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회가 지난 4월9일 ‘18대 대선 평가 보고서’를 발표하자마자 민주당 계파 간 싸움이 폭발했다. 당의 혁신을 위한 출발이 돼야 할 보고서가 계파갈등의 대상이 된 꼴이다. 대선 넉 달 뒤 다시 불거진 대선 패배 책임론을 놓고, 비주류는 “대선을 주도한 인사들은 진퇴를 결정하라”고 등을 떠밀고, 주류는 “마녀사냥”이라며 ‘경선 불복자와 안철수 후보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반발한다. “평상시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다가 선거 때만 움직인다”라는 패배의 근본 원인, 즉 ‘휴면정당’이라는 지적은 이 싸움에선 인용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왜 패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성찰하려는 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선평가위는 지난 1월21일 출범했다. 위원장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국회의원·지역위원장 4명, 교수 4명 등 모두 9명이 참여했다. 79일 만에 내놓은 보고서는 364쪽에 달한다. 대선평가위는 우선적으로 민주당의 “혼돈과 방황의 역사”를 지적한다. “1997년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후보는 전 연령대의 고른 지지와 저소득층, 자영업자 등 서민층 지지 기반을 자산으로 갖고 있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DJ 지지 기반에 2030세대의 지지를 추가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당의 혼란과 갈등이 거듭되면서 특히 60대 이상, 저소득층과 자영업자 집단의 이탈이 두드러지게 됐다.” 양극화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는 동안, 민주당은 이념논쟁과 계파갈등, 대결정치에 주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선거를 위한 정당이지,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당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선 평가 보고서가 제기한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는 2012년 4월 총선 이후 “평가 보고서 대외비 처리 사건”이다. 잘못된 계파 공천 때문에 이겨야 했던 총선에서 패한 뒤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아 대선에서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됐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대선평가위가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명숙 대표가 물러난 뒤 문성근 대표대행은 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에 총선 평가 보고서 작업을 지시했다. 민주정책연구원은 이미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보고서를 제출했고, 지난해 4월29일 민주당 대회의실에서 보고서가 발표됐다. 회의 성격은 명확지 않다. 회의의 명칭에 대해 참가자들은 간담회, 확대간부회의, 워크숍, 보고회 등 제각각으로 표현한다. 회의록도 없다. 문 대표대행은 외부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보고서를 보완하도록 했고, 당시 발표된 보고서는 ‘대외비’로 처리돼 회수됐다. 그러나 보완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고, 문 대표대행은 임기 마지막 날인 5월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차기지도부에서는 상세한 검토를 해 국민께 보고”하라고 말했다. 그 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했지만, 인수인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보고서 내용이 언론에 유출됐다. 박용진 대변인은 5월17일 브리핑에서 “민주정책연구원 보고서는 기초자료이고, 총선 평가백서를 발행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밝혔으나, 백서 작업은 실제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이목희 의원이 6월7일 의원총회에서 총선 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6월9일 출범한 이해찬 대표 체제에서도 평가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6월12일 민주정책연구원장이 교체됐다. 한마디로 대충 넘어간 것이다.
대선평가위가 총선 평가가 사라진 상황에 주목한 것은 이 과정에서 ‘계파 패권주의’가 작동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대선평가위는 “선거 결과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계파 패권주의로 규정했다. 대선평가위는 “한명숙 대표가 물러난 상황에서도 패배가 아니라는 의견이 당 지도부에 의해 개진돼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에서는 4월 총선 패배의 원인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 진단에 기초해 18대 대선을 기획하려는 공식적인 시도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6월9일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당내 계파 간 담합(이해찬·박지원 담합)이라는 밀실정치가 불거진 것이 당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을 증폭시킨 원인으로 작용했고, 이로 인해 민주당은 극심한 계파 대립과 불신을 안고 대선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총선 패배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규명하지 않은 채, 친노·주류가 담합에 의해 당권을 계속 이어가면서 계파갈등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이해찬·박지원 담합이 ‘문재인 후보 만들기’라고 반발하던 비주류는 이후 대선 후보 경선 때 모바일 투표 오류를 문제 삼아 경선 중단이라는 극단적 파행을 일으켰다.
친노·주류 쪽에서는 왜 대선 패배 책임을 총선 때로 되돌려 묻느냐는 반박도 나온다. 한 친노 의원은 “이해찬 의원은 총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명숙 대표의 사퇴도 말렸다. 대선에서 패한 것은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에서 총선 때만큼의 득표율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총선 직후 새누리당보다 의석수는 적지만 정당득표율은 높으니 진 게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6월9일 전당대회에서 친노·주류가 당권을 다시 잡은 건 계파 패권주의가 아니라 정당한 경쟁의 결과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문재인 책임인가, 민주당 책임인가?대선평가위가 실시한 ‘민주당 주요 인사 의식조사’와 ‘국민 의식조사’에서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계파갈등이다.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 119명을 포함해 639명이 응답한 민주당 의식조사에서는 83.5%, 국민 의식조사에서는 67.4%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선평가위는 후보의 책임보다 당의 책임이 더 크다고 평가한다. 근거는 이렇다.
대선평가위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온건한 비판자’들의 표심에 주목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대단히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대다수(82.9%)가 문재인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대체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절반 이상(56.7%)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다. 대선평가위는 유권자 응답 분석을 통해 “정권 교체의 열망이 곧바로 야당 후보나 야당의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난제를 확인했고, 그 핵심에 있는 온건한 비판자들의 다수가 박후보를 선택한 것은 정당과 후보의 ‘능력’에 대한 평가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문 후보와 민주당이 박 후보와 새누리당보다 못해서 온건한 비판자들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다음 대선평가위는 문 후보와 민주당의 경쟁력을 따졌다. 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를 5가지 유형으로 나눈 결과, 정당은 별로지만 후보를 좋아하는 ‘후보 지지 유형’이 52.4%로 가장 많았고, 정당·후보 모두 좋아하는 ‘완전 지지 유형’이 13.5%였다. 후보는 별로지만 정당을 좋아하는 ‘정당 지지 유형’은 5.7%에 불과했다. 정당·후보 모두 별로지만 상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비토 지지 유형’(17.9%), 정당·후보 모두 별로지만 제3자가 지지를 호소해서 지지하는 ‘연대 지지 유형’(10.5%) 등 외부 요인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박 후보가 ‘후보지지 유형’(51.1%)과 ‘완전 지지 유형’(32.4%)이 대부분이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대선평가위는 “문 후보의 매력은 결코 적은 게 아니었으나, 민주당에 대한 매력이 너무 낮았다. 한마디로 민주당은 계파갈등으로 인해 정치신인인 문 후보의 결함을 더욱 증폭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대선평가위는 문 후보의 “정치 역량과 결단력이 유약했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특히 “민주당의 구조적 한계를 넘기 위해 3개 선거 캠프(민주캠프·미래캠프·시민캠프)를 구성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으나, 업무를 조정하는 컨트롤타워를 확립하지 못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안철수 공동 책임론’은 민주당 안에서는 물론, 국민 사이에도 상당히 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대선평가위는 밝혔다. ‘문 후보의 대선 패배에 안 후보도 공동 책임이 있다’는 문항에 대해, 민주당 의식조사에서는 72.3%가 동의했다. 국민 의식조사에서는 54.7%가 동의했다. ‘후보직 사퇴 뒤 안 후보는 문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는 문항에 대한 공감도는 민주당 의식조사에서 22.3%, 국민 의식조사에서는 24.2%에 불과했다. 안 후보 지지자들도 안 후보가 사퇴 직후 2주간 잠적한 것에 대해 39.9%만이 공감했고, 문 후보 지원 유세 방식에 대한 공감도와 선거일 미국 출국에 대한 공감도도 각각 47.5%, 43.4%에 그쳤다. 안 후보 지지자의 절반 이상(51.2%)은 ‘아름다운 단일화에 실패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과오를 고백한 뒤 정치를 재개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선평가위는 “민주당으로서는 안철수 캠프의 문제점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지지율을 올릴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선평가위의 분석 결과 안 후보가 사퇴한 뒤 안철수 지지표의 62.5%가 문 후보에게, 21.2%가 박 후보에게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선평가위는 “문 후보 득표를 100으로 봤을 때 안철수 지지표가 45의 비중을 차지했다. 문 후보는 안 후보와 그 지지자로부터 상당한 빚을 졌음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대선 평가 보고서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실명을 적시해 정치적 책임을 점수화한 것이다. 대선평가위는 민주당 주요 인사 의식조사에서 책임의 크기를 0~10으로 물은 뒤 이를 100점 단위로 환산해 발표했다. 총선 당시 한명숙 대표 76.3점, 대선 당시 이해찬 대표 72.3점, 박지원 원내대표 67.2점, 문재인 후보 66.9점, 문성근 대표대행 64.6점 순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친노·주류는 “동료 정치인들을 희생양 삼아 책임을 씌우고, 나머지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냐”(윤호중 의원, 4월11일 PBC 라디오)며 반발하고 있다. 대선평가위는 “정치적 책임은 정계 은퇴나 의원직 사퇴처럼 일종의 ‘정치적 살인’에 가까운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정치적 책임은 보다 진솔한 성찰과 고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고서 발표 이후 당내 분위기는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친노·주류는 보고서 작성 주체와 내용 모두 인정할 수 없다며 연일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친노·주류는 자체 백서를 펴내는 한편,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보고서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전면 폐기하겠다고 나섰다. 이목희·노영민·홍영표 등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핵심 직책을 맡았던 의원들이 지난 4월10일 기자간담회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뒷얘기까지 공개하면서 ‘안철수 입당 제안론’ 등에 대한 진실 공방도 다시 벌어지고 있다. 친노·주류는 특히 한상진 대선평가위원장이 안철수 캠프에 몸담았던 이력과 대선평가위 간사인 김재홍 전 의원이 공천받지 못한 일 등을 거론하며 “정치 편향에 사로잡힌 보고서이자 정치적 음모”라고 비난하고 있다.
보고서를 둘러싼 파장은 5월4일 열릴 민주당 전당대회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는 문재인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거론하고, 대선 평가 보고서를 전당대회에서 공식 의결하자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친노·주류는 ‘보고서 반대’와 ‘김한길 반대’를 엮어 당권을 재구축하겠다는 태세다. 비주류의 수장인 김한길 의원의 ‘대세론’이 형성되고 있으나, 범주류에 속하는 강기정·이용섭 의원이 막판 단일화하고 친노·주류가 지원에 나설 경우 대세론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선 패배의 원인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책임 공방만 난무한다. “민주당은 평상시엔 휴면하다 선거 때만 활동한다”는 보고서의 지적은 적절하다. 지금은 당권을 지키느냐 빼앗느냐에 올인하고 있는 ‘선거철’이 아닌가.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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