월 대통령기록관으로 반환했다.
가장 큰 의문은 대화록이 이관되지 않은 이유다. 참여정부 인사들은 “우리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답답하다”고 당혹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화록을 확실히 넘겼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기술적 오류 가능성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755만 건 가운데 대화록 이관에만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유가 무엇이든 애초 이관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를 놓고 새누리당과 참여정부 인사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초를 폐기하고 개인적으로 빼돌린 것”이라고 공격했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10월3일 기자간담회에서 “당연히 남겼어야 할 기록원에 이관하지 않은 건 법 위반이다. 국정원에는 남길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이 대화록을 갖게 된 시점이) 2007년 대선이 끝나고 (이명박) 당선인이 있을 때다. 당선인이 있기 때문에 국정원에 있는 대화록을 삭제하라고 지시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인사들은 폐기는 어불성설이라고 펄쩍 뛴다. 청와대 이지원을 복사한 봉하 이지원에 대화록 최종본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청와대 이지원에도 최종본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부 본부장은 “노 전 대통령이 차기 정부가 참고하라고 대화록 한 부를 국정원에 보내지 않았나. 폐기는 말도 안 된다. 다만 기록관에 당연히 함께 넘어갔어야 할 대화록이 이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검찰이 그 이유를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을 할 수 없고, 그의 의중을 둘러싼 의혹과 추측만 춤을 추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전시관에 전시돼 있는 노 전 대통령 사진과 관련 자료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을 할 수 없고, 그의 의중을 둘러싼 의혹과 추측만 춤을 추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전시관에 전시돼 있는 노 전 대통령 사진과 관련 자료들.

그러나 민주당 안에서는 이관되지 않은 게 노 전 대통령의 뜻이었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은 최소 15년 동안 열람이 금지된다. 대화록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기록관에 보낼 경우 후임 대통령이 참고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일종의 ‘통치 행위’ 차원에서 기록관에 보내지 않았다는 추정이다. 검찰은 지난 2월 북방한계선(NLL) 관련 고소·고발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상회담 대화록은 후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열람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대통령지정기록물로 해놓으면 그렇게 하기 힘들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점을 감안해 편의상 국정원이 회의록 한 부를 관리하도록 지시한 것을 관계자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은 당시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 이지원의 국가기록원 이관 목록에서 대화록을 삭제하라고 지시해 이를 실무자에게 전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의원 등은 이런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본의 성격과 삭제 이유를 놓고도 공방이 거세다. 검찰이 세 부의 대화록에 대해 “모두 완결본이고 근본적인 내용 차이는 없고 분량도 모두 같지만, 의미 있는 차이는 있다”는 아리송한 말로 의혹을 증폭시킨 탓이다. 우선 각각의 대화록의 성격을 보자. 초본은 2007년 10·4 남북 정상회담을 마친 뒤 청와대가 특수 장비가 있는 국정원에 녹음파일을 보내 녹취를 풀도록 한 것이다. 2008년 1월 국정원이 만든 초본이 청와대에 전달됐고, 청와대는 초본을 다듬어 최종본을 만든 뒤 이를 한 부 복사해 국정원에 보냈다. 검찰은 초본과 최종본 모두 완결본인 만큼 두 개 다 기록관에 이관됐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대화록은 반드시 이관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관이 안 되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삭제가 됐다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검찰이 밝힌 “의미 있는 차이”의 의미

새누리당은 초본에 노 전 대통령에게 민감하거나 불리한 내용이 들어 있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는 “국정원이 풀어온 대화록을 보니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 있을 수 있어서 수정하고 없앤 것 아니냐”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초본을 보고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는지 모르겠다”며 수정을 지시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지만, 검찰은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참여정부 인사들과 민주당은 최종본을 만든 뒤 초본을 삭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반박한다. 초본은 단순히 녹음을 푼 녹취록이고, 최종본은 이를 다듬은 공식 보고서인데, 검찰이 ‘삭제’ ‘복구’ 등의 표현을 사용해 큰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수 본부장은 “정상회담 자리에 배석하지 않은 국정원이 녹음을 풀다보니 다른 배석자들이 얘기하는 게 바뀌어 있고 그랬다고 한다. 일부 표현이 부정확한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며 “초본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여러 번 고치고 기록관리비서관이 최종적으로 오케이 하면 최종 기록물만 기록물로 인정되고 나머지는 절차에 따라 이관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본은 기록관에 옮길 대상이 아닌 것으로 분류돼 이관 대상 목록에서 제외됐을 뿐, 삭제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 본부장은 “이지원에는 중복 문서, 작성하다 만 문서 등도 모두 들어가 있다. 이지원 목록 가운데 기록물로 넘길 필요가 없는 이른바 ‘쓰레기 문서’ ‘미이관 문서’는 이지원 목록에서 삭제하는 방식으로 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삭제’란 단어를 서로 다른 취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논란 부추긴 검찰의 수상한 수사 행태

대화록을 둘러싼 온갖 추측과 정치적 공방이 다시 난무하는 데는 검찰의 수상한 수사 행태가 한몫했다.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면서도 내용을 밝히지 않고, “삭제가 됐다면 더 큰 문제”라면서도 삭제 시점이나 이유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권은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정국 고비마다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무성 박근혜 대선캠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 지난해 대선 때 비밀문서인 대화록을 공개 낭독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한겨레 김경호

여권은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정국 고비마다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무성 박근혜 대선캠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 지난해 대선 때 비밀문서인 대화록을 공개 낭독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한겨레 김경호

특히 중간 수사 결과 발표도 아닌 브리핑 형태의 ‘불쑥 발표’는 검찰의 ‘저의’를 의심케 한다. 그동안 특검을 주장하며 수사를 거부해왔던 참여정부 인사들은 10월7일 검찰에 출석하기로 일정을 조율한 상태였다. 사안의 핵심인 대화록이 이관되지 않은 이유를 규명하려면 기록물 이관 작업을 맡았던 이들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인데도, 조사를 코앞에 두고 ‘잠정 결론’을 공개한 것이다. 김관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최근 잇단 국정 난맥상의 국면 전환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기초연금 공약 축소 등으로 궁지에 몰린 박근혜 정부가 검찰을 이용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온 대화록 문제를 또다시 활용한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검찰 관계자는 10월2일 브리핑에서 “너무 오래돼 궁금증도 있고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는데, 오늘 발표하는 내용은 과학적인 거라서 지금쯤이 적기라고 봤다”고 말했다.

검찰의 이번 발표 내용은 2008년 봉하 이지원 수사 결과와도 배치된다. 검찰은 당시 2개월여 수사를 통해 청와대 이지원을 복사한 봉하 이지원에는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지 않은 기록물이 없다고 결론을 냈다. “당시에는 청와대 이지원 기록이 유출됐는지 여부와 경위에 수사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지금처럼 대화록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하지 않았다”는 검찰의 해명은 옹색하다.

검찰이 똑같은 대화록에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도 석연치 않다. 검찰은 봉하 이지원에서 발견된 초본과 최종본은 대통령기록물로, 국정원이 공개했던 대화록은 공공기록물로 간주하고 있다. 국정원본은 최종본의 사본임에도, 검찰은 생산 주체가 다르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민주당은 검찰의 이중 잣대에는 국정원의 대화록 무단 공개를 정당화하고, 유출된 대화록을 대선에 활용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등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의심한다. 대통령기록물은 보호 기간이나 공개 조건이 까다롭지만, 공공기록물은 기관장 승인이 있으면 열람과 공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국정원본이 대통령기록물이라면 김무성 의원이나 관련자들이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 이 때문에 똑같은 내용임에도 굳이 국정원본에 대해서는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새누리당 입수 대화록 출처 드러난 것”

민주당은 “대화록의 어떤 버전에도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표현이 없다는 게 확인됐다”며 대화록 유출 및 대선 활용 사건과 국정원의 무단 공개 사건을 신속하게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검찰이 기록관에 대화록이 없다고 발표한 것은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이 활용했던 대화록의 출처가 국정원이라는 얘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대화록 ‘실종’ 사건으로 불렸던 이번 사건의 수사를 10월7일부터 본격화한다. 문재인 의원, 김만복 전 국정원장, 조명균 전 비서관 등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소환될 것으로 보인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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