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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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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3-03-15 22:57 수정 2020-05-03 04:27

1.
봄입니다. 바람이 여전히 맵차지만 한낮의 햇살은 졸음을 부를 만큼 매혹적입니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 든든한 벗이었던 두꺼운 외투를 옷장에 처박아두고 ‘똥 친 막대’ 취급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세상에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다지요. 무심히 흐르는 시간 앞에서, 삶의 태도를 다잡아봅니다. 어느덧 3월 중순입니다. 곧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산수유…, 수많은 봄의 전령들이 찾아오겠지요. 머잖아 가슴 설레는 신록의 바다가 산천에 펼쳐지겠지요. 도 창간 19돌을 맞습니다. 이 창간한 3월, 가 창간한 5월이면 옛일을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지난해에도 말씀드렸지만, 1988년 창간 당시 선배들의 바람이 “보다 오래 버티자”였답니다. 민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 사흘 뒤 지령 92호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죠. 와 은 스물다섯과 열아홉의 어엿한 성인으로 자랐습니다. 이 모두가 시민·독자들의 뜨겁고 큰 사랑 덕분입니다.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창간 19돌을 계기로 지면에 변화를 줬습니다. 제호 디자인까지 바꾼 지난해만큼은 아니지만, 소박하되 맛깔스러운 상차림을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하고 두렵습니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0년입니다. 여전히 평화는 멀고 위험은 가깝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핵전쟁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는지…. 위기는 기회라지요. 정전 60돌을 맞아, ‘냉전의 추억’ 연재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김연철 인제대 교수의 야심찬 새 기획 ‘협상의 추억’을 선뵙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불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 냉전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꾼 헨리 키신저의 비밀 협상 등 20세기 협상사를 3주마다 풀어헤칠 것입니다. 김수정·김진·남상철·박갑주·이상훈·이상희·이은우, 7인의 변호사들이 일상에서 살아 숨쉬는 인권과 법률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7인의 변호사들’도 격주로 연재합니다. 법이 가진 자의 흉기이기만 한 것은 아닌 세상, 인권이 법전 속의 빛바랜 낱말만은 아닌 세상을 앞당기는 밑돌이 되리라 믿습니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가 오늘의 경제 현안을 풍부한 경제사 지식을 토대로 풀어내는 ‘박종현의 이코노미피아’도 3주마다 싣습니다. ‘이코노미피아’는 이코노미와 유토피아의 합성어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경제학을 지향합니다. 로 의료계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린 김현정 동부시립병원 정형외과 전문의가, 돈은 없고 아픈 데만 많은 장삼이사들의 아픔과 치유의 이야기를 ‘천변 진료실’에서 풀어냅니다. 퇴비화 변기를 만들어 쓰는 생태 친화적 삶으로 에도 소개된 강명구 아주대 교수가 경기도 광주에서의 ‘반쪽 시골생활’을 격주로 전합니다.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이들의 도움을 받아 논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물길을 만들며 얻은 일상의 지혜를 독자와 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가깝고도 먼 아시아, 중국·일본·타이에서 오래 살고 있는 세 한국(계) 여성이, 내부자이자 외부자로서 경험한, 여행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베이징 여자, 도쿄 여자, 방콕 여자’도 선뵙니다.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 이유경 방콕 통신원, 재일동포인 김향청 기자가 격주로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문화 칼럼을 대폭 개편했습니다. 이명석 문화평론가와 최지은 전 기자가 한 편의 TV 프로그램을 다른 시선으로 분석하는 ‘TV 이것 봐라’, 기자 출신인 이성욱 씨네북스 기획위원이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오 선생을 찾아서’, 감성적 문체로 사랑받아온 이광호 문학평론가가 책 한 권에서 낱말 하나를 뽑아 사적인 정의를 내리는 ‘만약에 사전’이 그것입니다. 작지만 빛나는 문화 칼럼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Red樂 칼럼에도 변화를 줬습니다. 가든디자이너 오경아씨가 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키우는 방법 및 정원과 식물에 깃든 삶의 메시지를 전하는 ‘정원의 속삭임’, 부부 금슬 좋고 요리 잘하는 송호균 기자의 ‘저녁이 있는 삶’을 지향하는 음식 칼럼 ‘옆구리 쿡쿡’, 엽기발랄 필치로 최고 인기 칼럼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주객전도’의 X기자 부부가 ‘킬링캠프’라는 회심의 역작을 선뵙니다. 출판면엔 칼럼을 신설했습니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가 코믹하고 아찔한 출판사 편집자의 경험담을 전하는 ‘좌충우돌 에디팅’, 한겨레출판 편집장을 그만두고 자전거포를 연 박상준씨가 몸으로 쓰는 독후감 ‘자영업자의 책읽기’, 김종철 전 진보신당 부대표가 자신에게 정치적 영감을 준 ‘불온서적’들을 소개하는 ‘빨간 책가방’이 독자들의 독서 욕구를 자극하리라 기대합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어쩐지 가서는 안 될 곳 같은 법정 안 풍경을 때때로 전합니다. ‘관람’에 일가견이 있는 매눈으로 우리 시대 법정의 정의와 부정의를 날카롭게 소묘할 것입니다.
 
2.
855호부터니까 98권째입니다. 제가 편집장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연애편지입니다. 2년 전 이맘때 쓴 첫 연애편지를 다시 꺼내봤습니다. “새 편집장으로서 ‘자존과 공감이 키워가는 연대의 열매로서 사랑’을 꿈꿉니다.” “자존 없는 인권은 불가능하다, 자존은 인권의 씨앗이다, 자존은 홀로 존재가 아니라 관계다, 무지갯빛 관계로서의 자존을 꿈꾼다.”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다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듯이, ‘기계’에 비해 특권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로봇과 친구 되기를 헛된 꿈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람끼리 친구 되기는 더 쉬울 것이다. 공감은, 우주처럼 넓고 깊을수록 좋다.” “연대를 위해 애쓰지 않으며 관용만을 권하는 것은, 어쩌면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주문일지 모른다. 연대의 꿈이 없는 관용은 때로 무기력하다.” 그랬습니다. 그때 저는 ‘꿈’을 말씀드렸습니다. 자존과 공감과 연대와 사랑이 이끄는 꿈 말입니다. 지난 2년간 그 꿈을 잃지 않으려, 그 꿈을 더 많은 사랑과 나누려 애썼습니다.
돌아보면, 난감합니다. 자존의 꿈은 좌절에 짓눌리고, 공감의 꿈은 분노와 증오에 질식당하고, 연대의 꿈은 비루한 일상이 꼬드기는 외면의 유혹에 흔들리고, 사랑은 가뭇없이 멀어져만 가고…. 작별 인사치고는 우울한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렵니다. 자존과 공감과 연대의 이름으로 키우는 사랑의 꿈을. 지난 2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이었습니다. 힘겨운 만큼, 설레고 가슴 벅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죠. 그러니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삼키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여기, 마지막 연애편지를 두 손 모아 드립니다.



*새로 오는 최우성 편집장이 더 뜨겁고 깊은 애정으로 매주 독자들을 찾아갈 겁니다. 신임 편집장은 토요판 등을 거쳐 최근엔 경제부 정책금융팀장으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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