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과 지방 고교 출신 학생들이 별도의 가산점을 부여받아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서울 강남3구에서만이 아니라 개천에서도 용이 나오는 사회.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제동이 걸려 중소기업과 중소상인들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살 수 있는 사회. 비정규직들도 정규직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사회. 대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받아 가난한 사람도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
학자들, 민주당 의원 27명 공동 참여
대한민국의 99%가 원하는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1%의 소수 재벌과 부유층의 탐욕을 막고, 국민 대다수가 공정한 기회와 정당한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큰 밑그림이 제시됐다.
민주당의 ‘헌법제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이하 특위·위원장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11월17일 경제 민주화를 위한 43개 정책과제를 발표했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의 양 날개로 날아야 한다고 강조돼왔는데, 그중 하나인 경제 민주화 구현을 위한 구체적 틀이 제시된 것이다. 정책과제들은 헌법 119조 2항에서 규정한 분배정의, 공정경쟁, 참여경제의 원칙을 바탕으로 개혁진보 진영에서 그동안 개별적으로 제기해온 개혁 방안을 수렴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집대성됐다. 이번 작업에는 특위가 출범한 지난 7월부터 4개월 동안 유종일 위원장을 비롯해 김진방 인하대 교수, 신광영 중앙대 교수,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홍종학 경원대 교수 등 대표적 개혁 성향 학자들과 민주당 의원 27명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유종일 위원장은 “야권 통합과 연대는 선거를 겨냥한 반MB·반한나라당 단일전선의 구축이 아니라 경제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경제 민주화를 위한 정책과제들이 야권 통합의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책과제는 크게 교육기회 균등, 시장 민주화, 참여경제, 분배형평 등 4개 분야로 나뉜다. 특위는 교육기회 균등을 위해 기회균등선발제 도입을 제안했다. 기회균등선발제는 부모의 교육 및 소득 수준에 따라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다. 기회균등선발제 도입안은 교육이 계층 고착화를 강화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 부자 동네인 강남·서초구의 경우 고등학교 3학년 졸업생 1천 명당 평균 25명이 서울대에 합격하는 반면, 강북인 용산구는 절반 수준인 12.5명에 불과한 게 우리 현실이다. 미국의 경우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은 지원생, 소수민족 지원생, 지원 비율이 낮은 지역 지원생 등을 우대하는 방식으로 기회균등선발제가 보편화돼 있다. 특위는 이 제도가 대학입시 경쟁 완화, 사고력과 창의력 위주의 교육으로 전환, 사교육 감소 등과 같은 교육 개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했다.
재벌 개혁 비롯한 시장 민주화 역점
시장 민주화는 재벌 개혁, 중소기업·중소상인 보호, 노동시장 민주화, 금융 민주화 등 4개 분야를 포함하고 있어서 특위가 가장 역점을 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유종일 위원장은 “경제 민주화의 요체는 재벌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특위는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를 부활하고, 순환출자를 금지하며, 지주회사제 관련 규제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출총제는 재벌의 지배력 확대와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기 위해 자산이 10조원 이상인 재벌 소속 대기업(자산 2조원 이상)이 다른 회사의 주식을 순자산의 40%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2009년에 폐지했다. 하지만 출총제 폐지 이후 재벌의 계열사 수가 급속하게 팽창해 경제력 집중이 심화하고 중소기업과 중소상인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졌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친재벌 정책으로 일관하며 각종 재벌 규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선 이명박 정부 집권 3년간 1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426개에서 581개로 36% 급증해 연평균 증가율이 12%에 달했다. 이는 참여정부 5년간 연평균 증가율 6%의 두 배 수준이다. 지난 11월1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도 출총제 부활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특위는 상위 10대 재벌을 대상으로 출자총액을 순자산의 40%까지로 제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순환출자는 재벌 총수가 평균 4~5%의 적은 지분만으로도 자산이 수십조~수백조원에 이르는 수십 개 기업을 지배하는 수단이다. 특위는 현행 공정거래법에서 재벌 계열사 간 상호출자(A→B→A)를 금지하는 것처럼, 순환출자(A→B→C→D→A)도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정부는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지주회사와 자회사·손자회사의 행위제한을 2007년 이후 대폭 완화했다. 예를 들어 지주회사의 부채비율 상한을 100%에서 200%로 높이고, 자회사와 손자회사에 대한 지분율 하한을 상장회사는 25%에서 20%로, 비상장회사는 50%에서 40%로 각각 낮추었다. 특위는 재벌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도 수많은 손자회사·증손회사를 거느림으로써 복잡한 다단계 출자의 폐해가 근절되지 않는다고 보고, 지주회사 체제의 행위제한을 2007년 법 개정 이전으로 복원할 것을 제안했다. 또 재벌이 인적 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자기주식에 대해 분할회사 주식을 배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제안했다. 그동안 SK, CJ, 한진중공업홀딩스의 총수 일가들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이런 수법을 통해 지분율을 2~3배 높였다.
이 밖에도 10대 재벌을 대상으로 각종 세금 감면과 공제 내역, 총수 일가의 세금 납부 자료 등을 공개하도록 하고, 횡령이나 배임 금액이 클 경우 가중처벌하고, 재벌의 떡값 제공을 처벌하기 위해 포괄적 뇌물죄를 신설하는 방안이 함께 제시됐다.
정리해고제도 개선 방안도 내놔
중소기업과 중소상인 보호대책으로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와 처벌 강화 방안도 내놓았다. 일감 몰아주기(또는 회사기회 유용)는 재벌 총수 일가의 새로운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세법 개정을 통해 일감 몰아주기로 이익을 얻은 재벌 총수 일가에게 상속·증여세를 물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특위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상법상 ‘회사기회 유용’의 규제 대상을 이사만이 아니라 총수 일가의 친인척(특수관계자) 및 업무집행지시자로 확대하고, 이들에게 해당 기회가 ‘회사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공정거래법상 회사기회 유용 및 지원성 거래에 대해서는 경쟁제한성에 대한 입증이 없어도 지원 행위 자체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하고, 특정경제가중처벌법에 처벌 규정을 명시할 것을 제안했다.
또 중소기업의 협상력 제고를 위해 대기업과의 하도급거래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소기업 단체(조합)에 분쟁조정협의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이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납품단가 인상을 요청했는데 대기업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응하지 않을 경우, 조합이 중소기업을 대신해 대기업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노동시장 민주화 방안으로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입법화하고, 기업이 비정규직을 고용할 경우 고용안정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유종일 위원장은 “비정규직은 보험과 같은 추가 비용이 들지 않고, 해고에 따른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시간당 임금을 정규직보다 더 높이 책정해야 한다”며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110%로 제시했다. 이는 비정규직 임금을 2017년까지 정규직 대비 80%까지 높이자는 민주당의 기존 방안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비정규직 임금은 지난해 기준으로 정규직 대비 54.8% 수준으로, 2004년의 65%에 비해 격차가 더 벌어졌다. 특위 조사 결과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들 대부분은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의 급여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직원을 함부로 내보내지 못하도록 정리해고제도 개선 방안도 제시됐다. 대다수 국가에서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에 따라 해고 회피 노력을 다했음에도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최후 수단으로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원칙이 지켜졌으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을 경영자의 경영적 판단에 관한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기업들은 이를 이용해 정리해고 등으로 인원을 줄인 뒤 경영이 정상화돼도 고용을 늘리지 않고 주주배당을 확대하거나 내부유보만 쌓고 있다. 특위는 근로기준법의 해고 회피 노력을 하지 않은 경우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또 정리해고의 절차요건을 신설해 노동자 대표에게 정리해고 이유, 규모, 선정 및 시행 방법, 수당 계산 방법 등의 정보를 문서로 전달하도록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분배정책을 위한 부자증세도 제안
금융 개혁을 위해서는 금산분리 강화와 재벌 금융사 계열분리청구제 도입을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는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 개정으로 산업자본의 은행 주식 보유한도를 늘리고, 비은행 지주회사가 비금융 자회사와 손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의 안정성을 강화하려는 세계적 추세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위는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을 이명박 정부 이전으로 복원할 것을 제안했다.
재벌의 금융사는 경제력 집중, 총수의 지배력 확장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재벌의 금융사가 고객이 맡긴 돈으로 계열사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재벌 금융사가 총수의 비자금이나 탈세의 창구로 악용되기도 한다. 재벌 금융사가 경제력 집중이나 계열사 간 부당 지원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 계열분리를 법원에 청구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재벌 금융사 계열분리청구제는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서 논의됐으나, 정부 출범 이후 재벌의 반대로 무산됐다.
최근 저축은행 부실 사태를 계기로 쟁점이 된 금융감독 체계 개혁 방안도 제시됐다. 특위는 금융정책과 감독을 분리해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금융위원회의 정책 기능을 떼어내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위 사무국을 없앤 뒤 금융위는 금융감독원 내부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화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참여경제 실현을 위해 노동조합 또는 종업원 대표에게 이사추천권을 주는 방안도 제시했다. 종업원 이사제도는 노조 또는 종업원 대표가 기업의 이사회에 참석해 공식적으로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산업민주주의 실현 수단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에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제정된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에 입각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제도화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다. 특위는 기업의 경영 결정 과정에 종업원들의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고, 이사회가 대주주의 거수기로 전락해 감시와 견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 대기업부터 노동자 대표의 이사추천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분배정책을 위한 부자증세도 제안됐다. 미국의 버핏세를 포함해 최근 전세계적으로 부자증세 추진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참여연대 입법청원안(한국판 버핏세), 부유세(정동영안), 사회복지세(조승수안), 이정희안 등이 제안된 상태다. 특위는 법인세의 경우 100억원을 초과하는 과세표준에 대해 30%의 세율을 적용(현재는 2억원 초과 과표에 22% 부과)하고, 소득세의 경우 1억5천만원을 초과하는 과표에 대해 40%의 최고세율을 적용(현재는 8800만원 초과 과표에 35%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신성장 전략 짜는 작업 착수키로
특위는 경제 민주화를 위한 정책과제 발표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성장 전략을 짜는 2차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유종일 위원장은 “이번 정책과제들이 공정한 시장을 만들고 분배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충분하지 않다”며 “재벌 의존, 수출 의존, 고용 없는 성장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성장’ 전략과 공정한 시장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위는 12월부터 1차 작업에 착수해 내년 총선 이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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