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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장세동의 배후는?

스스로 민간인 사찰 하드디스크 삭제의 “몸통”이라고 주장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장세동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며 윗선 ‘전두환’은 누굴까 떠올리게 돼
등록 2012-03-29 17:16 수정 2020-05-03 04:26

“동물학적으로 깃털과 몸통을 구분해 말하는데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이거다. 원래 ‘깃털’들은 ‘몸통’을 자처한다. 15년 전에도 그랬다. 1997년 문민정부 말기에 터진 한보 특혜 의혹 사건에서 당시 홍인길 신한국당 의원은 ‘깃털-몸통 일체론’을 폈다. 닭도 털을 뽑아야 치킨이 된다는 상식을 저버린 것이다. 그는 “왜 자꾸 (나보고) 실세라고 하나. 나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깃털론’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몸통의 실체를 떠올리게 했다. “깃털이라는 말은 나 자신이 실세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실세라고 부르는 데 대해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한보 특혜대출에 다른 배후가 있다는 뜻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깃털은 몸통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 요즘 말로 ‘지능적 안티’의 선구자인 셈이다.
홍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 마을인 경남 거제군 외포리 출신이다. 신임이 두터웠고 핵심 실세가 됐다. 특혜대출의 ‘마지막 배후’가 자신이라며 ‘깃털은 곧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깃털의 임무는 몸통을 보호하는 것” “제2의 장세동이 되려 한다”는 비판에도 끄떡없었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 3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회견을 서둘러 마치고 회견장을 빠져나가다가 사람들에 밀려 바닥에 엎어졌다. 무얼 또 덮으려 하는가. <한겨레> 김정효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 3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회견을 서둘러 마치고 회견장을 빠져나가다가 사람들에 밀려 바닥에 엎어졌다. 무얼 또 덮으려 하는가. <한겨레> 김정효

몸통 주장에 “소가 웃을 일” 반응

지난 3월20일, 몸통이라 참칭하는 이가 또다시 나타났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중간 책임자라는 의혹을 사고 있는 이영호(48)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주인공이다. 불법사찰 증거인멸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첫 보도(901호 표지이야기 ‘청와대가 민간인 불법사찰 개입 해명할 차례다’ 참조)와, 이어진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 주무관의 잇단 폭로로 청와대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이 전 비서관은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료 삭제에 관한 한 모든 문제는 내가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민간인을 불법사찰한 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 삭제를 자신이 지시했고 ‘또 다른 배후’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로 끝, 여기서 끝내자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몸통론은 또 다른 몸통을 부르고, 몸통에 이어 지시를 내린 머리통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지능적 안티라기보다는 그냥 안티에 가깝다.

‘범포항’ 출신인 이 전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포항 인맥이다. 민간인 불법사찰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이인규(56) 전 공직윤리지원관, 불법사찰 ‘몸통들’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박영준(52) 전 총리실 국무차장과 같은 인맥이다. 지원관실은 이명박 대통령의 비선 조직이며, 그 때문에 이른바 경북 영일·포항 출신(영포라인)들로 불법사찰 조직을 꾸렸다는 의심이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가 몸통이라고 하니 “소가 웃을 일”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전 비서관은 “자료 삭제는 증거인멸이 아니다” “민간인 불법사찰로 왜곡하는 것은 현 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민주통합당의 정치공작”이라는 자기분열적 발언도 내뱉었다. 궤변이다. 하지만 단말마의 ‘몸통 주장’은 2010년에 이뤄진 기존 검찰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단적으로 증명한다. 동시에 ‘검찰 수사 과정에 대한 수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을 싣는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건낸 돈의 의미는?

2010년 7~8월 민간인 불법사찰 1차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은 증거인멸 혐의에 대해서는 지원관실 진경락 과장을 주범으로, 이번에 청와대 개입 사실을 폭로한 장 전 주무관을 종범으로 기소하는 선에서 봉합했다. 지금 와서야 자신이 몸통이라고 주장하는 이 전 비서관는 당시 어떤 조사를 받았을까. 검찰은 참고인 자격으로 그를 소환해 고작 6시간 정도 조사하고 돌려보냈다. 장 전 주무관에게 증거인멸 과정에서 사용할 대포폰을 건넨 최종석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에게는 서울시내 호텔에서 조사하는 ‘특별 예우’를 베풀었다. 최 전 행정관의 직속 상관이 바로 이 전 비서관이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최 전 행정관에게 의심스러울 게 없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통보하는 선에서 수사를 끊어버렸지만 검찰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고 한다. 검찰의 미온적 수사를 두고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사건을 찍어눌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민간인 불법사찰 끄나풀에 불과했지만 ‘독박’을 쓴 이들을 청와대가 금품으로 회유하려 했다는 정황도 춘삼월이 무색하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2010년 9월 불법사찰 사건으로 구속된 이인규 전 지원관, 진경락 전 과장의 가족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위로 차원이라고 해명했지만 ‘입막음용’이라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최고위 참모가 불법을 저지른 이들에게 돈을 전달했다면, 당연히 의혹은 대통령에게까지 뻗친다. 장 전 주무관에 대한 금품 회유는 노골적이다. 그는 최 전 행정관이 변호사 비용이라며 4천만원을 줬다가 나중에 2500만원을 회수해갔다고 주장했다. 이 전 비서관도 자신에게 2천만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불법사찰 사실이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난해 4월에도 거액이 건네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장 전 주무관은 류충렬 당시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청와대 민정수석실 장석명 공직기강비서관이 주는 돈”이라며 2심 판결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자신에게 5천만원을 건넸다고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런저런 명목의 돈이 1억원을 넘는다. 지난해 1월 장 전 주무관이 녹음한 전화 통화에는 청와대와 총리실 쪽에서 ‘5억~10억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하려 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검찰, 1억원 출처부터 밝혀야

재수사를 하는 검찰이 “내가 몸통”이라는 이영호 전 비서관의 말만 믿고 수사를 끝내기에는 판이 너무 커져버렸다. 엎어버리기에는 세상에 드러난 사실이 너무 많다. 당장, 장 전 주무관에게 건네졌다는 1억원대 돈의 출처부터 밝혀야 한다. 현금이라지만 거액인데다 나올 곳이 뻔한, 출처가 한정된 돈이다. 돈의 출발점을 찾는 것은 검찰의 특기다. 청와대와 검찰 지휘부가 수사를 무마하려 했는지도 가려내야 한다. 이번에도 ‘문제될 게 없다’는 청와대의 한마디에 뺏던 칼을 도로 집어넣는다면, 특별검사에 의해 검찰이 수사받는 굴욕적 상황을 초래할지 모른다.

3월23일 검찰은 이영호·이인규 등 핵심 관련자 4명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깃털은 몸통이 될 수 없다. ‘21세기 장세동’이 있다면 ‘21세기 전두환’도 있다는 얘기다. 정권의 황혼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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