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격랑의 시기, 변화는 필연

김정일 사망으로 시작된 2012년 동북아 지각 변동… 미국과 중국의 경쟁적 북한 끌어안기 속 한국의 선택은?
등록 2012-01-04 14:38 수정 2020-05-02 04:26

1월13일 대만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3월4일엔 러시아 대선이다. 10월엔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의 5세대 지도부가 물러나고,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이끄는 6세대 지도부가 들어선다. 11월엔 미국 대선과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전초전’ 격인 총선을 4월11일에 치르는 한국에선 12월19일 대선을 치르게 된다.

북-중 관계의 ‘래칫효과’
2011년 8월 말 출범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 정부가 2013년 9월로 예정된 중의원 선거 때까지 ‘생존’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본학)는 “소비세 인상 문제를 두고 12월28일 집권 민주당 의원 9명이 무더기로 탈당한 사태가 그 전조”라고 말했다. 결국 2012년엔 동북아의 모든 국가가 격동의 한 해를 보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 격동의 문을 연 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촉발된 북한의 권력 교체다.
‘동북 4성’이란 말이 있다.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의 동북 3성과 함께 중국이 북한을 사실상 자국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예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남북·북-미 관계의 단절 속에 지난 몇 년간 북한의 대중국 의존도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란 우려 섞인 전망이 비등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럴까?
‘앞에 있는 적보다 뒤에 있는 적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한 북한 전문가가 “대중 관계를 거론할 때마다, 북쪽 사람들이 은연 중에 내뱉는 말”이라고 소개했다. ‘앞의 적’은 남한과 주한미군이다. ‘뒤의 적’은 중국이란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생각하면 남쪽과 주한미군을 적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하지만 ‘혈맹’이자, 소련 해체 이후 사실상 유일한 ‘후견국’인 중국이 북한의 ‘적’이란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낯설지만, 엉뚱한 소리는 아니다. 생전의 김일성 주석은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양국간 갈등이 심하던 1968년 동독 대표단과 대화에서 이런 속내를 밝힌 바 있다. “중국과 커다란 견해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동맹 유지를 원한다. 우리는 100만이 넘는 적군과 맞대면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동맹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등 뒤에 또 다른 적을 두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북아를 둘러싼 지정학은 복잡하다.
남쪽처럼, 북쪽도 중국을 부담스러워한단다. 남북은 정치적인 이유로 갈등이 생기면, ‘합의 파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냉각기를 거쳐 갈등 요소가 제거되면 다시 만난다. 적대와 공생의 이중주다. 북-중 관계는 다르다. 북-중 관계사에서 합의파기는 금기사항이다. 합의하면 실행해야 한다. 이른바 ‘래칫효과’. 톱니바퀴가 맞물려 일단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면, 이를 뒤로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북쪽이 개혁·개방과 관련해 중국 쪽과 합의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중국 전문가인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북한 경제의 대중 의존도가 심화할수록 래칫효과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며 “북쪽이 대중 정책을 수립할 때 항상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로를 부담스러워 하는 북-중
최근 4년 새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 속에 북-미 대화도 지지부진했다. 남북·북-미 관계를 제외하고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던 북쪽으로선, 안팎으로 달리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게다. 압록강 유역 개발이니, 나진·선봉 특구니 하는 대중 경제협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남북, 북-미 관계의 악화에 떠밀린 북쪽의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조문단으로 서울을 찾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한국의 전직 고위 인사들에게 밝혔다는 ‘속내’는 곱씹을 만하다. ‘미국과 남조선이 우리와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국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건 우리도 바라지 않는다. 남조선도 그걸 원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북남협력을) 잘해보자.’
북-중 관계가 매끄럽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난 2006년엔 파열음까지 냈다. 그해 7월 북쪽이 ‘장거리 로켓’(대포동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을 때, 중국은 일본이 주도한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해 10월 북쪽이 1차 핵실험을 했을 때는 “북한이 제멋대로 핵실험을 했다”는 이례적으로 강도높은 비난 성명을 내놨다. 북쪽의 군사적 도발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중국의 평화적 부상의 핵심 전제로 여기는 중국 지도부에 골칫거리이자 심각한 위험요인이다. ‘관리’가 불가피하다.
이 시기 북-중 관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한 권 있다. 2008년 12월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펴낸 란 제목의 책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이 소련 하바롭스크 북야영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밝혀 적은 이 책의 서문을 읽다 보면 그 ‘발행 의도’를 어렵잖게 엿볼 수 있다.
“그때(1945년 8월)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지만,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참으로 간고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 어려운 때에 (김일성 주석이) 새 조국 건설을 위해 불면불휴의 분망하신 나날을 보내면서도, 중국 혁명을 얼마나 도와주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
이를 두고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속에서 북쪽이 중국을 향해 ‘우리도 너희를 도와준 역사가 있다’는 점을 책을 통해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 셈”이라며 “북-중 관계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말했다. 책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듬해인 2009년 북-중 관계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해 5월 북쪽이 2차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에 찬성표를 던지긴 했지만, 북-중 무역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희옥 교수는 “중국 내부에서 북의 후계체제를 둘러싼 논쟁이 끝났기 때문일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9년 이후 중국을 세 차례 방문했다. 특히 2010년 8월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요한 얘기가 나온다. (중국 쪽 회담 발표문에) ‘양당(북 노동당과 중국 공산당) 간에 집정 경험을 공유하고’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북-중 간 제도적 관계를 복원하고 체제·제도를 긴밀히 연계시키겠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북한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쟁투
그해 9월 북쪽은 노동당 대표자회를 44년 만에 소집해 김정일 위원장의 삼남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한 달여 뒤 열린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5중전회)에서 차세대 중국 지도부를 이끌 시진핑도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에 오른다. 이를 두고 이희옥 교수는 “다음 세대를 이끌 두 나라 후계자가 같은 직책을 맡은 시점이 맞물린 것은, 향후 대를 이어 북-중 권력 간 교감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인식과 제도의 틀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발표 당일 보여준 중국의 발빠른 대응은 이런 ‘숙려기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다.
북-중 관계가 탄력을 받자, 미국이 바빠지고 있다. 중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을 끌어안으며 한반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미국도 북쪽이 중국과 일방적으로 밀착하지 못하도록 방향을 틀고 있는 게다. 내 동맹은 강화하고 남의 동맹은 끌어내리는, 이른바 ‘동맹전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전 핵활동(우라늄 농축) 중단과 식량 원조(이른바 ‘영양지원’)를 맞바꾸기로 북쪽과 잠정 합의한 미국은, 사망 발표 직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 “북한의 새 지도부가 북한이 합의한 내용을 준수하고,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주민들의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평화의 길로 이끌어나가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는 발언이다.
김 위원장의 영결식이 치러진 12월28일에도 ‘대화 재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이날 마크 토너 국무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은 애도 기간 중이며, 언제쯤 그 기간이 끝날지 알 수 없다”며 “북한으로부터 모종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숨졌을 때, 북-미는 한 달여 만에 대화를 재개해 그해 10월 제1차 북핵 위기를 마감하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도출해낸 바 있다.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국장은 12월21일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동안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열망해온 이들은 (김 위원장 사후) 평양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거나, 정국 불안정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성급한 추측은 화를 부를 수 있다. 가장 신중한 접근법은 진행해오던 (북-미)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김정은 체제가 핵 프로그램을 중단할 수 있을지를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체제’는 이제 막 발을 뗐다. 주어진 현실이다. 호오를 다툴 계제가 아니다. 그 체제의 불안정성을 고려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중국과 미국은 동시에 북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은 ‘대세’를 따를 것이다. 남는 것은 한국의 선택이다. 임기 마지막 해를 맞아, 이명박 대통령은 연초에 발표할 신년사에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담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신년사에 담아야 할 내용으로 크게 세 가지를 주문했다.

협력이냐 대결이냐, 한국의 선택에 달렸다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우리도 남북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는 메시지도 필요하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도 빠져선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이렇게 하면 우리도 이렇게 해주겠다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이렇게 할 테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판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가 없으면 우리 정부는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2012년 동북아는 격랑에 휩싸일 터다. 2011년 말 김정일 위원장 사망으로 촉발된 북의 ‘권력 교체’로 시작된 그 대장정은 2012년 12월 남에서 치러지는 대선으로 마감될 것이다. 격동의 시기, 변화는 필연이다. 변화의 ‘내용’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대결’이든, ‘협력’이든 마찬가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