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또는 사필귀정.
지난 9월27일 곽노현(58) 전 서울시교육감은 서울 신문로 서울시교육청사 현관에 배웅 나온 직원들을 뒤로한 채 마지막 퇴근을 했다. 이날 대법원이 그에게 징역 1년형을 선고해 교육감직을 잃은 탓이다. 다음날 그는 남은 8개월의 형기를 채우려고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지난 서울시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중도 사퇴한 박명기(54) 전 서울교대 교수에게 선거 뒤 2억원을 건넨 혐의로 2년 가까이 계속돼온 ‘곽노현 재판’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검찰이 공직선거법 제정 뒤 한 번도 적용한 적 없는 ‘사후매수죄’를 끄집어낸 바람에 인 논란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상처도 남았다. 서울 주민의 손으로 뽑은 2명의 서울시교육감이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교육감의 빈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듯하다.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에 서울시교육감 재선거도 함께 치르기 때문이다. 서울시 유권자 830만여 명은 대통령 선거와 서울시교육감 선거, 2장의 투표용지를 함께 받는다. 당선자는 4년의 교육감 임기 가운데 곽 전 교육감이 채우지 못한 1년6개월을 일한다.
여론이 온통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쏠린 게 현실이지만, 교육감 재선거의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다. 11월 중반으로 접어들며 ‘선수’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출마 선언을 한 후보자만 6명. 그러나 이번 선거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진보 대 보수 진영 후보 사이의 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보수 진영에서는 후보 단일화 기구인 ‘좋은교육감추대시민회의’(시민회의)와 ‘교육계 원로회’가 나서 국민의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낸 문용린(65) 서울대 명예교수를 단일후보로 일찌감치 점찍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100여 개 교육·시민·사회단체가 꾸린 ‘2012 민주·진보 진영 서울교육감 추대위원회’(민주·진보 추대위)가 이수호(62) 전 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 위원장을 단일화 후보로 내세웠다. 양대 진영에서 벗어난 독자 후보도 여럿 있다. 2008년에 이어 두 번째 교육감에 도전하는 이인규(53)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상임대표와 이규석(66) 전 교육과학기술부 학교교육지원본부장, 최명복(64) 서울시의회 교육위원, 이상면(66) 교육문화원장도 교육감 재선거 예비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선거는 진보·보수 진영 모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양대 진영에서 배출한 2명의 전임 교육감이 모두 불명예 퇴진한 이른바 일대일 상황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교육정책 추진을 내걸었던 초대 서울시 직선 교육감으로 당선된 공정택(78) 전 교육감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구속수감 중이다. 공 교육감의 정책에 반기를 들며 당선된 곽 전 교육감도 2년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현직에 머물렀을 뿐이다.
선거판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절박한 쪽은 진보 진영이다. 이번 교육감 재선거가 치러지게 된 원인 제공자가 진보 진영 단일후보 출신인 곽 전 교육감이라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경기·강원·광주·전북 등 5곳의 진보 교육감들이 교과부와 깊은 갈등을 빚으며 교육 행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도 무겁게 다가온다. 시도 교육감의 맏형 격인 서울시교육감 재선거 결과에 따라 그동안 교육감의 권한으로 추진해온 혁신학교, 학생인권조례, 무상급식 등 교육개혁 정책이 자칫 흔들릴 수도 있다. 임기 절반을 넘어선 진보 교육감들은 최근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결과를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교과부와 갈등을 빚다가 보복성 감사를 당하기도 했다. 2011년 곽 교육감이 오세훈 서울시장과 무상급식 여부를 둘러싸고 주민투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승리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실제로 16개 시도 교육청의 수장인 교육감은 해당 지역의 교육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결정권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은 자리다. 구청장·군수 등 기초자치단체의 장과 권한을 나눠갖는 시도 지사와 달리, 교육감에겐 예산·인사 등의 권한이 집중돼 있다. 이 때문에 서울시교육감이 어떤 교육정책을 펼치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파열음 내는 보수 진영의 단일화 논의‘흥행’에 거는 기대도 높다. 이번 재선거는 대선과 같은 날에 치르기 때문에 그동안 턱없이 낮은 투표율을 보였던 시도 교육감 선거와 달리, 당선자의 대표성 논란도 피해갈 수 있다. 2008년 7월 공 전 교육감은 15.4%의 투표율 가운데 득표율이 40.13%였다. 2009년 4월 당선된 김상곤(69) 경기도교육감은 역대 최저 투표율인 12.3% 가운데 40.8%를 얻었다. 곽 전 교육감은 지방선거와 함께 치른 덕에 53.9%의 투표율 가운데 34.34%를 득표했다. 대통령 선거는 평균 투표율이 60%를 넘는다. 한마디로 진보·보수 진영의 ‘정면승부’다.
진보·보수 진영은 이번 선거가 ‘얼마나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두 차례의 선거 모두 단일화에 실패한 진영이 패배했다는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첫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진영을 대표해 나온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출신 후보 주경복 건국대 교수가 중도 성향의 이인규 후보(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상임대표)와의 단일화에 실패해 근소한 표 차이로 공정택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2010년 치른 두 번째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정반대였다. 보수 진영에서 유력한 후보였던 이원희(60)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이 비슷한 성향의 후보인 김영숙(59) 전 덕성여중 교장과 남승희(59) 명지전문대 교수 등과 끝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진보 진영 후보인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에게 1.1%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보수 성향 후보들의 전체 득표율은 곽 후보를 넘어섰다.
이 때문에 양대 진영 모두 일찌감치 단일화 논의에 군불을 지펴왔다. 아직까지 큰 탈 없이 단일화를 진행하고 있는 쪽은 진보 진영이다. 민주·진보 추대위는 지난 10월 초부터 민교협, 민주노총 서울본부,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등 30여 개 교육·시민·사회단체가 한데 모여 단일후보 결정을 위한 규칙과 일정 등을 논의해왔다. 이 과정에서 김윤자 한신대 교수, 송순재 전 서울시교육연수원장, 이수호 전 전교조 위원장, 이부영 전 서울시교육위원, 정용상 동국대 교수 등 5명이 경선 후보로 나섰다. 이들은 두 차례의 토론회와 여론조사와 배심원단 투표, 그리고 11월12~13일 진행한 선거인단 투표를 거쳐 이수호 전 전교조 위원장을 단일화 후보로 확정했다. 경선 과정에서 전교조 출신 후보 배제 논란 등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순탄한 과정을 거쳤다는 평이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단일화 시작 과정에서부터 파열음을 내고 있다. 단일화 절차에 대한 갈등 때문이다. 보수 진영 후보 단일화기구인 시민회의와 교육계 원로회는 ‘심층면접→후보추천위원회 투표’라는 절차를 내걸었다. 이에 따라 10월30일 단일화 경선에 등록한 후보 7명을 대상으로 비공개 심층면접을 했으며, 11월2일에는 최종 단일후보 결정을 위한 결선투표 대상자 3명을 상대로 후보추천위원회 20명의 투표를 했다. 최종 투표에서는 문용린 서울대 명예교수가 15표, 김진성 공교육살리기국민연합 공동대표가 3표, 서정화 홍익대사범대부속고 교장이 2표를 받았다. 그러나 뉴라이트학부모연합·바른교육전국연합 등 14개 보수단체 대표가 공동대표로 있는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은 단일화 결과 발표 다음날 성명을 내고 “단일화 기구인 시민회의의 공동준비위원장 출신인 문 교수가 스스로 단일후보가 됐다”며 단일화 기구의 대표성을 문제 삼았다.
단일화 과정에 대한 불만은 출마 후보에게서도 나왔다. 2008년 공 전 교육감과 단일화를 거치며 후보를 사퇴한 뒤 공 전 교육감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이규석 전 교과부 학교교육지원본부장은 10월30일 단일화 경선 후보에 등록했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회의가 새누리당의 국민행복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인 인사를 밀실 협의해 교육감 후보로 추대함으로써 교육의 정치화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단일화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때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조건부 확인서를 냈지만 일부 후보를 비공개로 접수하는가 하면 심사위원들도 공개하지 않은 채 심사가 진행됐다”며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이번 선거에 나선 최명복 서울시의회 교육위원도 “10월22일 시민회의로부터 (단일화 경선에) 정식으로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경선이 아니기 때문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는 점’, 그리고 ‘경선이 아닌 추대 방식으로는 우리 후보를 추대해준다고 해도 참여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단일화 과정만으로 선거 판세를 점치긴 어렵다. 여러 후보들 사이의 단일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탓이다. 10월24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모노리서치가 서울 거주 성인 남녀 839명을 대상으로 서울시교육감 재선거에 대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33.0%가 ‘투표를 한다면 진보 진영 후보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32.4%는 ‘보수 진영 후보를 찍겠다’고 답했다. 그 밖에 7.8%는 ‘기타 독자 후보’, 26.8%는 ‘잘 모르겠다’를 선택했다. 부동층의 표심을 어떻게 공략하느냐가 중요 변수인 셈이다.
문용린 후보 쪽은 일찌감치 중도층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그는 11월12일 서울시교육청에서 출마 기자간담회를 열고 “당선되면 중학교 1학년 중간·기말고사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곽 전 교육감의 교육정책에 대해 “교육학적 관점에서 보면 무상급식·학생인권조례·혁신학교는 교육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생각한다. 취지를 살려나갈 계획이다”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등 중도층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의 뜻을 존중하되 학교에 획일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자율권을 주겠다”고 밝혀 학교인권조례의 전면 시행에 부정적인 현 교과부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 후보의 적극적인 정책 제안에 맞서 진보 진영의 이수호 후보는 “적극적인 진보 교육감 정책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이 후보는 11월14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선이 되면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와 자립형 공립고등학교를 단계적으로 축소해 일반고등학교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학교선택제가 시행돼 자립형 사립고와 자율형 공립고등학교 등 과도하게 많은 학교를 서열화하는 문제점이 나오고 있다. 과학고도 입시학교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외국어고도 원래 취지와 맞지 않는 학교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에 학교들이 원래 목적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감시·감독을 제대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후보의 ‘중학교 1학년 중간·기말고사 폐지’ 발언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지나친 경쟁에 시달리고 있어 쉴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좋게 생각한다”고 전제한 뒤, “다만 어떻게 가다듬어져서 실제로 학교에 적용될 수 있는지가 남아 있는데, 최단기 교육부 장관을 지낸 문 후보는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새누리당에서 중요한 당직을 맡은 문 후보가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등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아직까지 서울시교육감 재선거는 후보들의 정책 공약이 종합적·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우열을 점치기 힘들다. 게다가 정당인이 출마할 수 없는 교육감 선거는 후보가 어떤 기호를 배정받느냐에 따라 득표율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대통령 선거처럼 여당이 기호 1번, 야당이 기호 2번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후보 등록을 마감한 뒤 추첨으로 정한다. 이 때문에 1·2번 기호를 얻을 경우 주요 대선 후보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얻는 이른바 ‘로또 교육감’이 생길 여지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또 진보·보수 진영 후보의 경쟁이 박빙 구도로 진행된다면, 2008년 교육감 선거와 같이 ‘중도 후보’로 나섰던 이인규 후보가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는 2008년 선거에 출마해 5.3%의 득표율을 얻었다. 전교조 활동을 잠시 한 뒤 독자적인 시민단체를 꾸리고 있는 그는 11월15일 “진영 논리에 따라 적합한 후보자를 가려내겠다는 발상은 교육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양 진영을 모두 비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중도 성향의 이 후보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교육감 자리를 둘러싸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은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 같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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