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어이 난파선에 타려는가

세계 금융위기 상황, 꼭 한-미 FTA를 비준해야 하나… 공공성 절멸시키고 시장 유일지배 만들 FTA 신중히 판단해야
등록 2011-10-19 13:48 수정 2020-05-03 04:26
»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9월12일(현지시각) 워싱턴 D.C. 버지니아 타이슨스의 한식당 ‘우래옥’에서 웃고 있다. 이날 미국 상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 법안을 가결했다. 한겨레 김봉규

»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9월12일(현지시각) 워싱턴 D.C. 버지니아 타이슨스의 한식당 ‘우래옥’에서 웃고 있다. 이날 미국 상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 법안을 가결했다. 한겨레 김봉규

타조효과와 장두노미(藏頭露尾)

‘타조효과’(Ostrich Effect)라는 게 있다. 갈라이와 사드(Galai & Sade)는 사람들이 명백히 위험한 금융 상황에서 마치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타조가 큰 위험을 만나면 머리를 땅에 박아버리는 행동(실제론 그렇지 않단다)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지난해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장두노미’(藏頭露尾·꿩이 머리를 땅에 박고 꼬리를 드러낸다)도 똑같은 얘기니, 이런 현상은 비단 현대의 금융시장뿐 아니라 동서고금 언제나 나타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됐다고 할 만하다.

미국과 FTA할 나라 당분간 없을 듯

사람들은 왜 현실을 외면할까? ‘설마 그렇게 큰일이 일어나랴’ 하는 안이함과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속성(언제나 주가가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은 얼마나 달콤한가), 정부 같은 큰 기관의 주장을 믿고 싶어하는 심리(‘설마 정부가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큰일은 나와 상관없다’ ‘남들도 똑같이 당하는 거면 괜찮다’는 생각도 그 밑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그런 엄청난 상황을 거푸 맞닥뜨렸다. 첫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정책이요, 둘째는 현재진행형인 세계 금융위기다. 두 번째 상황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건 큰 방향을 틀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상황은 이제 다른 모든 결정의 전제조건이 됐다. 그러나 한-미 FTA가 발효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결정에 달려 있다. 세계 금융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꼭 한-미 FTA를 비준해야 할까?

정부의 한-미 FTA 당위론은 “다른 나라들이 다 FTA를 맺는데 우리만 안 하면 손해다. FTA 후진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우리가 먼저 한-미 FTA를 체결해서 미국 시장을 선점하자”는 주장이 한 쌍으로 결합돼 있다.

세계 금융위기가 진행 중인 지금, FTA를 맺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특히 위기에 빠진 미국과 교섭을 진행할 나라는 앞으로 당분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주장은 원인 무효가 되었다. 두 번째 우리만 먼저 FTA를 맺어서 관세율 2.5% 인하의 혜택을 얻으면 과연 무역 흑자가 확 늘어날까? 미국의 수입은 당분간 정체하거나 감소할 것이다. 수요를 부추기려 해도 마땅한 정책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이제 수출밖에 매달릴 곳이 없는 미국은 자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려고 저 악명 높은 ‘슈퍼 301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무역 흑자가 증가할까? 이건 오히려 확실성 영역에 속한다. 이미 발효된 한-유럽연합(EU) FTA는 그 미래를 지금 보여준다.

정부의 또 다른 당위론은 한-미 FTA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킨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서비스 시장 개방 등 신이슈(지적재산권·서비스·투자)와 연관됐고, 기실 이것이야말로 한-미 FTA 추진의 근본 이유다. 한국의 기획재정부(옛 재정경제부)는 오래전부터 중국의 성장에 놀라 하루바삐 대한민국을 ‘서비스 선진국’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강박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개방과 규제 완화, 민영화는 그 첩경이다. 그러나 내부의 완고한 반대와 첩첩의 공공 규제는 이 ‘유일한 활로’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다. 한편, 삼성 등 재벌은 한국 경제에서 마지막 남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공공서비스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의료민영화가 대표적이고 장차 철도 등 네트워크 산업도 좋은 먹잇감이다. 한-미 FTA는 이 둘의 소망을 동시에 해결해주고,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를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2005년 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부 쇼크에 의한 내부 개혁’에 의해 “대한민국을 확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붕괴한 ‘선진 시스템’의 직수입

대공황에 버금가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그 ‘선진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다. 금융뿐만 아니라 지난 30년간 지배해온 ‘글로벌 스탠더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며 월가가 지배하는 미국 정치에 항의하려고 노숙을 자처하겠는가? 금융, 의료 등 공공서비스, 부자 감세, 형편없는 인프라, 1%의 민주주의, 기후변화에 대한 태도 등 시장만능론이 빚어낸 모든 미국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불만에 가득 찬 철부지들의 울부짖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젊은 영혼의 공명으로 보는 것이 옳다. 김현종의 공언대로 한-미 FTA는 바로 그 시스템을 직수입하는 것이다.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의 우리 법과 제도는 모두 한-미 FTA의 각 조항으로 대체될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최소한의 공공성이 사라지고,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 기어코 이 난파선에 올라타야 하겠는가?

참여정부는 짐짓 부정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한-미 동맹 강화다. 미국에 간 대통령이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철부지 발언을 할 정도다. 실로 한-미 FTA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해 중국에 대한 경계를 한껏 높일 것이다. 현재 같은 남북관계라면 한반도의 양쪽이 각각 중-미 대립의 앞잡이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우리나라만 비준하지 않으면 한-미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미 FTA가 발효된 뒤, 건강보험이 없어지거나 시골 철도가 끊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제가 심각한 불황을 겪는 등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한-미 FTA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한-미 관계는 어떻게 될까? 최악의 경우 단교 상태까지 이른다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지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한-미 관계를 위해서도, 그리고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원한다면 덜컥 한-미 FTA를 비준해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의 냉엄한 국제관계는 우리에게 최대의 신중을 요구하고 있다.

한-EU FTA 결과 본 뒤 판단해도

그런데도 우리는 정부를 믿고 그저 국회 비준을 바라만 봐야 할까? 한-미 FTA가 빚어낼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지금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다. 결코 타조나 꿩처럼 머리를 박고 정부나 재벌에 판단을 맡겨서는 안 된다. 천보 만보 양보해서 앞으로 1년간 미국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미 발효된 한-유럽연합(EU) FTA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본 뒤 판단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