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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억 전쟁’의 최전선에 서다

등록 2012-10-31 18:10 수정 2020-05-03 04:27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는 데 영화만큼 탁월한 매체는 없다.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고문사건을 다룬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씨네21> 제공.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는 데 영화만큼 탁월한 매체는 없다.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고문사건을 다룬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씨네21> 제공.

인간은 ‘시간’ 앞에 부복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 절대적 힘의 권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이다. 기억이라는 ‘시간적 행위’에 의존하는 것. 기억은 ‘지금의 나’가 ‘어제의 나’와 동일한 존재라는 확신의 기초이자, 그 동일성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상상의 근거가 된다. 기억은 그래서 자아의 핵심 성분이자 ‘지금 이곳’에 긴박된 삶의 지평이 과거와 미래로 확장될 수 있게 하는 제1조건이다. 이는 비단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소속감과 연대의식 역시 개인과 집단을 아우르는 ‘공통의 기억’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물을 짓고, 공동체의 역사를 다룬 교과서를 편찬하는 것도 이런 공통 기억의 필요 때문이다.

올 대선, 유례없는 ‘기억 전쟁’의 장

문제는 동일한 사건이나 시대를 체험(목격)하더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기억이 입력·보존·재생되는 모든 과정에 주관적 이해관계와 주변 조건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탓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억은 주관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다. 기억의 불일치로 인한 갈등이 양보 없는 정치적 인정투쟁의 양상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정부 시기의 과거사 청산 논쟁이나 ‘역사 내전’으로까지 불린 최근의 교과서 수정 파동은 이 갈등의 격렬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식민통치와 전쟁, 독재와 민주화를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경험한 한국에선 기억을 둘러싼 갈등이 한층 첨예해지는 시기가 있다. 정치권력의 향배를 가를 대선 국면이 그런 경우다. 1987년 직선제 부활 뒤 2002년 16대 대선까지, 대체로 수세였던 것은 자유주의 정당 쪽이었다. 김대중은 1997년 당선되기까지 세 차례의 대선에서 한국전쟁기 행적과 관련해 혹독한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렸다. 2002년의 노무현 역시 캠페인 초반 장인의 좌익 전력 시비에 휘말려 한동안 고전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보수 진영의 공세는 대중의 ‘레드콤플렉스’에 의지해 후보나 주변 인물의 과거 행적을 이념적으로 문제 삼는 차원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기억의 전쟁’ 단계까지 비화하진 않았다.

올해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현대사 인식이 대선 초반부터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르며 소속 정당과 지지자들 사이의 ‘기억 투쟁’이 치열하다. 눈여겨볼 대목은 대결의 최전선에 영화라는 매체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전투에 나선 반박근혜(반이명박) 진영의 화력 구성은 다양하다. 1970년대 박정희 통치기를 다룬 과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 고문사건을 다룬 , 1980년 광주의 가해 책임자에 대한 피해자의 복수극을 그린 이다.

은 기록영화다. 자료 영상과 관계자 증언을 토대로 당대의 억압적 시대상을 충실히 재현했지만, 독립 다큐영화라는 점에서 그 파급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극영화다. 1985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살인적 고문을 피해자 김근태의 수기를 토대로 극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인기 웹툰 작가 강풀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픽션영화 은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벌이는 피해자 가족의 치밀한 복수극을 통해 학살의 트라우마와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 집단의 후안무치를 고발한다.

보수 진영도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의 아내이자 박근혜 후보의 어머니인 육영수의 일대기를 다룬 극영화 가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반박근혜 진영의 영화들이 ‘고발’과 ‘비판’이라는 정치 드라마의 문법에 충실한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멜로’라는 우회로를 택한 점이 눈길을 끈다. ‘군인 출신 독재자’라는 박정희의 ‘냉혈한’ 이미지를 아내 육영수의 여성성을 통해 중화하며, 그 딸인 박근혜에게 ‘독재자의 딸’이 아닌 ‘현명하고 자애로운 여성 지도자’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전략적 고려로 풀이된다.

영화가 기억의 치열한 격전장된 이유

여기서 묻게 된다. 왜 영화일까. 유력한 대답은 기억을 현재화하는 데 영화만큼 탁월한 매체가 없다는 점이다. 기억은 현실의 표상들을 시간성의 계기에 따라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사실상 ‘이야기’(서사)의 형식과 동일하다.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가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원활히 저장되고 재생되려면 어떤 ‘의미 구조’를 지녀야 하는데, 의미를 생성시키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 시간적 선후관계를 따라 재료들을 배치하는 것, 다시 말해 이야기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집단 기억’의 사례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문자가 없던 시절, 공동체의 시원을 일깨우는 집단 기억들은 대부분 민담·전설 같은 구술 서사의 형식으로 전승됐다. 이런 방식은 근대국가의 탄생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되는데, 매체가 말에서 문자로 바뀌었을 뿐 전승의 근본 형식이 서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호미 바바 같은 학자는 “네이션(국민·국가)은 서사의 효과”라고까지 단언한다.

핵심은 영화가 가장 진화한 서사 장르라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뒤늦게 출현했을 뿐 아니라, 생생한 시각적 재현 효과 덕분에 문자 서사에 비해 전달의 방식도 한층 직접적이다. 그뿐인가. 스펙터클 자체가 주는 쾌락도 만만찮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영화는 시공간의 격리를 뛰어넘어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시킨 근원적 사건을 눈앞에 생생히 현전시킨다. 오늘날 영화가 상쟁하는 기억들의 치열한 격전장이 된 이유다.

두 달도 채 안 남은 대선을 앞두고 영화계 안팎의 시선은 1990년대 할리우드 영화 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육영수 영화’ 보다, 전두환 폭압기를 배경으로 한 와 에 쏠려 있다(애초 육영수의 생일인 11월29일을 개봉 목표일로 잡았던 는 일정 차질로 개봉일이 대선 이후로 늦춰질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11월22일 개봉 예정인 는 기자 시사를 마치고 최종 편집 작업이 한창이다. 영화를 본 기자들의 반응은 찬사 일색이다. 메시지의 직접성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가로막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제작진은 현실정치에 대한 개입 의지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가 12월 대선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정지영 감독)

의 개봉일은 보다 일주일 늦은 11월29일이다. 역시 정치적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제작사인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말한다. “1980년 광주의 가해자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고통받은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하겠다.” 이런 감독과 제작진의 의도는 현실화될 수 있을까.

2007년 대선을 몇 개월 앞두고 개봉한 영화 는 1980년 광주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상업영화였다. 미학적 완성도를 두고 논란이 일었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날의 사건을 일깨워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단의 후한 점수를 받았다. 영화는 여주인공 신애(이요원)의 애절한 호소로 끝난다. “광주시민 여러분, 제발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이 호소는 물론 스크린 밖 관객들을 향한 것이었다. 기억의 정치를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텍스트에 표면화한 작품이 한국 영화사에 일찍이 있었던가.

영화 가 시사하는 것

정치적 시비가 일었다. 전두환의 민정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은 “대선에 영향을 끼치려는 노골적인 정치영화”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민주당 쪽은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졸렬함을 꼬집으면서도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각에선 “관객이 500만 명만 들어도 대선판을 흔들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영화는 성공했다. 무려 750만 명이 봤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그해 대선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대선 후보 정동영의 득표수는 의 관객 수보다 133만이나 적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판이 기운 선거를 영화 한 편으로 뒤집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으로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과거에 대한 분노가 현재에 대한 실망을 덮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본 젊은 세대는 전두환과 이명박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 전두환은 전두환이고 이명박은 이명박이었다. 여기엔 전문경영인이라는 이명박의 출신 배경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 영화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정치화하는 데 실패한 것은, 기억이 소환되는 시점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간과한 결과였다.

5년 만에 다시 도래한 정치적 선택 국면에서 영화를 매개로 한 기억의 소환 작업은 어떤 결과를 빚어낼까. 2007년과 다른 점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민주주의의 역진에 대한 불안이 젊은 세대 내부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다는 것이다. 판세마저 박빙이어서 개인의 투표 행위가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역대 어느 선거 때보다 높다. 기억의 정치가 효과를 발휘할 맥락적 요건은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관건은 역시 ‘산 전두환’과 ‘죽은 박정희의 딸’ 사이의 역사적·정치적 연속성을 관객이 얼마나 승인하느냐다. 젊은 세대의 의식 안에서 전두환과 박정희의 공통점은 ‘군인 출신 통치자’라는 것 외엔 많지 않다. 전두환이 이들에게 ‘전 재산 29만원’과 ‘단순무식 조폭 보스’의 이미지로 희화화돼 있다면, 박정희는 여전히 ‘쿠데타 일으키고 독재는 했으나 경제를 발전시킨 대통령’이다. 이 상황에서 와 이 호출하는 기억의 정치적 효과란 기껏 전두환에게 ‘야수적 폭력성’의 이미지를 추가하는 수준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두 영화가 의도하는 기억의 정치가 실효를 거두려면 결국 박정희·전두환·박근혜를 꼭짓점으로 삼는 ‘의미의 삼각형’이 완성돼야 한다. 그러나 이게 과연 잘 빚어진 정치영화 몇 편으로 가당키나 한 일일까.

구원을 기다리는 과거의 목록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정치 공간으로 호출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폭력과 참상으로 얼룩진, 비운의 현대사를 간직한 우리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진정한 변화에 대한 갈망은 미래 세대의 행복이란 이상뿐 아니라, 짓밟히고 억눌린 앞선 세대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도 부단히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발터 베냐민 ‘역사철학테제’ 두 번째 테제)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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