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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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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거짓말 그리고 꼼수

1968년 울릉도 앞바다에 45t 핵폐기물 해양투기한 정부… 주민 동의 없이 밀실서 추진돼 갈등만 낳은 핵폐기물 정책 30년
등록 2013-04-07 21:45 수정 2020-05-03 04:27

1968년 어느 날, 울릉도에서 서남쪽 11해리(약 20k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해군 함정이 멈춰 섰다. 이윽고 배에서 쏟아져나온 드럼통 20개가 수심 2200m 아래로 가라앉았다. 핵발전소가 없던 시절,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가 연구용 원자로 등을 운용하면서 생긴 핵폐기물이었다. 이 사실은 23년이 지나서야 199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폐기물 관련 보고서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대중은 분노했다. 당시 핵폐기물 관리부처였던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뒤늦게 “1968년부터 1972년까지 200ℓ 용량 철제 드럼통 115개(총 45t)를 버렸다”며 “1974년 IAEA가 수심 4천m 이상 깊은 바다에만 해양투기를 허용해 동해안을 대상으로 한 폐기물 처분을 포기했다”고 해명했다. 우리나라에 핵폐기물을 둘러싼 논란의 서막을 알리는 첫 사건이었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들어서고 있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의 운영동굴 건설 현장의 모습. 2010년 6월 완공하기로 했던 이곳은 현재 낮은 암질 등급에 따른 보강 작업 등으로 준공일이 두 차례 미뤄져 2014년 6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제공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들어서고 있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의 운영동굴 건설 현장의 모습. 2010년 6월 완공하기로 했던 이곳은 현재 낮은 암질 등급에 따른 보강 작업 등으로 준공일이 두 차례 미뤄져 2014년 6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제공

YS 때 ‘지역개발 사업’ 미끼와 함께 추진

정부가 핵폐기물 처리 논의를 시작한 건, 국내 최초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1978년)가 가동되면서부터다. 고리 1·2호기만 있던 지난 1983년 과학기술처는 ‘방사성폐기물 관리 종합대책’을 세우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은 육지 처분을 하며 핵발전소 부지 바깥에 중앙집중식 영구처분장(이하 핵처분장)으로 세운다”는 기준을 마련했다. 핵폐기물 관리는 국가 주도의 비영리 운영관리기구가 하고, 기술 개발이 필요한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관리대책은 나중에 별도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곧바로 핵처분장이 들어설 후보지를 골랐다. 1986년 경북의 울진군, 영덕군, 영일군(현 포항시)이 최종 후보지에 올랐다.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공개였다. 주민들도 몰랐던 후보지 선정은 격렬한 반대로 이어졌다. 언론을 통해 후보지 1순위로 알려진 영덕에서는 3천여 명이 모인 사실상 최초의 핵처분장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물러섰다. 20년 넘게 이어질 갈등의 씨앗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영덕 카드’를 버린 정부는 제2의 원자력연구소 부지를 포함한 핵처분장 시설 건설에 나섰다. 물론 이번에도 철저히 비공개였다. 정부는 1990년 발표한 안면도 종합개발계획에 ‘서해과학연구단지’ 계획을 추가했다. 충남 태안군(안면도)에 들어서는 연구시설에는 핵처분장도 있었다.

그러나 꼼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언론을 통해 핵처분장이 들어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안면도에서는 거센 시위가 벌어졌다.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경찰서 건물은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결국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이 직접 나서 해명을 했다.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설치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안면도에 어떠한 신규 시설도 설치하지 않겠다.”

안면도의 핵처분장 진통은 계속됐다. 정부는 1991년 말 세 번째 핵처분장 후보지로 강원도 고성군·양양군, 경북 울진군·영일군, 전남 장흥군, 충남 태안군 등 6곳을 뽑았다. 당시 안면도의 일부 주민은 직접 유치 신청을 했는데, 얼마 뒤 이들이 원자력연구소의 돈을 받고 유치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세 번째 핵처분장 후보지 계획은 큰 논란에 휩싸이면서 무산됐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핵처분장 계획은 ‘지역개발 사업’이라는 미끼와 함께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방촉법(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의 촉진 및 시설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을 통해 핵처분장이 있는 지역에 해마다 최대 50억원, 운영기간 가운데 30년 동안 연간 최대 30억원까지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994년 정부는 9곳의 후보지 가운데 6가구만 사는 인천시 옹진군 굴업도를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지역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여전히 주민 합의 없이 진행한 후보지 선정은 인천과 주변 섬 주민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굴업도 후보지는 주민 반대가 아닌 핵처분장 부지로 부적절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사업이 좌초했다. 정부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핵처분장 사업 주체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한국전력공사(현 한국수력원자력)로, 담당 부처도 과학기술처에서 통상산업부로 옮겨졌다.

경주, 준공일 잇단 연기에 안전성 논란

10년 넘게 핵처분장 사업은 밀실 추진→주민 반대→백지화라는 쳇바퀴를 돌았다. 한전은 후보지를 공개적으로 공모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2001년까지 어느 도시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사업자가 후보지를 정하면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 부지를 선정하기로 했다. 논란이 뻔한 결정 방식을 밀어붙였다. 2003년 전남 영광군, 경북 울진군·영덕군, 전북 고창군 등 4곳이 후보지가 됐다. 정부에서는 10개 부처 장관이 나서 읍소를 했다. “특별지원금 3천억원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양성자 가속기 사업 신청시 특별가산금을 부여하겠다. 정부가 책임지고 지역 숙원사업을 지원하겠다.”

후보지 4곳에서 논란이 거센 가운데, 김종규 전북 부안군수가 핵처분장 유치신청서를 냈다. 이른바 ‘부안 사태’의 잘못된 단추가 끼워지는 순간이었다. 지역의 동의 없이 진행한 유치 신청은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집회로 이어졌다. 고건 국무총리가 나섰지만 중재에 실패했다. 반년 넘게 이어진 부안 사태는 2004년 열린 주민투표에서 투표자 91.83%의 유치 반대를 끝으로 가라앉았다.

“한반도 비핵화 등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할 때 고준위 방폐장을 논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고준위는 공론화 이후 중·저준위 폐기장 건설지역이 아닌 별도의 지역을 선정한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다.”(2005년 2월21일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간부회의 발언) 핵처분장 논란이 20년 넘게 사회적 문제로 떠돌자 참여정부는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 핵연료)보다 상대적으로 방사능이 낮은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부터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의가 한참 뒤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2005년 전북 군산시, 경북 영덕군·포항시·경주시 등이 후보지 신청을 하고, 결국 경주가 투표자 89.5%의 찬성을 얻어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시작했다.

전국에 들불처럼 사회적 갈등을 불러온 핵처분장 논란은 후보지 선정 뒤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핵처분장이 들어서는 경주에서 시설의 안전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완공을 목표로 시작한 공사는 “진입 동굴의 암질 등급이 예상보다 낮아 파 들어가는 속도가 느리고, 보강 작업을 해야 한다”며 준공 목표시기가 2012년 12월로 미뤄졌다. 올해 1월엔 보강 작업 등을 이유로 준공일을 2014년 6월로 한 차례 더 미뤘다. 핵처분장이 들어설 만큼 안전한 지역이냐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용후 핵연료 처리, 복잡한 논쟁 남아

30년을 헤맨 핵처분장 사업은 이제 그동안 미뤄둔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논의와 마주하게 됐다. 그러나 사용후 핵연료를 영구 처분할지 재처리할지, 이를 위해 핵발전소를 더 지을지 말지 등 복잡한 논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의 테이블을 펼치기에 앞서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전국에 뿌려놓은 세 단어를 곱씹어야 할 듯하다. 비공개, 거짓말 그리고 꼼수 말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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