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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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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패가 촉발한 한나라당 내전

4·27 재·보궐 선거 참패로 가속화된 한나라당 당권·대권 경쟁…얽히고 설킨 ‘이재오-박근혜-정두언’ 전쟁 시작돼
등록 2011-05-05 10:09 수정 2020-05-03 04:26

“질 거라는 감은 잡았지만, 정확하게 예측한 참사는 아니지 않았나.”
4·27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다음날, 수도권의 한 한나라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천당 아래 분당’에서의 패배는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 민심이 ‘정권 심판’으로 흐르게 될 결정적 물꼬를 터준 것이라는 얘기였다.
한나라당의 중립 성향 의원이나 이명박계 비주류 의원 등이 전면적인 당 쇄신을 요구하며 안상수 대표 등 지도부 총사퇴와 조기 전당대회를 요구할 것임은 예정된 절차였다. 하지만 파장은 생각보다 더 컸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총사퇴를 선언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 청와대 비서진도 일괄 사의를 표명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내년 총선에 출마할 사람들은 5월 중에 정리하라”며 전면적인 인사 쇄신을 예고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선거에서 질 때마다 쇄신 요구가 들끓었지만, 몇 개월 동안 논란만 벌이다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발 빠르고 강도 높은 조처가 나온 셈이다.

박근혜는 전면에 나설까?

문제는 본질이다. 이재오 특임장관을 중심으로 한 이명박계 주류, 박근혜계, 그리고 정두언 최고위원으로 대표되는 이명박계 비주류·중립 성향 의원들이 생각하는 쇄신의 핵심은 7월 초 이전까지 치러야 하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를 누구로 결정할 것이냐다. 차기 당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하고, 대선까지 관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다. 차기 당대표는 의원들에게 곧 총선 생환, 대선 주자들에겐 당내 후보경선·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결국 쇄신의 본질은 한나라당의 ‘생존투쟁’이 아니라 당내 계파 간 ‘권력투쟁’, 정확히는 차기 당권·대권을 둘러싼 ‘이재오-박근혜-정두언’의 전쟁이다.

정권 교체의 환희에 젖어 있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3년여 뒤의 참패와 권력투쟁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 대통령(가운데)이 당선인 때인 2008년 1월11일 4개국 특사를 다녀온 이상득 의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재오 특임장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부터)와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집무실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정권 교체의 환희에 젖어 있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3년여 뒤의 참패와 권력투쟁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 대통령(가운데)이 당선인 때인 2008년 1월11일 4개국 특사를 다녀온 이상득 의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재오 특임장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부터)와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집무실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이명박계·중립 의원 일부는 ‘박근혜 역할론’을 제기한다. 전당대회 일정 등을 결정하고 관리하는 비대위원장직을 맡든, 전당대회에 직접 나서든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고, 내년 총선·대선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간판이 박근혜 전 대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 특사로 네덜란드 등을 방문 중인 박 전 대표는, 출국에 앞서 지난 4월28일 ‘박근혜 역할론’과 관련해 “아직 구체적인 것은…. 당에서 많은 토론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투수 박근혜’의 등판을 요구했지만 박 전 대표는 이를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결이 달라진 반응이다.

박근혜계 의원들의 분위기에서도 약간의 온도 변화가 감지된다. “‘전당대회 선관위원장’을 뭐하러 맡느냐”면서도 “비대위원장의 역할이 다음 총선까지 관리하는 것이라면 몰라도”라는 단서가 붙는다. 전당대회 출마와 관련해서도 “당헌·당규를 고친다면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헌·당규상 대선 출마자는 대선 1년6개월 전 선출직 당직에서 사퇴해야 하므로, 지금 박 전 대표가 당 지도부가 된다면 대선을 포기해야 한다. 규정을 고쳐 당 지도부가 대선에 그대로 나설 수 있다면 전당대회에 직접 나서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카드라는 얘기다.

물론 이런 기류는 일부다. 여전히 박근혜 역할론을 주장하는 ‘저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영남권의 한 박근혜계 의원은 “지금까지 당을 이끌어온 주류가 완전히 물러날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박 전 대표가 나설 여지가 없다”며 “특히 이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이재오 특임장관이 당을 ‘꼭두각시 체제’가 아니라 완전히 바꾸고 박 전 대표 중심으로 간다는 생각을 한다면 박 전 대표도 거절하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주류가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 박 전 대표는 종속변수이고, 그의 이후 행보는 독립변수인 주류의 태도에 달려 있지만, 주류가 당 장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인 셈이다.

이재오, 수렴청정 넘어 나서나?

이런 의심은 원내대표 선거 일정을 놓고 또 한 번 ‘확인’됐다. 재보선 다음날인 4월28일 오전 안상수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두언 최고위원 등의 반발을 무릅쓰고 5월2일로 예정된 원내대표 선거를 강행키로 결정했다. 선거 패배로 어수선한 한나라당은 더욱 들끓었다. 소장파 모임 ‘민본21’ 소속 의원들의 요구로 그날 오후 의원총회가 열렸고, 날선 공방 끝에 표결을 했다. 경선 연기 의견(44명)이 강행 의견(43)보다 조금 많았고, 기권이 3명이었다. 결국 한나라당은 이튿날 오전 또 한 차례 의원총회를 열어 경선을 나흘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안상수 대표의 경선 강행 결정에 박근혜계와 소장파 등이 반발한 건 주류 쪽이 차기 원내대표로 안경률 의원을 밀고 있는 탓이다. 안 대표·안 의원은 모두 이재오계로 분류된다. 이들이 볼 땐 안 대표가 그만둬도 차기 지도부를 구성할 때까지 안 의원이 당의 공식적인 최고위직으로서 힘을 행사한다면, 포장은 바뀌었지만 내용은 이재오 장관의 ‘수렴청정’ 그대로다. 민본21 소속 김성식 의원이 “원내대표로 ‘주류 아바타’를 뽑는 경선은 이제 안 된다”고 말한 건 이런 맥락이다.

이재오 장관 쪽은 그가 전당대회에 직접 나서거나, 당 지도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쪽에 고스란히 당을 갖다 바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숨기지 않는다. 이 장관 핵심 측근의 얘기는 이랬다. “이 장관의 특임은 정권 재창출이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명박계가 분산되면 안 된다. (당 대표는) 이명박계 안에서 적임자를 선출하면 된다. 이명박계가 죽은 듯 지내면 (박 전 대표가) ‘이회창식 후보’가 되고, 그러면 정권 재창출이 굉장히 어렵다.” 국무위원인 장관의 특임이 정권 재창출이라는 인식도 논란거리지만, 박 전 대표를 두고 대세론에 취해 두 차례 대선에 실패한 ‘이회창식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선전포고에 가깝다. 명확히 의사를 밝히지 않지만 전당대회에 불출마하고, 최근 이명박계 의원들과의 잇단 회동을 통해 ‘주류역할론’을 강조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장관이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장파의 또 다른 셈법

정두언 최고위원 등 소장파는 세대교체론을 내세운다. 남경필·원희룡·정두언·나경원 의원 등이 연합해 당권을 장악하고, ‘젊은 간판’으로 총선·대선을 치르자는 얘기다. 여기엔 차기 총선에서 소장파의 세를 키운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 공천제도를 개혁하면 당내 기득권 세력을 어느 정도 ‘물갈이’할 수 있고, 수도권 민심도 여기에 반응할 것이라는 기대다. 게다가 공천 개혁으로 총선을 잘 치르자는 데는 누구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 총선 이후 박 전 대표에 맞설 만한 대선 후보를 내세우거나, 그게 여의치 않을 땐 불린 소장파 세력을 기반으로 차차기 대선을 노릴 수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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