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등록 2012-08-07 16:01 수정 2020-05-03 04:26
통합진보당 유시민·심상정 전 공동대표와 노회찬 의원 등 혁신파 인사들은 “옛 당권파와 하나의 당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창당 8개월 만에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식물정당’으로 전락했다. 한겨레 사진

통합진보당 유시민·심상정 전 공동대표와 노회찬 의원 등 혁신파 인사들은 “옛 당권파와 하나의 당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창당 8개월 만에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식물정당’으로 전락했다. 한겨레 사진

이제 이혼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시기와 방법이 문제다. 통합진보당의 옛 당권파가 분당이나 당 해산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당의 분열은 이들에겐 고립이다. 19대 국회가 끝나는 순간 생명을 다하는 ‘시한부 정치세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각 주체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통합진보당의 분당 국면은 가시화되고 있다. 혁신파를 이루는 각 정파(국민참여당계, 진보신당 탈당파, 인천연합)의 인사들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안이 부결된 7월26일 이후 회동을 거듭하며 후속 조처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탈당에 가장 적극적인 쪽은 유시민 전 공동대표의 국민참여당계다. 유 전 대표는 “진보당은 국민들에게 사망 선고를 받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집행된 것과 다름없다”며 탈당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참여당계 당직자와 당원 200여 명은 앞서 “현재의 진보당으로는 대중정당 구현이 어렵고 야권 연대도 불가능하다”며 “진보 혁신과 정권 교체를 위해 당 안팎을 아우르는 다양한 모색을 시작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장 잔류해도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

통합진보당 당원 수는 5만8천 명 수준이다. 이미 수천 명이 탈당했다. 민주노총 소속 당원은 3만5천 명 정도다. 민주노총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안 처리를 통해 당의 쇄신을 이룰 것을 전제로 ‘조건부 지지 철회’ 의사를 선언한 상태다. 그러나 제명안 처리도, 당의 쇄신도 모두 실패했다. 8월13일로 예정된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의 논의에 따라 이들마저 집단적으로 이탈하기 시작하면 당은 와해 수준으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 진보신당 탈당파(통합연대)의 경우에는 고민이 더 깊다. 이미 한 차례 민주노동당을 떠났던 과거가 부담이다. 하지만 탈당을 포함한 ‘이혼 방식’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이들이 8월2일 성명에서 “노동에 기반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향한 통합진보당의 혁신 노력은 실패했고 더 이상 국민적 명분과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확인했다”며 “당내·외 혁신 제 세력의 힘을 모아낼 수 있는 진보혁신 블록을 형성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모색하고, 2012년 진보적 정권 교체에 복무해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다소 애매한 태도를 밝힌 것은 그런 고민의 산물로 보인다. ‘진보혁신 블록’이라는 문구에선 당 잔류 가능성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모색’이라는 부분에서는 탈당 가능성이 읽힌다. 같은 문장을 둘러싼 언론의 관측도 엇갈렸다.

하지만 옛 당권파와 하나의 당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은 혁신파의 모든 세력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심상정 의원은 “국민들께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며 고개를 떨궜다. 혁신파의 한 관계자는 “신속한 퇴각과 질서 있는 퇴각의 차이일 뿐 퇴각을 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며 “통합연대의 입장도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틀을 논의할 수 있는 추진체 등의 기구를 형성한 뒤 움직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연합 역시 주말 사이 내부 토론을 거쳐 공식적인 견해를 정리할 예정이다. 국민참여당계가 주장하는 즉각적인 집단 탈당이 이뤄질지는 미지수이지만, 당장은 잔류한다고 해도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탈당으로 의원직 던지진 않겠다”

강기갑 대표의 ‘결단’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강 대표는 8월3일 국회에서 백낙청 교수, 함세웅 신부 등 시민사회 원로들을 만나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자책했다. 그는 “특정 정파의 권력이 왜곡돼 작동되는 것을 고치려 패권의 뿌리를 잡아당겼는데, 그 뿌리가 넓고 깊어 당이 우지직 무너졌다”며 “뿌리를 조금 잘라내려 했는데 혁신의 가위가 부러져버린 형국”이라고 했다. 원로들도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 안팎의 전언을 종합하면 강 대표는 아직 대표직 사퇴 카드를 접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옛 당권파 인사들은 ‘강기갑 중심으로 화합’을 외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 대표는 “대부분의 지도부와 많은 당원들의 의견은 통합진보당이 현재 진보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데까지 이르렀다”며 “당 전체를 책임지는 대표와 지도부로서는 뭔가 납득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강 대표는 탈당이든 당내 투쟁이든 혁신파와 함께 행동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박원석·정진후·서기호 의원 등 혁신파에 속하는 비례대표 의원들의 거취 문제는 남아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하면 자동으로 의원직을 잃게 된다. 이들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당이 해산되거나, 아니면 당에서 이들을 제명하는 경우다. 박원석 의원은 “탈당으로 의원직을 던지지 않겠다”면서도 “구주류가 이야기하는 단합으로 대충 화합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일단 당에 잔류한 상태에서 혁신파의 재창당 혹은 신당 창당 움직임에 보조를 맞춰갈 예정이다. 옛 당권파를 상대로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자신들에 대한 제명 요구를 함께 제기하는 ‘당내 투쟁’에 돌입하겠다는 것이다.

역시나 중재 포즈 취하는 울산연합

이혼의 다른 주체인 옛 당권파의 태도는 완강하다. 이정희 전 대표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침묵의 형벌’을 깨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이미 함께 존재하고 협력해야 뿌리내리고 피어날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와 같은 공동 운명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에게 첫 마음이 있었다면 상대에게도 그 첫 마음이 있었다”며 “상대의 말에 칼날이 선연해도 그의 첫 마음부터 날카로운 칼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상규 의원은 “심상정·유시민 전 대표는 분당과 탈당의 여러 경력이 있었다”며 “또 대규모로 탈당하고 진보의 분열에 앞장서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범울산연합인 민병렬 최고위원은 대화를 위한 원탁회의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반전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혁신파가 주장하는 ‘수습’의 출발점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자진 사퇴다. 그러나 옛 당권파는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다”면서도 두 사람의 사퇴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다. 극적인 화합도, 순조로운 합의이혼도 현재로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