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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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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

등록 2013-03-07 05:23 수정 2020-05-02 19:27

나는 1990년 1월~1991년 6월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군견보다 재산가치가 떨어진다는 방위병으로. 내가 속한 부대의 거수경례 구호가 “하면 된다 하자”였다. 박정희를 좋아해 늘 ‘라이방’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던 부대장이 지은 구호다. 뜻풀이는 이렇다. “까라면 까지, 잔말이 많아.” ‘하면 된다’ 정신은 민주주의를 모른다. 명령은, 이유 불문, 무조건 이행해야 했다. 지난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하면 된다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와 저력”을 칭송했다. 그러곤 이렇게 다짐했다.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이뤄낼 것입니다.” “제2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자 합니다.”
경제부흥, 하면 된다, 한강의 기적, 잘살아보세…, 기시감이 강력하지 않나? 당연하다. 그건 모두 박정희의 말이었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5년의 포부와 다짐을 밝히는 취임사에서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한 ‘박정희’를 강력하게, 거듭 호명했다. 박근혜식 기억의 정치다. ‘박정희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쯤 되려나. ‘하면 된다’의 박근혜식 뜻풀이는 아마도 이걸 거다. “제가 약속하면 여러분은 지켜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에서 강조한 말이다. 이견 제시, 토론으로 이어지는 민주적 의견 조정 과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제2 한강의 기적? 지금 대한민국에 절실한 게 한강의 기적인가? 국토균형발전이 아니고? 굳이 기적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이미 인구와 인재와 돈과 물자가 차고 넘치는 한강(서울 등 수도권)이 아니라 낙동강(영남)이나 금강(충청)이나 영산강·섬진강(호남) 등이 아닐까.
어쨌거나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거듭 확인된 게 있다. 박 대통령에게 박정희는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이런 사정 탓에 박 대통령의 취임사에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낯설어 했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이 한국인의 삶을 포획하기 전 맨몸의 ‘하면 된다’ 정신으로 삶의 기반을 일궈온 장·노년층은 인생의 황금기였던 젊은 시절의 활력을 떠올리며 피가 뜨거워졌을 수 있다. 쿠데타와 독재로 박정희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앞으로 5년이 걱정스러웠을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젊은이들은 1970년대식 언술과 정서가 생경했을 수 있다.
이 모든 상충하는 언술과 반응의 바닥에 ‘기억의 정치’가 있다. 역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기억의 정치는, 힘이 세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던 조지 오웰의 경구도 있지 않나. 얼마 전 세계 최고 권위의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외국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의 오멸 감독은 빚을 내서까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주 사람 대부분이 4·3의 아픔과 연결돼 있죠. 이들의 통증에 관심을 보여야 해요. ‘끝
나지 않은 세월’로, 대답 없는 역사로 놔둬선 안 됩니다.” 지난해 화제를 일으킨 영화 과 도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 남일당과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잊지 말자는 기억의 정치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위대한 성취의 역사”라고 간단히 정리한 한국 현대사에는, 누군가의 환희보다 진한 수많은 이들의 좌절과 피와 눈물이 깃들여 있다. 누군 잊으라 하고, 누군 기억하라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망각과 기억사이, 우리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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