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5년의 복원. 박근혜 정부가 임기 중에 펼쳐나갈 조세정책의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기획재정부는 8월8일 향후 5년간의 조세정책 방향으로 ‘원칙에 입각한 세제의 정상화’를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가 ‘일자리 창출과 신성장동력 확충을 위한 저세율·정상 과세 체계 확립’을 외치며 고소득층·대기업 감세에 올인한 탓에 왜곡돼버린 과세 체계를 되돌려놓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도 정했다. 임기를 마칠 때까지 현재 20.2% 수준인 조세부담률을 이명박 정부 직전인 21%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세금 부담을 나누는 방식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증세 없는 세원 확충’을 공헌해온 터다. 무분별한 감세로 망가진 과세 체계를 증세 없이도 정상화할 수 있는 ‘원칙’이란 무엇일까.
“잃어버린 5년 회복하겠다”정부가 발표한 ‘2013년 세법개정안’에 따라 앞으로 5년간 증가하는 총세수는 4조4800억원이다. 이 가운데 적어도 1조3천억원이 직장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정부가 기존의 근로소득세를 부과할 때 적용하던 소득공제의 일부를 세액공제로 바꾸기로 한 까닭이다. 국내 세법은 과표기준에 따라 세율이 올라가는 누진세율을 채택하고 있어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면 전반적으로 세 부담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소득공제는 전체 소득에서 의료비, 교육비 같은 필수 경비를 뺀 과표기준에 세금을 부과하지만 세액공제는 일단 전체 소득을 과표기준으로 보고 과세한 뒤 필수 경비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필수 경비를 많이 써 소득공제를 넉넉히 받아온 고소득자일수록 세액공제가 불리하다.
직장인에게서 이렇게 더 거둬들인 돈은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워킹푸어’(일하는 저소득층)에 주는 지원금인 근로장려세제(EITC)의 지급 대상이 내년부터 연소득 ‘2100만원 이하’에서 ‘2500만원 이하’로 완화되고, 최대 지급액도 70만~200만원에서 210만원으로 오른다. 2015년부터는 자녀장려세제(CTC)도 도입돼 연소득 4천만원 미만 저소득 가구의 만 18살 미만 자녀에게 1인당 50만원이 지급된다.
이러한 소득세제 개편으로 내년부터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근로자는 총급여가 연간 3450만원이 넘는 434만 명이다. 전체 근로자의 28%다. 4천만~8천만원 소득자인 경우 세 부담이 16만~33만원 증가해 소득세 실효세율이 0.3~0.5%포인트 높아진다. 연소득 8천만원 초과는 실효세율이 1.2~2%포인트 상승해 추가 부담이 98만~865만원으로 늘어난다. 연소득 4천만원 이하 가구는 소득세는 줄고 EITC·CTC 지원으로 총 세 부담이 2만~18만원가량 줄어든다. 중산층 이상 직장인이 세금을 더 내는 대신 저소득층이 복지 혜택을 더 보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는 “고소득층에 유리한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새롭게 확보하는 세수는 전액 서민과 중산층에게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직장인 이외 음식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정부가 부가세를 깎아주는 ‘농수산물 의제매입세액공제’에 한도를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농수산물 대다수가 부가세 면세 대상인 점을 감안해 그동안 약 7.4%의 부가세를 공제해줬는데, 내년부터는 매출의 30%에 해당하는 식재료에 대해서만 공제 혜택을 주기로 한 것이다. 매출에서 식자재 구입 비용 비중이 큰 영세 자영업자일수록 타격이 크지만 정부는 이를 통해 3천억원 이상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참여연대 “세액공제 전환은 긍정적이지만”일단 정부의 조처는 각종 공제와 비과세 혜택으로 낮아진 세금의 실효세율을 끌어올려 복지 재원을 확보해나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고령화·저출산 시대에 급증하는 복지 부담을 감당하고, 사회안전망도 더 튼튼히 구축하려면 세입 확충은 필수적인 까닭이다.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도 이날 논평을 통해 “소득공제의 세액공제로의 전환은 점차적으로 소득세의 조세부담률을 올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며, 과표양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IMAGE2%%]문제는 과세 형평성이다. 정부는 소득세 손질에 공을 들였을 뿐, 대기업 법인세의 실효세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은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애초에 ‘소득·소비과세 비중을 높이고, 법인·재산과세는 성장친화적으로 조정’한다는 전제를 두고 세법개정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기업엔 환경보전시설·에너지절약시설·연구개발(R&D)설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기존 10%에서 3%로 낮추고, R&D 투자를 위해 미리 적립하는 금액에 대해선 매출의 3% 내에서 비용 처리해주던 제도를 폐지하기로 한 게 가장 큰 변화다. 대기업이 이러한 변화로 더 내야 하는 세금은 1조원에 불과하다. 고소득자가 추가 부담해야 하는 세수 1조9700억원의 절반에 그친다. 오히려 정부는 법인세에 대해선 3단계로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단일세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세율 인하 가능성도 내비쳤다.
노동계 “세제 개혁안 아닌 개악안”게다가 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 과세도 완화된다. 현행법은 기업 사주 등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이 3%가 넘고, 거래 비율이 30%를 초과하는 경우에 몰아준 매출을 증여와 유사하게 간주해 세금을 물리고 있는데, 중소기업에 대해선 과세 대상을 줄여주기로 한 것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지분 소유구조가 단순해 현실적으로 일감 몰아주기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일감 몰아주기에서 제외되는 내부거래 범위를 넓혀주고, 지배주주의 소득세와 증여세 간의 이중과세 문제를 조정해주기로 한 혜택은 대기업에도 이득이 될 전망이다.
부유층도 일부 근로소득을 제외하고는 늘어난 세 부담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거 액의 주식거래 양도차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왔지만, 이번 세법개정안에도 포함되지는 못했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교수(세무학)의 지적이다. “비과 세·감면을 축소하거나 부가세 면세 범위를 줄이면 부담이 중산층 쪽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세금 부 담이 적어진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 는 상징적인 조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올해 세제개편안을 두고 ‘월급 쟁이 증세’라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감 세정책의 혜택은 대기업·부유층이 누리고, 사실상 증세의 부담은 소득이 투명한 근로 자들이 지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이명박 정 부 때인 2008년부터 4년간 감세로 줄어든 세수 88조7천억원 가운데 59%는 대기업과 근로소득 상위 10%의 고소득자에게 돌아 간 것으로 홍종학 민주당 의원실은 분석하 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 동조합총연맹은 논평을 내고 “정부가 기업 과 부자들은 그대로 둔 채 소득이 유리알처 럼 투명한 봉급생활자와 서민·중산층의 주 머니만 털겠다고 한다. 정부의 ‘세제개악안’ 에 반대한다”고 한목소리로 꼬집었다.
개편안, 국회 문턱 넘을까정부의 이번 세제개편안이 그대로 시행되 는 건 아니다. 소득세법·법인세법·부가가치 세법 등 15개 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부 방안을 ‘월급쟁 이에 대한 세금폭탄’으로 규정하며 벼르고 있고, 새누리당도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어서 세법개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 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약 세법개정안이 그 대로 시행된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의 곳간 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산층 이상 근로자에게 세금을 거둬 저소득층에게 지원 하고 나면 순증하는 세금은 5년간 2조4900 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5월 말 ‘공약가계부’를 발표하며 임기 내 추가로 거둬들이겠다고 자신했던 세수(50조7천억 원)의 5% 정도다. 135억원어치의 박근혜표 국정과제를 실현할 총알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 동운영위원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기존 과 세체계를 유지하는 방향에 머물렀다. 이러 한 소극적인 조세정책으로는 국민이 염원하 는 복지국가를 향한 재정을 마련할 수 없다.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직접세 증세로 ‘사회복지세 도입’에 나서야 한다.” 박근혜 정 부에서 하루빨리 정상화돼야 하는 건 ‘원칙’ 그 자체라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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