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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알렉산더 토도로프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2005년 저명한 과학저널 에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을 발표한다. 유권자들은 선거에 나온 후보에게 투표할 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첫인상으로 주로 판단한다는 것. 프린스턴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국 하원의원 후보들의 사진을 1초간 보여준 뒤 “누가 더 유능해 보이는가? 그래서 누구를 뽑을 것인가?” 질문해보니 실제 선거 결과와 70%나 일치했다. 다시 말해 많은 유권자가 실험 참가자들처럼 1초의 첫인상으로 후보를 판단한 뒤 실제 선거에서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던진 듯 보인다.
이 연구가 와 <cnn> 등에 소개되자 이른바 ‘신경정치학’이란 최신 연구분야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의 기능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신경과학이 정치 분야에 적용되기 시작한 건,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어야 유권자의 표심을 흔들 수 있을까? 어떤 단어, 어떤 표현을 써야 지지자들이 연설에서 환호성을 지를까? 최첨단 뇌영상기법인 뇌영상 자기공명장치(대뇌 혈류 속 산소 농도를 측정해 전반적인 대뇌 활동을 모니터링하는 방법)와 뇌파(신경세포의 전기적 신호의 합으로 두피에서 뇌 활동 정도를 측정하는 방법) 등을 활용해 이런 문제에 답하는 분야가 바로 신경정치학이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탐구해온 신경정치학자들이 꾸준히 내놓고 있는 주장은 ‘유권자의 의사 결정은 이성적이라기보다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것. 한 예로 미국 에머리대학 드루 웨스턴 교수와 그 동료들은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2004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조지 부시와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모순된 발언 사례를 들려주었다. 케리 후보가 1996년엔 은퇴연령을 높이겠다는 연설을 했는데 2004년에는 이와 상반된 내용의 연설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그 결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케리 후보의 모순된 발언을 단번에 알아차린 반면, 정작 자신들이 지지하는 공화당 후보인 부시가 비슷한 모순된 발언을 범했을 때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우리 연구실(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신경물리학 연구실)에서도 우리나라 대선 때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 이명박·정동영 후보의 사진과 공약을 보여주며 뇌영상 촬영을 했는데, 그들에게 지지하는 후보의 공약이라며 상대 후보의 공약을 보여줘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열렬한 ‘긍정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의 공약인지가 중요할 뿐, 내용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럴듯하게 공약과 정책을 얘기하고 이념과 시대정신을 논하지만, 실상 그 속엔 ‘그 사람, 맘에 안 들어!’라는 정서가 숨어 있는 것이다.
지지 후보의 연설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나 마약을 복용했을 때 자극받는 ‘쾌락의 중추’ 영역으로서, 이 결과는 열렬 지지자들이 후보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열광하는 ‘정치적 중독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웨스턴 교수는 저서 에서 ‘상대 후보의 열렬 지지자들은 어차피 설득이 어려우니 신경 쓸 필요 없이, 부동층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공략하라’라고 조언한다.
그러니 부동층을 감성적으로 공략하라
2012년은 정치 지도자 선거가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치러진 바야흐로 ‘선거의 해’였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부동층의 속마음’이 핫이슈로 떠올랐다. 미국 대선에서도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밋 롬니 공화당 후보가 박빙의 대결을 지속하다 보니, 부동층의 표심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이는 국내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근소한 차이를 보이자 부동층의 속마음이 선거 막바지에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지난해 했던 실험이 이른바 ‘부동층의 속마음’ 실험! 이번 대선에서 아직 투표할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며 자신을 ‘부동층’이라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투표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모르는 ‘내재적 선호도’, 즉 무의식적으로 대선 후보 중 누구를 더 선호하는지 속마음을 규명하는 실험을 했다. 우리 연구실 윤경식 박사가 주도한 이번 실험은 2012년 11월28일부터 2주 동안 트위터 이용자 819명을 모집해 박 후보와 문 후보에 대한 내재적 선호도 측정 실험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실험의 핵심은 특정 후보의 이름이나 사진과 함께 ‘좋다’ 또는 ‘싫다’(나쁘다)라는 단어를 보여주었을 때 그들이 나타내는 순간적 반응을 측정하는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에 대한 선호도가 이 단순한 행동실험에 미세한 반응 속도의 차이를 야기하게 되는데, 그것을 측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우리가 내재적 선호도를 측정한 이유는 (1)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며 ‘부동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은 두 대선 후보 사이에 선호도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2) 그것이 대선 날 복잡한 선거 국면이나 후보들의 정책·공약 등보다 훨씬 더 그들의 최종 표심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나름의 가설을 세웠기 때문이다.
실험은 매우 간단했다. 트위터를 통해 모집된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행동실험을 한다. 참가자는 우선 키보드에 각각 왼손과 오른손 검지를 올려놓는다. 첫 단계에서는 모니터에 ‘좋다’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왼쪽 버튼을, ‘나쁘다’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오른쪽 버튼을 누르는 훈련을 한다. 그들은 대개 아주 빠르게 버튼을 누른다.
다음 단계에서는 ‘좋다’라는 글자 위에 박근혜 혹은 문재인의 얼굴·이름이 함께 나타난다. 이때 그들의 반응 속도를 측정하게 되는데, 이번엔 이 사진이나 이름으로 인해 그들의 반응에 변화가 생긴다. 그들이 만약 박근혜를 좀더 선호하면 ‘좋다’라는 단어 위에 박근혜가 있을 때 약 0.1초 더 빨리 반응한다. 반면 속으로 싫어하는 후보 사진과 함께 ‘좋다’라는 단어가 제시되면 빨리 왼쪽 버튼을 눌러야 함에도 잠시 멈칫하게 되는데, 그것을 포착하는 게 본 실험의 핵심이다.
측정 결과, 실제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좋다’는 반응이 반대편 후보보다 0.02~0.2초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즉, 박근혜 지지자(61명)는 박근혜라는 이름 또는 사진과 함께 ‘좋다’라는 단어가 나타날 때, 문재인 지지자(548명)는 문재인이라는 이름 또는 사진과 함께 ‘좋다’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 반응 속도가 더 빨랐다. 본 실험이 선호도를 잘 반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참가자들 중 자신을 부동층이라 여긴 209명은 과연 어떤 속마음을 보였을까? 흥미롭게도 실험에 참가한 부동층 피실험자 중 54%는 문재인에, 46%는 박근혜에 높은 내재적 선호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부동층은 약 54 대 46의 비율로 문재인을 좀더 지지하고 있었다. 부동층을 전체 유권자의 10%(약 405만 명)로 가정하면 두 후보가 219만 표와 186만 표를 나눠 가지는 셈이다.
실제로 선거에서 그들이 뽑은 후보는 내재적 선호도와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을까? 투표 결과를 알려준 참가자 2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험 참가자 중 박근혜지지자는 100% 선거 당일 박 후보에게 투표했으며, 문재인 지지자는 약 82.6%가 문 후보를 뽑았다.
과연 부동층의 실제 선거 결과는 어땠을까? 선거 전 부동층의 속마음이 54 대 46으로 문 후보에게 다소 쏠린 결과가 선거 결과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대선 당일, 부동층은 57 대 43의 비율로 나뉘어, 문 후보를 좀더 많이 뽑았다. 선거 한 달 전에 진행된 부동층의 속마음 측정 결과가 선거 당일 결과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본 실험이 이번 대선에 대해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부동층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대선 후보들에 대한 내재적 선호도는 각기 보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초기의 내재적 선호도가 결국 표심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또 이번 실험 결과에서 부동층의 후보 지지 비율이 54 대 46으로 문 후보에게 쏠렸지만, 이 정도의 차이가 두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을 뒤엎을 만큼 크진 않았기 때문에, 선거에서 부동층이 캐스팅보트로 작용하지는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특히 본 실험은 트위터라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미디어를 통해 모집된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했고 젊은 참가자가 많았음에도 8%포인트 정도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젊은층 사이에서도 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난 대선 결과에 대해 ‘50대의 반란’이라고 해석하지만, 박 후보는 다른 세대에게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폭발력을 갖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젊은 참가자임에도 8%포인트 차이
어쨌거나 본 실험은 선거철이 되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부동층의 속마음’이 측정 가능하며, 실제 투표 결과에 대체로 잘 반영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으로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적용돼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전망해본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c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