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8일 오전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미국 캘리포니아 랜초미라지의 휴양지 서니랜즈의 한 산책길. 미-중 정상회담 이틀째를 맞이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노타이 노재킷’ 차림으로 산책하는 모습이 기자들에게 공개됐다.
이틀 동안 8시간 직접 대면
뒤 따라온 2명의 통역 외에는 수행도 없었다. 기자들에게 들려온 두 사람의 대화는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먼저 말을 열었다.
오바마 정기적으로 하는 운동은 있으신가요?
시진핑 수영과 산책을 하죠. 수영은 하루에 1천m씩 합니다. 운동을 안 하면 ‘붕괴’해버릴 거예요. 그래서 이런 강도로 하죠. (웃음)
오바마 대통령도 시 주석을 따라 웃었다. 사실 시 주석의 말은 통역의 실수로 ‘1만m’라는 황당한 숫자로 잘못 전달됐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제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기자들 사이에서 “회담은 어땠나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훌륭했어요!”(terrific)라고 한마디로 답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 잠시 손을 들어 보였다. 9초가량 말없이 걷던 중 시 주석이 다시 입을 뗐다.
시진핑 당신은 농구 고수시지요.
오바마 아…, (한동안 말없이 몇 걸음 걷다가) 제가 예전엔 꽤 했었죠….
기자들이 들을 수 있는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면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 1분도 되지 않았던 ‘공개 산책’은 이번 미-중 정상회담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의 최고지도자인 두 50대 ‘거인이’ 개인적 친분을 다졌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 장면의 유명세는 누리꾼들의 패러디를 통해 확인됐다. 두 사람이 걷는 사진을 어린이 만화 의 한 장면에 빗대는가 하면, 시 주석의 허리둘레를 빗대 ‘하루에 1천m씩 수영하는 사람의 몸매일 리 없다’는 우스개도 나왔다.
이번 회담에서 두 정상은 6월7~8일 이틀 동안 모두 합쳐 8시간 동안 직접 대면했다. 미-중 정상회담 사상 가장 긴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첫날은 넥타이를 풀더니 이튿날엔 재킷까지 벗었다. 양쪽은 밖으로 드러난 모양새만으로도 하고 싶은 얘기가 분명했던 셈이다. ‘휴양지에서 노타이·노재킷’은 격식을 내려놓고 ‘친구’가 됐음을 상징한다. ‘긴 시간’은 물론 ‘친밀도’다. 중국 쪽이 회담 전부터 강력히 제안해온 ‘신형 대국관계’에 대해, 회담 장소를 결정한 미국 쪽이 고안한 화답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6월7일 첫 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같은 (미-중) 관계의 중요성은 우리가 현재 시 주석을 모시고 있는 ‘흔치 않은 세팅’에도 반영돼 있다. 우리는 좀더 폭넓은(extended), 좀더 격식을 차리지 않은(informal) 대화를 통해, 양국의 비전을 공유하고 상호 이익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새로운 협력모델(new model of cooperation)의 구축 방안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백악관-정장’이 아닌 ‘휴양지-노타이’라는 ‘세팅’엔 의도가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협력모델’이란 용어는 ‘신형 대국관계’의 미국식 화법이라고 볼 수 있다.
신형 대국관계는 미국과 중국이 대결 구도를 벗어나 공생을 도모해보자는 취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의 6월10일치 사설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형 대국관계는 전인미답의 길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수히 많은 제국의 폐허를 밟고 지나왔으며, 대국의 흥망성쇠도 무수히 많이 보아왔다. 신흥대국과 수성(守城)대국 사이에 대립과 충돌은 너무 많은 피비린내와 잔혹사를 불러왔다. 나라가 강해지면 반드시 패권을 장악하려 드는 것이, 마치 흔들 수 없는 철칙처럼 되었다.
중국은 최대의 개발도상국이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신흥대국이다. 미국은 최대의 선진국이면서 실력이 가장 큰 수성대국이다. 어떤 사람들은 두 나라가 대국쟁패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라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흥대국의 성장은 때때로 불안과 걱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BC 431~404)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아테네의 성장이 스파르타에 공포감을 불러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IMAGE2%%]국제질서의 다극화, 경제의 전 지구화, 문화의 다양화, 사회의 정보화가 계속 촉진되면서 각 나라는 역사에서 볼 수 없던 폭과 깊이의 교류를 하고 있다. 세계의 성대한 흐름은 따르는 것이 옳다. 신흥대국과 수성대국이 대항하고 충돌하는 옛 역사의 논리를 타파할 책임은 중국과 미국 두 나라에 떨어졌다.”
중국과 일본, 남북 향해 얼마나 돌아섰나중국은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 테니 서로 ‘공멸’의 길은 택하지 말자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나라도 2인자를 넘볼 수 없도록 주요 2개국(G2) 구도를 공고하게 만드는 틀이다. 냉전 시기 미국의 맞수인 러시아도, 전통 강국이 다수 포진한 유럽연합(EU)도,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상한 일본이나 고도성장을 이어가는 인도도 모두 한번에 ‘3위 이하’로 만들어버렸고, 미국도 여기에 동조하고 나선 셈이다.
이같은 신형 대국관계의 틀에 대해 시진핑 주석이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은 3가지였다. 첫 번째는 ‘불충돌, 불대항’, 곧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충돌을 지양하자는 내용의 제언이다. 두 번째는 사회제도 및 발전 방식은 각자 선택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자는 ‘상호 존중’이다. 세 번째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때 상대방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때 공동 발전도 생각하자는 ‘협력상생’이다.
두 나라가 다짐하는 새로운 관계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존중’이다. 영토나 주권 문제처럼 핵심 이익이 침해받는 사안에 대해선 참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북한의 핵과 주한미군 등 한반도의 각종 현안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앞으로 서로 침해하지 않겠다는 핵심 이익이 어디까지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역내 주요국(한국·북한·중국·러시아·일본)이 모두 최고지도자가 교체된 상황에서, 한국의 박근혜 정부는 중국에 손을 내밀며 북한을 압박하려 하고, 북한은 일본에 손을 뻗어 활로를 개척하려 한다. 중국과 일본이 각각 남과 북을 향해 얼마나 ‘돌아섰는지’가 현재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인 셈이다.
[%%IMAGE3%%]그러나 미국과 중국만 놓고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당장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가장 큰 관건인 북핵 문제에서 두 나라는 이미 갈등보다 협력을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북핵 문제가 미-중 양국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출발이었고, 북핵 실험 덕에 미-중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에선 “북핵은 김정일이 미-중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가져다준 선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두 나라는 북핵을 둘러싸고 갈등하기보단 같은 입장에서 공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한 예로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자, 2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3월 장쩌민 주석과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4월 베이징에서 북-미-중 3자회담이 열리게 됐다. 이 3자회담은 이후 북핵 6자회담의 틀을 구성하는 단초가 됐다. 2005년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자, 중국이 이에 동조해 이듬해 중국은행 마카오지점의 북한 관련 계좌를 동결한 일도 있었다. 2006년 2차 북핵 실험 이후에는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표까지 던지며 미국과 협력했다.
북핵 문제에 대한 미-중 공조는 기존 핵 보유국으로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핵 보유국들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은 핵 확산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정상회담 전 친서에는 어떤 내용이?미국과 중국이 이렇게 전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면서 바뀌지 않는 상황이라면, 한국과 북한으로선 직접 나서서 주변국을 이끌어야만 정치·군사안보·경제·사회문화 등 각종 한반도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각자 외교적 위험을 분산시키며 넓고 깊은 주변국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
국제정치에서 약소국은 특정 강대국을 전적으로 편들면 다른 강대국과의 관계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기 마련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외교를 통해 여러 강대국과 관계를 전략적으로 조절하는 것을 ‘헤징’(hedging)이라고 부른다. 오늘과 내일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보험’을 들어놓는 셈이다.
북한이 대표적인 헤징 사례다. 북한의 핵은 애초에 탈냉전 이후 ‘친중’ 일변도 국면을 타개하려고 꺼낸 협상 목적의 카드였다는 시각이 있다.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난국 속에서 중국에만 기대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에,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려고 쓴 헤징 전략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역시 마찬가지 헤징 전략상, 미국만 바라보는 협상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결국 북한은 중국이 줄곧 바라온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를 아주 무시할 수도 없다. 미-중 정상회담을 10여 일 앞두고 시진핑 주석에게 전달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친서에 6자회담과 관련한 내용이 어느 정도 수위로 담겨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국도 전통적 ‘우방’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헤징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나 헤징의 상대가 둘뿐이면 그 또한 위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국과 미국이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면, 반대로 상반된 이해 당사자인 북한과 중국이 안보 위협을 느끼면서 밀착하게 되는 이치다. 이 때문에 주변국 네트워크를 복잡하게 만들어,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가 배타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만 남과 북은 분단 상황 탓에 다양한 헤징을 구사하기 힘든 한계가 있다.
캘리포니아 태양 아래 마오타이주6월7일 서니랜즈에서 열린 오바마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명주 마오타이주로 건배를 제의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왔을 때 마오쩌둥 주석이 대접한 바로 그 술이다. 마오타이주 건배는 당시 냉전 속에서 중국에 드리운 ‘죽의 장막’을 걷어낸 상징이었다. 41년이 지나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이뤄진 마오타이주 건배는 무엇을 거둘 수 있을까?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참고 문헌(이상현 외, 세종연구소, 2011)
(이태환(편), 세종연구소, 2010)
‘开2创大国关系新模式的政治智慧和历史担当’ 2013년 6월10일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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