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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반올림, 어떤 대화를 나눌까?

등록 2013-01-29 13:28 수정 2020-05-02 19:27

2007년 백혈병과 힘겹게 싸우던 22살 황유미씨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빨리 돈 벌어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겠다’며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 입사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백혈병 진단을 받은 유미씨였다. 아버지 황상기(58)씨는 딸의 죽음 앞에서 ‘네 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될 때까지 싸우겠노라’ 약속했다. 삼성 직업병 문제를 알리기 위해 황씨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 활동가들과 거리로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1년 서울행정법원은 백혈병을 앓다 숨진 황유미씨 등 2명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 1월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 본관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주관으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을 촉구하는 미사가 열렸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지난 1월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 본관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주관으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을 촉구하는 미사가 열렸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요지부동 삼성은 왜 변했나

유미씨가 세상을 등진 지 5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줄곧 백혈병 등의 질환 발생과 반도체 공장 작업 환경이 무관함을 주장하던 삼성이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 반올림은 1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의 대화 요청을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말 삼성은 백혈병 산재 불인정 처분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법적 조정을 받아보자는 구두 제안을 했고, 반올림은 ‘소송은 그대로 진행하되 대화할 수는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DS부문 김종중 사장은 “백혈병 발병자와 유가족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는 공식 문서를 보냈고, 반올림은 책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대표단 구성 등을 요구했다. 삼성이 지난 1월11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 합당한 대표단을 구성해 대화에 성실하게 임할 것을 분명히 한다”는 답변을 보내와 양쪽의 대화가 처음 성사됐다.

삼성의 태도 변화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오는 직업병 논란을 외면하기엔 국내외에서의 기업 이미지 훼손 등 부담이 커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반올림 쪽에서는 전자산업 관련 삼성 계열사에서 일한 뒤 백혈병·뇌종양·유방암·자궁경부암·피부암 등이 발병했거나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제보를 해온 이가 160여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더구나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이들에 대한 산재 인정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4월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5년5개월 동안 일한 뒤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는 노동자에 대해 산재를 인정한 데 이어, 12월엔 4년9개월 동안 근무한 뒤 유방암에 걸려 숨진 노동자에 대해서도 산재를 승인했다.

삼성과 반올림이 논의할 의제 범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산재 불인정 처분 취소 소송 등 법적 조처를 놓고 양쪽의 의견이 달라 원활한 협의가 진행될지 미지수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공유정옥 산업보건전문의는 “긴 세월 동안 힘겹게 싸워온 피해 가족들에겐 단 몇 명이라도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산재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의미”라며 “소송을 통해 산재가 아니라고 한 정부의 판단이 바로잡히는 걸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피해 노동자 및 유가족과 근로복지공단 간 소송에서 정부 쪽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소송 등 법적 조처 중단이 대화의 전제 조건은 아니다”라면서도 “대화를 하다 보면 소송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공문에 ‘유감’은 사과가 아니다”

딸을 가슴에 묻은 황상기씨는 대화에 앞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삼성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사과도 들어본 적이 없다. “뒤늦은 대화 제의가 반갑긴 하지만 지금까지 워낙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왔던 사람들이라 어찌될지 모르겠다. 공문에 ‘유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회사 쪽은 그것을 사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 처지에선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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