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에서 집권 여당의 후보는 언제나 현직 대통령과 불화했다.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지목했던 군사정권을 제외하면, 현직 대통령은 예외 없이 후임자에게 ‘자기 정치’의 공간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공간은 ‘현재의 권력’인 대통령과의 선긋기에 활용됐다.
대선 전 탈당해야 했던 현직 대통령들
차별화의 가장 직접적인 조처는 물론 대통령의 탈당이다. 1987년 이후 모든 현직 대통령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선 전 여당에서 탈당해야 했다. 미래 권력의 언어는 현재 권력의 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며 3당 합당을 합리화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정부를 ‘물정부’라고 비난했다. 국가 운영 능력을 상실한 집단이라는 주장이었다.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겠다. 지금과 같은 물정부로는 안 된다. 6공과는 전혀 다른 정부를 만들겠다”는 언급을 반복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소 독특한 사례다. 비주류인 노무현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전통적 지지층을 흡수해야 했다. 현직인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각을 세울 수 없는 구조였다. 정권 말 측근·친인척 비리가 터져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과 가치를 상당 부분 계승한, 일종의 정치적 동반자 관계였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3김정치 청산’은 의도와 무관하게 김대중 대통령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구호다. 노무현 후보는 대선을 20여 일 앞둔 시점인 2002년 11월27일 대선 후보 등록을 마치고 발표한 출마선언문에서 “구시대의 낡은 정치가 계속되느냐, 새 시대의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느냐의 분수령이 이번 선거”라며 “낡은 정치를 끝내겠다”고 말했다. “독선과 아집과 반칙의 늙은 정치를 청산하겠다”고도 했다.
물론 ‘정치적 선긋기’가 무조건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김영삼 후보는 민정계 인사들의 끝없는 견제와 싸워야 했다. 1997년 대선에서 ‘대세론’을 이어가던 이회창 후보는 ‘YS 화형식’까지 하는 등 김영삼 대통령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김 대통령은 이인제 후보의 탈당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고, 이회창 후보가 요구한 김대중 후보의 대선자금 수사를 연기하도록 지시하는 등 신구 권력의 충돌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보수의 분열은 결국 헌정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지난 7월10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누가 뭐래도 집권 여당의, 그리고 여야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후보다. 하지만 박근혜 의원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존재는 변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명박 정부 내내 ‘여당 내의 야당’으로 인식돼온 박 전 위원장이다. 정치에 무지한 최고권력은 ‘정치 행위’ 자체를 무시했다. ‘탈여의도’를 선언한 이 대통령의 참모들은 주요 국면마다 ‘여의도 대통령’인 박 의원의 입만 바라봐야 했다. 굵직한 현안들은 이 대통령이 아니라 박 의원 특유의 ‘한마디 정치’를 통해 좌지우지됐다.
MB에 부정적 62.7% 중 박근혜 지지는 24.7%
4·11 총선은 ‘정치인 박근혜’와 이 대통령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야권이 들고 나온 ‘이명박근혜’ 프레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박 전 위원장은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지 않는 방식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정치적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차별의 효과는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정책과 노선의 ‘좌클릭’을 감행했다.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을 영입하고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다. 민간인 사찰 파문과 사저 논란 등 결정적인 추문에 대해선 국정조사와 특검으로 선을 그었다. 총선 직후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야권의 패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실패하고 부패한 ‘한나라당의 이명박’을 털어냈다. 쇄신하고 깨끗한 ‘새누리당의 박근혜’로 차별화했다. 거기에 우리가 말려들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박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등 돌린 민심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한국리서치의 6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 응답자는 57.8%였다. 이 중 32.9%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25.9%는 박 의원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문재인 민주당 고문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16%였다. 6월 중순 이뤄진 리서치앤리서치 여론조사에서도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62.7%의 유권자 중 대선 후보 지지도는 안 원장(33.3%), 박 의원(24.7), 문 고문(15.7%)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선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층(60.2%) 중 안 원장과 박 의원에 대한 지지도가 오차범위 내에서 경합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을 배제한 내용적 차별화 전략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과거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선 후보의 관계 유형 속에서 봐도 독특한 경우다. 직접적인 대결을 피한다는 점에선 ‘김대중·노무현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5월6일 탈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박 의원은 이 대통령과 부채와 자산을 나눠갖지 않으려 한다. 유권자는 심판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심판받지 않는다. 박 의원이 현재의 기조를 무리하게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나온다.
박근혜 경선 캠프에 정치발전위원으로 참여하는 이상돈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탈당은)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미지를 연상시키면 안 좋겠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이) 그림자처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미래 권력의 그림자로서의 현직 대통령. 임기 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친박 진영의 요구다. 새누리당은 총선 이후 제작한 수첩에서 이 대통령의 사진을 삭제했다. 박근혜 의원의 출마선언문에도 이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박 의원은 “시대의 요구는 바뀌었는데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과 패러다임은 과거의 방식 그대로”라며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개인의 삶과 행복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에게 대선 과정에서 박 의원이 전면적이고도 공격적인 차별화를 시도할 가능성은 없는지 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 정부에서 박근혜 전 위원장과 우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잘 알지 않느냐. 우리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겠나. 하지만 당한 만큼 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나.”
이상득 전 의원 구속 뒤 ‘밀약석’은 원인무효
이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의 2010년 8월21일 청와대 회동 이후 두 사람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화 모드’를 이어가고 있다. 총선 전 이 대통령은 “박근혜 위원장만 한 정치인이 몇 사람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 의원도 “역대 정부 말기마다 대통령이 탈당하는 일이 반복됐는데 그래서 국민의 어려움이 해결됐느냐”며 당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대통령의 탈당 요구를 일축했다. ‘밀약설’도 제기됐다. 이 대통령은 박 의원의 대선 행보를 지원하고, 대신 박 의원은 대통령 일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겠느냐는 게 밀약설의 요지다. 대체로 친박계와 원만한 관계를 이어온 이상득 전 의원의 작품이라는 설도 돌았다.
물론 변수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구속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몰락했다. 퇴임 뒤 안전보장을 매개로 한 밀약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절반은 원인무효가 됐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이상득 전 의원에 대한 기소가 이뤄질 7월 말께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 형식으로 사과의 뜻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한 친박계 인사는 “이 대통령이 탈당 등 정치적인 조처를 자진해서 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며 “그런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언할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를 전후로 여당 내부에서 다시 한번 이 대통령의 거취 문제가 거론될 개연성은 있다.
정치권 안팎에선 최근 체포동의안 처리가 부결된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의 ‘방탄국회 논란’을 주시해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직후 ‘원내지도부 총사퇴’라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두언 의원을 향해선 탈당과 자진 출두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의 특권 포기 등 쇄신안을 주장해온 박근혜 의원의 대선 가도에 자칫 상처가 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박 전 위원장은 7월13일 대구를 방문해 자신의 교육관련 정책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공식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만큼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날 의원총회에 참석한 박 의원은 “국민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마음”이라며 “(정두언 의원) 자신이 책임지고 앞장서서 해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안의 본질과 무관하게 대선에 걸림돌이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쳐낼 수 있다는 박 의원의 ‘결기’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대권에 걸림돌이 된다면…”이라는 결기
박근혜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도 당을 장악했고,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야를 통틀어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대선은 역동적 과정이다. 국면은 몇 번이고 바뀔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 박 의원에게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갈등을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정국 주도권 확보를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다.
KSOI 윤희웅 조사분석실장은 “대통령과 여당 후보의 전면적인 갈등은 양쪽 모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만큼 현재의 평화 기조가 일단은 유지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상득 전 의원에 대한 수사가 대선자금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등 국면에 따라선 박근혜 전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울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내다봤다. 박 의원은 이미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야권의 가치를 일정하게 분점해왔다. 박 의원이 ‘이명박 때리기’의 칼자루마저 함께 쥐게 되면 야권이 대응할 전략이 있느냐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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