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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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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 전투는 이겼지만 전쟁에선 새 됐다”

디지털 분석실 대화록 공개하고 국조 특위 뛰쳐나와 청와대 앞 단식농성 중인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 그가 꼽는 3가지 성과
등록 2013-08-24 22:09 수정 2020-05-03 04:27

“사진을 찍어도 저 사람 때문에 예쁘게 나오질 않잖아.”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저러고 있대. 지저분하게 물건들 늘어놓고.”
단체로 몰려온 중국인 관광객들이 투덜댔다. 한여름 뙤약볕이 뜨거운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 밀짚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양옆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해임’ 등이 적힌 보라색 깃발이 세워졌다. 지난 8월22일 오전 청와대 앞 단식농성 이틀째인 이상규(48) 통합진보당 의원을 만났다.
 
“너무 힘들어 단식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더위에 길바닥 농성도 그렇고 단식도 그렇고, 너무 힘들 것 같다. 어떤 각오인가.
=사실 국정조사 하면서 자료를 검토하느라 밤새우기도 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애초 농성을 하자고 결정하면서도, 단식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웃음) 그런데 별수 없었다. 그냥 앉아 있으면 편하다. 싸움을 편하게 해선 안 된다.
그래도 이렇게 앉아 있으니, 갑자기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 느낌이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표대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움직이다가, 갑자기…, 후.
 
미소를 머금고 있어선지, 짧은 탄식이 되레 돋보였다. 국정원 국정조사가 끝나가는 데 대한 소회였을까? 국정조사는 7월2일 여야 합의로 시작했지만 진행은 더뎠다. 크게는 위원의 적절성에 대한 시비와 증인 채택을 둘러싼 논란이 거개의 일정을 잡아먹었다. 민주당은 ‘해도해도 너무한다’며 서울광장으로 뛰쳐나갔다. 막판에 청문회가 두 차례 열렸지만, 첫 번째는 ‘선서 거부’로, 두 번째는 ‘가림막’으로 얼룩졌다. 끝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소수 정당 소속인 그도 뛰쳐나왔다. 

23일 오후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이 청와대 앞에서 사흘째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3일 오후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이 청와대 앞에서 사흘째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번 국정조사에 성과가 없었다고 보나.

=아니다. 3가지 면에서 성과가 있었다. 첫 번째로, 조금이나마 실체적 진실에 다가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지 않나. 국정원의 박원동 전 국익정보국장이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됐다. 또 박 전 국장이 권영세 주중대사(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 상황실장)와 자주 전화하는 사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새누리당과 국정원과 경찰의 연결고리가 그려진 것이다. 그 밖에 경찰의 수사 결과 축소 및 은폐에 대한 내용도 상당 부분 확인됐다.

두 번째로, 야권 공조가 잘됐다. 민주당 위원들이 회의를 하면 나를 꼭 불렀다. 민주당은 국정조사나 청문회 등을 다루는 기술력이 상당했다. 집권 경험이 있으니 청와대에서 일해본 위원이 셋(박남춘·박범계·전해철)이나 됐다. 사실은 내가 많이 배웠다.

-민주당에 대해선 ‘전략 부재’라는 비판이 많았는데도, 공조가 잘됐다고 보는가.

=민주당 안에서 팀플레이가 잘 안 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했다. 다만, 민주당에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야성’이다. 예를 들어 서울지방경찰청 디지털 분석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동영상을 받았을 때다. CD 72장, 127시간38분 분량이 2박스로 왔다. 통합진보당은 이런 일이 있으면 각 의원실에서 보좌관들을 차출한다. 이번에도 6개 의원실이 분배해서 전부 다 돌려봤고, 나오는 말을 받아쳐 녹취록을 만들었다. 의원실끼리 경쟁하거나 미루지 않는다. 계속 그래왔기 때문에 당연스레 한다.

 

새누리당의 훼방·깐족거림을 압도할 야성 

 

-민주당에는 그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인가. 그래서 야성이 부족하다?

=그렇다. 야성이라는 건, 국민의 지지를 업고 실체적 진실을 파고들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데서 오는 무게감의 힘으로 새누리당의 훼방과 깐족거림을 압도했어야 했다. 새누리당과 공방이 벌어져도 쌈닭이 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탐사 작업이 필요했지만, 민주당은 그런 게 약간 부족했다.

사실 처음엔 기대를 많이 했다. 국정조사 시작 전에 진선미 의원이 많은 걸 폭로했잖나. 진 의원이 비록 특위에서 빠져도, 민주당이 여러 가지 터뜨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보 없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규 의원은 이번 국정조사에서 디지털 분석실 CCTV 분석을 통해 굵직한 사실관계를 밝혀냈다. 7월25일 경찰청 기관보고 때는 한 분석관이 “지금 댓글이 삭제되고 있는 판에 잠이 와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제시했다. 이성한 청장은 답을 못하다가, 나중에 “(자기들끼리) 농담한 것”이라고 해명해 구설에 올랐다. 이 의원은 8월1일 녹취록 전문도 공개했다. 분석관들이 조사 당시 이미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불법 활동을 대부분 파악했다는 점도 명확해졌다. 민주당 위원들은 동영상 녹취록을 따로 만들진 않았다. 

-국정조사의 세 번째 성과는.

=새누리당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번 국정조사는 방탄과 거부와 차단의 국정조사였다. 새누리당이 철저하게 국정원의 방패 구실을 했고, 증인들은 선서를 거부하거나 답변을 거부했다. 게다가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말한 대로 ‘차단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야가 합심해서 진상을 규명해도 모자랄 판에, 여당이 비호하고 나섰으니 한계가 뚜렷했다. 이건 사실 국정조사의 한계지만, 새누리당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에선 성과라고 본다.

-새누리당에 이번 국정조사 결과는 어떤 의미일까.

=‘완전히 새 됐어’다. 새누리당은 전투에선 이겼다. 마지막 청문회에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빼면, 김현·진선미 위원이 사퇴했고, 국정원 기관보고 공개를 못했고, 원·판(원세훈, 김용판)도 겨우 불렀는데 선서를 거부당하는 등 계속 야당이 밀렸다. 하지만 전투가 아닌 전쟁에선 새누리당이 졌다. 얼마나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이 없는지가 드러났고,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걸핏하면 종북을 내뱉으며 국민적 공분을 불러왔다. 새누리당이 이렇게 된 원인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결단해야 한다.

 

이상규 의원은 서울대 법대 83학번으로, 특위에서 함께 활동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강원 춘천)과 과 동기다. 이 의원은 1986년 법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미 제국주의 축출’이란 선거 구호 탓에 곧장 경찰에 끌려갔다. 유치장에서 학생회장에 당선됐지만 바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곧, 운동권이다. 김진태 의원은 지난 6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국정원 사건 주임검사와 관련해, “하필이면 대학 운동권 출신을 주임검사로 맡겼냐”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같은 부대에 있었던 남재준 원장 

 

=운동권 친구들은 다 알지만, 동기가 300명이라 모두 기억하진 못한다. 진태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괜찮은 친구 중 하나다. 이번 국정조사에서 진태가 민주당의 정청래·박범계·박영선 의원과 끊임없이 부딪쳤지만, 나와는 동기여서인지 험한 얘기가 오가진 않았다.

-개인적 인연이 있는 인물이 또 있었나.

=군대 시절 남재준 원장과 같은 부대에 있었다. (웃음) 내가 11사단 법무병으로 있던 1987년에, 남 원장은 11사단 참모장(대령)이었다. 아무래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 기관보고 때 확인해봤다. 따져보니 맞더라. 남 원장도 반가워하면서 ‘전우 아냐. 전우가 전우를 공격하면 어떡해’라고 했다. (웃음)

-그래서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 했다. 남재준 원장은 군인이다. 소신 있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분명하다. 안타까운 점은 국정원장이 되자마자 정치에 발을 담가버렸다는 것이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5·16 같은 비극이 시작된다. 개인적으로는, 군인으로서 살아온 소중한 삶을 남 원장 본인이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국정원장으로서는 아닌 것 같다.

-이번 국정조사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우선, 권은희 과장의 차분한 말투와 또렷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신기남 위원장도 다시 봤다. 국정원을 상대로 한 국정조사가 처음인데다 증인과의 공방, 여야 간 공방이 혼재했다. 이 복잡한 걸 끌어가면서도 나중에 직접 질의를 하며 전체 그림에서 의원들이 놓친 핵심 부분을 짚어줬다. 판을 보는 능력이 탁월하더라. 끝으로, 국정조사 진행을 도우면서 휴게실 다과를 준비해주며 고생한 분들이 있다. 정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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