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디 갔어, 정의

등록 2013-03-03 08:13 수정 2020-05-02 19:27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월19일 퇴임 연설과 출입기자 오찬 등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대통령이 돼서 한국이 수백 년 변방에서 세계 중심으로 간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모르는 것들이 꺼떡댄다. 일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참 특이한 사람이다. 떠나는 순간까지 성찰 없는 자기 인식은 요지부동이다. 당부한다. “대한민국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하겠다”는 다짐은 그만 거두고, “이제 저는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처럼, 제발 조용히 지내길.
2월25일 0시를 기해 대통령이 바뀌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비전은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다. 그런데 정부 출범 즈음의 기대나 희망을 느끼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내각·청와대 고위직 인선을 둘러싼 논란이 거센 탓이 크다. 제 배 불리느라 불법과 탈법을 일삼은 ‘잡범’들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기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신뢰와 법치, 경제민주화 따위는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까.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강기훈씨의 ‘유서 대필 조작 사건’ 수사 검사였던 곽상도 변호사가 청와대 민정수석이 됐다. “유서 대필이 아니라는 건 난센스”라는 이를, 대법원의 재심 결정이 내려진 마당에, 민정수석에 임명한 ‘박근혜식 법치’는 요령부득이다. 간암 투병 중인 강씨는 페이스북에 “1991년 6월 서울지방검찰청 11층 특별조사실에서 잠 안 재우기를 담당하셨던 검사 양반, 이렇게 나타나셨다”고 한탄했고, 인권단체들은 성명을 내어 “정치검찰 출신 곽상도씨가 가야 할 곳은 청와대가 아니라 감옥”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다.
경제민주화는 망실됐다. 박근혜 정부 5대 국정목표에 들어 있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간부조차 “재벌들이 ‘드디어 됐구나’라며 쾌재를 부를 것”이라고 한탄했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는 비아냥이 만고의 진리가 되는 것인가. 어쩌면 ‘안기부·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노회찬 의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려 의원직을 상실하게 한 대법원의 모습은 ‘박근혜식 법치’의 의미심장한 예고편일지 모른다. 불법 도청을 자행한 국가기관, 재벌한테서 돈을 받은 정치인·공직자들과 그들을 매수한 재벌은 멀쩡한데, 이를 고발한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쫓겨났다.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노 의원 사건을 수사한 검사가 바로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다. 이 또한 ‘박근혜식 법치’다.
새 정부와 여당인 새누리당(153석)의 폭주를 견제해야 할 야권은 지리멸렬이다.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127석)은 스스로도 추스르지 못해 정신이 없다. 통합진보당(6석)의 행태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이고, 진보정의당(6석)도 공동대표인 노 의원의 의원직 상실에 이어 유시민 전 의원의 ‘정계 은퇴 선언’으로 혼란에 빠졌다. 1985년 ‘서울대 프락치 폭력 사건’ 재판 항소이유서에서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해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포효했던 청년 유시민은, 2013년 1월19일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진보정치의 대중화에 매진해온 노회찬의 강제 하차나, 개혁 정치에 진보의 숨결을 불어넣어 정당 개혁을 이루겠다던 유시민의 좌절을 개별 정치인의 문제로만 볼 일이 아니다. 진보·개혁 세력, 더 넓게는 한국 사회의 한계를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깊이 고민해볼 대목이다.
해는 기우는데, 강을 건네줄 뱃사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루에서 긴 밤을 견뎌야 할 처지의 인민들에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