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운동가로 살았다. 그중 6년은 감옥 생활이었다. 출감 뒤 노동정책 연구자로 변신해 다시 15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4월17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난 은수미 당선인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오만했다”라고도 했다. 아무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과다. 왜일까.
“할 만큼 한 게 아니라 더 해야 했다”
우선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왜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이 아닌 민주당이었나.
우선 내가 국회의원이 될지 전혀 몰랐고, 다른 당은 입당 제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노동을 재구성해야 하는 시기다. 그 주체가 우선 정당이라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이나 나에겐 비슷하게 느껴졌다. 공약의 차이도 별로 없다. 정당은 도구일 뿐이 아닌가.
총선 결과는 의외였다. 어떻게 평가하나.
득표율로만 보면 5 대 5였기 때문에 참패는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나는 참패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확인한 국민의 기대가 있지 않나. 그 추세가 뒤집힌 것은 민주당의 대패이자 참패다. 누가 리더인지도 불분명하고, 그 리더를 통해 구현되어야 할 비전도 전달되지 않았다.
본인에게 과거 사노맹 활동은 어떤 의미인가.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던 청춘들의 간절함이었지만, 그만큼 과도한 면도 많았고 실수도 했다. 하지만 정말 후회 없었던 경험이다. 그 시기로 인해 나이와 세대, 개인적 삶을 넘어 역사와 인간·자유·생명·민주 등의 가치에 대해 꿈을 꿀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삶에 대한 집단적 꿈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날아올랐던 시기다. 정치인이 되면 다들 변한다고 하더라. 나도 아마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잘 변하지 않을까. 설마 그때 함께한 사람들과 그 역사를 배신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집단적 꿈’의 경험은 지금 젊은 세대는 가져보지 못한 어떤 것이겠다.
그게 너무 아쉽다. 내가 20대 때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뭔가 하겠다는 꿈을 꿨다. 지금의 2030세대에게는 남길 명예도 이름도 없더라. 내 20대가 힘들었지만, 날아오르기도 했고 불새가 돼보기도 했다. 이들은 나보다 훨씬 더 힘들어한다. 우리 세대는, 나는 도대체 뭘 했나.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건가 반성했다. 이들에게 미안하다. 감옥까지 다녀왔으니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오만했다. 할 만큼 한 게 아니라 더 해야 했던 거다.
교도소 수감 시절 결핵균이 퍼져 장을 50cm 잘라내는 수술까지 받았다고 들었다.
결핵균이 머리카락을 빼고 온몸에 퍼졌다. 당시 교도소는 다 그랬다. 밥을 먹을 때 푸세식 변소에서 구더기가 올라왔다. 교도관들이 딱하게 봤던지 단식하지 않는 조건으로 원하는 책을 들여오도록 배려해줬다. 김수행 교수가 감수한 부터 리영희 선생의 책도 들어왔다. 어머니가 당시 한 사회과학 서점과 계약을 맺고 주요 신간을 대부분 넣어주셨다. 책값만 3천만원이 들었다고 하더라.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가 한 일의 의미는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이 많았기에 혼자 복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입 제안에 박노해·조국 응원해 줘
사회주의 운동가에서 학자로, 다시 정치인으로의 변모는 극적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15년마다 인생의 판이 바뀌고 있다. 20살에 운동을 시작해 감옥에서 나온 게 35살이었다. 그리고 50살까지 연구자로 살았다. 이제 또 새로운 15년이 시작된 셈이다. 20살 때는 목소리를 높인다든지, 강한 표현을 한다든지…. 애써 강해 보이려고 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노맹 시절에는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3학년 때 구로공단에 미싱공으로 들어갔다. 조장 언니에게 처음 들은 욕이 “개씨부랄년”이었다. 전문 미싱공이 되려면 손톱이 세 번 빠져야 한다더라. 실제 전동미싱에 손톱의 반이 날아간 일이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조장이 와서 한다는 소리가 “원단에 피 묻는다”는 거였다. 노동의 현실을 그렇게 알았다. 매일 자문했다. 나는 왜 버티고 있나, 왜 도망가지 않나, 왜 반성문을 쓰지 않나…. 당시 15년 동안은 자기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다. 연구자로서의 15년은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노동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게 너무 당연한 일로 느껴졌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번 선택의 기로에선 고민하지 않았다.
사노맹에서 함께 활동한 박노해 시인이나 백태웅·조국 교수와는 자주 연락하나.
항상 의논한다. 이번에 영입 제안을 받고 박노해 선배에게 전화를 했는데, 굉장히 격려해줬다. 조국 교수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혹시 예전에 내가 부렸던 억지는 아닌지, 아니면 개인적 욕심으로 보이지 않는지 물었다. 내가 정치를 하는 게 ‘순리’라고 말해주더라. 물론 조국이나 백태웅은 너무 잘생겼다. 절대로 함께 사진 찍지 않는다는 게 그들에 대한 내 입장이다. (웃음)
19대 국회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제기할 노동정책의 이슈는 뭔가.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헌법에 규정된 노동3권을 보장하는 일이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저임금 근로 문제, 쌍용자동차 문제에서 나타난 정부의 역할과 책임도 짚어야 한다. 벌써 22명이나 죽었다. 이 문제에 눈감는 것은 사회도 국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동법도 개정해야 한다. 새누리당도 비정규직 문제에서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공통적인 부분은 일정한 개정이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난타전이 아니라 그런 진전을 이뤄보고 싶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누군가를 날아오르게 만드는 일”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486세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도 그 일원이고. 하지만 우리 세대는 이제 더 이상 빛나려고 해선 안 된다. 길을 만들고 그 길에 깔리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지금의 2030세대가 걷도록 해야 한다. 다시 우리가 그 길을 걷겠다? 이 생각을 없애야 한다. 스스로에게도 다짐한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은 다시 20대처럼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날아오르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이다. 국회에 있는 486 의원 중에는 내 친구도 많다. 그들에게 꼭 제안하고 싶다. 날아오르지 말자, 빛나려고 하지 말자.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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