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설치 첫날이던 8월1일,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32도였다. 땡볕이었다. 천막 안에서도 밖에서도 더위를 피할 수 없었다. 광장의 유일한 그늘은 ‘한강으로 피서 가요’라는 글귀가 적힌 서울시 애드벌룬이 만들어준 3×3㎡ 크기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따라다녔다. 누군가 “음지에서 일하는 건 그 사람들인데”라고 하자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font size="3">서울광장에 울려퍼지는 “남·해·박·사”</font>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의 민주당 천막 상황실에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국민운동본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비상 의원총회를 마친 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홍보물 배포에 나섰다. 지나던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전단지를 받아갔다. 평일 낮 서울광장에 사람이 많을 리 만무했다. 김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은 조를 짜 인근 지역을 돌아다녔다. 김 대표에게서 전단지를 받아든 안아무개(73)씨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늘 민주당이 이런 행사를 한다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광장 한쪽에서는 서로 처음 만났다는 40~50대 남성 5명이 ‘시국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제가 못 배워서 대학 나온 사람은 다 우러러봤는데, 지금 국정원 사건 돌아가는 걸 보면 배운 사람들도 별거 아니더라고요.” “배웠다는 놈들이 더해.” 전병헌 원내대표로부터 전단지를 받아든 한 20대 여성은 “출근하는 길이에요. 별로 관심 없어요”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남·해·박·사!”
서울광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구호다. 시국선언에도 빠짐없이 나오는 얘기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을 해임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하라는 것이다. 촛불과 시국선언은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와 정치에 개입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장외투쟁 선언으로 국정원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촛불’이 어떤 양상으로 번져나갈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건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주문한 뒤 침묵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목소리의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는 점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새누리당과 얘기하는 건 이제 무의미하다.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민심이 심각해질 것”이라며 박 대통령과 담판 회담을 제안했다( 8월3일치 1면). 이용득 최고위원은 8월2일 천막 상황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새누리당은 대통령이 묵묵부답하고 있다 해서 오히려 물타기로 일관하고 있다. 너무 격이 낮고 역사적으로 창피하다. 새누리당은 억지놀음을 그만두라. 박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29일부터 4박5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다.
‘휴가’는 민주당이 광장으로 본거지를 옮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국조특위) 새누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7월28일 기자들에게 “다른 의원들은 쉬는데, 특위 위원들만 일하고 있다. 7월 마지막 주는 너무 덥다”고 말했다. 7월26일로 예정됐던 국정원 기관보고를 8월5일로 미룬 뒤 한 얘기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박 대통령의 휴가에 맞춰 줄줄이 여의도를 떴다. 여야 대표회담을 제안했던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7월30일 ‘북한자유이주민 인권을 위한 국제의원연맹’에 참석한다며 폴란드로 출국했다. 최경환 원내대표와 국조특위 의원들도 지역구에 내려갔다. 민주당에서는 “국정조사는 휴가 갔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박지원 의원)는 자조가 터져나왔다. 민주당은 7월31일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휴가지에서 찍은 ‘저도의 추억’ 사진을 ‘셀프 공개’한 다음날이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새누리당은 침대축구를 하고 있다. 축구장에 거의 드러누워 경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국정조사를 수행할 수 없다. 제대로 하려면 국민의 힘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외투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국정조사 무력화에 성공했다고 낄낄대고 있는 듯하다”(김한길 대표), “새누리당은 민생에 무능하면서 나쁜 짓에는 유능하다”(전병헌 원내대표)는 민주당 지도부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민주당이 무능하고 무력했다는 고백과 다름없어 보인다.
새누리당은 민주당의 장외투쟁에 ‘대선 불복 프레임’을 들이대고 나섰다. 김기현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민주당은 대선을 통해 증명된 국민의 선택을 거부하고 대선 불복 운동을 펼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굴욕적인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저항했던 ‘2008년 촛불’도 대선 불복이라고 끼워맞춘다. 권성동 의원은 “민주당이 2008년 대선에 불복하면서 촛불집회를 일으켜 나라를 아주 어지럽힌 전례가 있다. 이번 대선에도 불복하는 심리가 민주당 저변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 계파주의는 새누리당이 ‘대선 불복 프레임’을 들이대는 데 소재로 이용되고 있다. 윤상현 원내수석 부대표는 민주당의 장외투쟁 선언을 비난하면서 “계파 우선주의를 벗어던지기를 촉구한다. 한 지붕 두 가족이 아니라 두 지붕 두 가족이 되는 야당발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 될까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태흠 원내대변인은 “소수 친노 강경파에 끌려다니는 민주당 지도부가 안쓰럽다”고 말했다. 종합편성채널(종편)을 포함한 수구 언론들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대선에 불복하라고 부추기는 꼴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프레임이다. 김한길 대표는 8월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은 대선 불복이나 선거 무효 주장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대선 불복이 아니냐고 억지를 쓰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민주당이 ‘촛불연대’를 적극 꾀하지 못하는 데는 민주주의 회복 요구를 대선 불복으로 몰아붙이는 프레임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부담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8월3일 오후 6시 청계광장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국민보고대회’를 열기로 했다. 1시간 뒤 같은 장소에서 참여연대·민변 등 30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가 주최하는 촛불집회에는 당 차원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제한적 연대’인 셈이다. ‘대선 불복 프레임’이 오히려 새누리당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촛불집회에 ‘박근혜 OUT’ ‘대선 무효’ 등의 구호나 손팻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를 야당의 공식 요구 또는 선거 불복이라고 주장하는 건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국민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정작 급한 당사자는 새누리당 아닌가? 떳떳하다면 새누리당이 먼저 죽기 살기로 나서서 관련자 모두를 국정조사에 불러들여 의혹을 낱낱이 밝히는 게 상식 아닌가? 진실을 규명하자는 국민의 요구를 대선 불복으로 몰아붙이는 새누리당의 정치 공세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새누리당에 돌아갈 것이다.”(이정미 정의당 대변인)
“여당이 왜 그렇게 국정원 국정조사를 거부했는지 모르겠다. 국정조사가 이뤄지면 뭔가 국민이 모르는 엄청난 것이 터지나 하는 의혹만 키워놨다.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이부담은 다 집권당한테 갈 거다. (새누리당이) 그렇게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8월15일이 시한인 국정조사 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은 새누리당과 물밑 협의를 이어가는 등 국정조사 정상화의 길을 열어둔 상태다. 다만 여야가 증인 채택 등에 합의해 국정조사가 재개되더라도, 서울광장 천막은 걷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남·해·박·사’를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핵심 관계자는 “천막을 친 것은 우리지만 걷는 것은 박 대통령의 일”이라고 말했다.
<font size="3">박 대통령은 ‘생각’을 보여줄 것인가</font>
요즘 인터넷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국가정보원에는 기밀이 없고, 국가기록원에는 기록이 없고, 민주당에는 능력이 없고, 새누리당에는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생각이 없다’는 만평( 8월2일치)도 등장했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민주당은 능력을, 새누리당은 양심을, 박 대통령은 생각을 보여줘야 할 때란 얘기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
<font color="#008ABD">이상규 의원이 공개한 댓글 분석 동영상</font>
<font size="3">그때 경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font>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은 8월1일 서울지방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동영상 127시간 분량을 공개했다.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수서경찰서가 “악성 댓글을 달았다는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 전날 밤까지, 경찰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영상 속 분석관들 대화를 보면, 국정원 직원 김요원(당시 27·가명)씨가 제출한 PC 및 노트북 분석 결과 김씨가 ‘야당 성향 게시물’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나타난다. “얘는 어떤 일을 하냐면은, MB 찬양하는 글이 있어. 그런데 거기에 까는(비판하는) 글을 (누군가가) 달아. 그럼 그거(댓글을) 신고해. 전체적인 글이 MB를 까는 글이 있어. (그러면 그 글에 대해) 삭제를 (해달라고) 신고해.”
한 분석관은 “오유(오늘의 유머)는 이런 글이 올라왔을 때 반대 10 글이 올라오면 여기(베스트 오브 베스트)에 안 올라간다”고 말해, 김씨가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서 여러 아이디를 사용해 반정부 성향 게시물의 주요 게시판 노출을 막은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얘는 같은 글을 네 번이나 올렸어, 똑같은 글을”이라거나 “자기가 글 쓰고 자기가 추천하네. 업무가 되게 재미없을 것 같지 않아요?”라는 대목에선, 김씨가 여러 아이디로 게시물과 댓글을 반복 작성하고 있는 점도 분석관들은 발견해냈다.
트위터 계정과의 연관성을 발견한 것도 눈에 띈다. 한 분석관은 “이적단체 강제해산법 관련한 트위터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쓰는 댓글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상규 의원은 “트위터 활동 흔적을 찾아냈다면 경찰은 당연히 SNS에 대한 수사를 벌여야 했다. 단순히 ‘댓글 흔적을 못 찾았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은 의도적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김민기 민주당 의원은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국정원 여직원 ‘감금’ 사건 관련 자료를 경찰이 축소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7월31일 오전 경찰은 지난해 12월12~13일 김씨와 경찰 사이의 통화 내역과 관련해 “‘밖으로 나올 거면 통로를 열어주겠다’고 하였으나 김씨가 ‘부모님과 상의해 재신고하겠다’고 함”이라고 적힌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오후에 보낸 자료에선 “‘밖으로 나올 거면 통로를 열어주겠다’고 하였으나”라는 대목을 삭제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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