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딛고 날아오른다?
1996년,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은 문화방송 였다. 유명인사에게 예고 없이 마이크를 들이밀어 인터뷰를 하는 짓궂은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이경규씨가 ‘덮친’ 사람은, 이른 새벽 서울 동교동 집을 나서던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였다. 파격이었다. 당시 프로그램을 맡은 김영희 PD는 최근 “다들 긴장한 상태로 갔고, 막막한 나머지 (DJ의 집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았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과 정치인은 골목길에서 마주쳤다. 노회한 정치인은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즉석에서 입담을 풀었다. 정치평론가 이동형은 저서 에서 이 만남이 훗날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예능 프로그램, 인간적 매력 발산의 장
“여기서 김대중은 그동안 군부가 심어줬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뉴스나 신문에서 과격, 용공,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만 있었던 김대중은 이 프로그램에서 DJ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력한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예능 프로그램에 보이지 않게 빚을 졌다. 그는 2009년 6월 문화방송 에 출연했다. 인상은 깊게 남았다. 당사자인 안 원장이 가장 실감한 듯했다. 지난해 이 주변 인사의 말을 인용해 안 원장의 말을 보도한 내용은 흥미롭다. 안 원장은 방송에 출연한 뒤 지인들에게 “학생 50명을 상대로 내 생각을 전파하는 데 많은 한계를 느꼈는데, TV에 한 번 나가니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고 말했다. 신문은 “안 원장은 여기서 ‘청춘 콘서트’와 같은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고민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능 프로그램은 정치인들이 인간적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장이다. 이를 통해 정치인은 ‘유명인사’에서 ‘내가 잘 아는 사람’으로 친근하게 다가선다. 한국방송 같은 프로그램이 정치인들에게 인기 있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2012년, 선거의 해가 밝았다. 이를 알려주듯, 두 명의 ‘거물’이 나란히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SBS 예능 프로그램 에 지난 1월2일과 9일에 등장했다. 두 사람 모두 ‘예능 프로그램 최초 단독 출연’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낯선 자리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박 위원장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그룹 ‘거북이’의 를 부르고, 문 고문 역시 벽돌 격파 시범을 보이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이렇게 몸을 아끼지 않은 두 사람은 예능이라는 기회를 제대로 잡았을까. 평가는 엇갈린다. 흥미로운 점은, 방송을 대하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태도였다. 요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 박 위원장이 완곡한 어법을 쓴 데 견줘, 문 고문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박 위원장은 시사 문제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문 고문은 제작진이 ‘아슬아슬하다’고 밝힐 정도로 정치적 발언을 했다. 박 위원장은 새해의 소망을 묻는 질문에도 대선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잘 아실 텐데…” 정도로 넘겼다. 개인적 부분을 드러내는 대목에서도 두 사람은 대조적이었다. 박 위원장은 공과 사를 나눠서 사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은 우회적으로 받아넘겼다. 그가 들고 온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수첩에 적힌 내용은 무엇인지를 묻는 MC들의 질문에도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라는 식으로 답했다. 문 고문이 “쪽팔린다” “용기 없는 게 들킬까 겁난다” 등의 말을 하며 속내를 솔직히 드러낸 것과 대조적이었다. 누리꾼 ‘jinogood’는 “박근혜는 빈틈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문재인은 빈틈을 보이려고 했다”고 트위터에서 평했다.
권위적 어법 vs 격의 없는 어법
둘째, 박 위원장의 어법이 권위적 분위기를 풍겼다면, 문재인 고문은 상대적으로 격의 없이 대했다. 정치적 문제와 개인적 문제를 제외하고는 박 위원장의 말은 때론 공격적이었고, 상황에 따라 면박에 가까운 표현을 쓰기도 했다. 퀴즈를 내기에 앞서 김제동씨가 “어떠세요, 지금 느낌이?”라고 묻자, 박 위원장은 “빨리 하세요”라고 답했다. 대학교 때 장학금을 받은 이유에 대해 “청와대에서 입김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라는 우스개가 섞인 질문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에서 보니) 세상이 온통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라고 받아쳤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주고받은 말이었지만 말 속에 한기가 스며 있었다. 문재인 고문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 특유의 낮은 웃음소리로 스스럼없이 답한 것과 달랐다. 누리꾼 ‘lovepeacehj’는 “박근혜 편 때 MC들은 뭔가 불편하고 긴장된 느낌이 보여 보는 내내 불편했다. 문재인 편 때 MC들은 동네 친한 형이랑 대화하는 분위기 같아 너무 편안했다”고 트위터에 썼다. 문재인 고문에 우호적인 태도를 담은 글로 보이지만, 대조되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셋째, 박근혜 위원장은 한마디도 빈말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도드라졌다. 그래서 인간적 매력은 덜 전달됐지만, 신뢰감을 주는 면도 있었다. 방송진이 박 위원장에게 새로운 머리 스타일을 제안하며 머리 모양처럼 새로운 정치를 해달라고 제안하자, 박 위원장은 “새로운 정치는 머리 스타일하고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MC들이 방송 마지막에 준 선물에 대해서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실례가 될 것 같다”라고 답해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유연함이 떨어져 보일 수는 있지만, 상황에 따라 속없는 말로 변통하지 않는 면모가 드러났다. 그의 어법은 정치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미덕’이기도 했다. 누리꾼 ‘김미정’은 박 위원장에 대해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는 면과 정치사에 있어 늘 말을 아끼시는 면… 대단한 인내와 자중”이라고 프로그램 게시판에서 평했다.
전반적으로 박 위원장은 사적인 감정 등에 관한 얘기는 최대한 절제하고, 공적인 주제는 골라가며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적인 생활을 하며 ‘멸사봉공’의 태도가 몸에 익어 보였다. 반면 문 고문은 사적인 얘기에는 솔직했고, 공적인 주제에도 거침이 없었다. 따라서 방송 분위기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총선·대선 결과로 가늠할밖에두 사람의 방송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시청률은 박 위원장이 앞섰다. AGB닐슨 미디어리서치의 집계를 보면, 박 위원장의 시청률(12.2%)이 문 고문(10.5%)보다 높았다. 시청평은 다르게 나왔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두 편 가운데 더 재미있게 본 편은?’이라고 묻는 온라인 설문에 문 고문의 방송을 꼽은 응답자가 75.4%였다. 설문 응답자는 5만5481명이었다. 물론 두 통계는 부분적인 진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시청률은 같은 시간대 다른 채널의 내용에 크게 영향받을 수 있고, 온라인 설문도 응답자가 전체 유권자 세대를 포괄한다고 보기 힘든 까닭이다. 결국, ‘두 거물’의 예능 데뷔 성적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 결과를 지켜보며 되짚어보는 수밖에 없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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