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의 뭇매를 맞아 무산 위기에 처한 정치자금법 개정안이 다른 정치 관련 법안과 함께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원점에서부터 재검토될 전망이다. 개정안은 지난 3월4일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일사천리로 처리된 뒤 법제사법위원회로 넘겨진 상태다. 어느 법보다 막강한 ‘국민정서법’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면, 3월 국회 회기 중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될 예정이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3월10일 의원총회에서 “이번 임시국회에선 이 법을 처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한나라당뿐 아니라 여러 정당과 충분히 협의하고 관련 기관인 선관위와 시민단체 의견까지 두루 들은 뒤 통과시켜야 한다.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시간을 갖고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란이 예상됐음에도 충분한 토론과 국민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 없이 서둘러 처리하려 했다는 점, 이 개정안이 통과할 경우 ‘청목회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몇몇 의원에게 실익이 돌아간다는 점 때문에 ‘제 잇속 챙기기’ ‘동료 의원 감싸기’라는 비판 여론이 증폭됐다. 만약 그런 문제가 없었더라도 이번 정치자금법 개정안이 이명박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검토할 정도로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것일까? 정치와 돈, 민주주의와 관련해 생각해볼 대목이 많다.
정치에 참여하는 모두가 로비스트
가장 큰 쟁점은 ‘국회의원에 대한 입법로비 허용’ 여부다. 로비는 ‘원산지’의 귤이 태평양을 건너와 탱자가 돼버린 단어다. 미국 로비스트 등록법에서 정의한 로비는 ‘입법·행정·집행 작용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공무원과 하는 모든 의사소통’이다. 로비는 곧 정치 행위다. 로비와 로비스트를 규제하는 법이 없을 뿐,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매일같이 기업과 정부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와 각종 이익단체의 로비가 벌어지고 있다. 국회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가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과 단체, 법인과 기관의 주장을 듣고 이를 조정해 법안과 예산에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입법로비와 정치자금이 연결되는 것은 대가성이 있는 ‘부당한 거래’일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전체 노동자 17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860만 명에 이른다. 민주노총이나 비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수를 줄이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 사유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간접고용을 금지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려는 정당과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할 경우 현행 정치자금법상 불법에 해당한다. 31조에서 ‘국내외의 법인 또는 단체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으며 ‘누구든지 국내외의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과 2010년 헌재의 엇갈린 결정같은 이유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나 다른 각종 이익단체들도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 이런 기부행위는 단지 지연이나 학연, 혹은 이미지에 끌려 지갑을 여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정치 행위임에도, 막대한 이권을 바라고 트럭으로 수백억원을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행법에는 위배된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한 구조에서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약자인 다수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숫자의 힘으로 당원이 되거나 표와 돈을 모아주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주요 원리”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등 정치 선진국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노동조합이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행위나 사회적 약자인 청원경찰이 자신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국회의원을 후원하는 행위가 문제가 되는 한국 정치가 오히려 문제라는 지적이다. 박 대표는 “미국 민주당의 경우 선거자금 모금액의 절반 정도는 노조의 정치활동위원회(PAC·Political Action Committee)를 통해 들어온다”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집단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것을 막으면 결국 돈 있는 사람, 또는 그런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만 정치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견해는,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한때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뒷받침된 적도 있었다. 1999년 헌법재판소는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한 정치자금법에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정치자금 기부는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정당과 의회에 대하여 단체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하고 관철하려는 모든 이익단체가 정치자금의 기부를 통하여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에 따라 국회는 2000년 노조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이후 ‘차떼기 사건’ 등 후폭풍을 겪으면서 2004년 다시 모든 법인 및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1999년의 헌재 결정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같은 기관에 의해 부정당한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신학림 전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등이 낸 같은 취지의 헌법소원 사건에서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의 차단 등 이 조항(정치자금 기부 금지)에 의해 달성되는 공익은 대의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국가에서 매우 크고 중요하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법인과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해야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법인과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할 경우 오히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기부 허용으로 일반 개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단체에 비해 자금 동원력이 풍부한 단체나 기업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정치적 형평성과 공정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익이 과잉 대표됨으로써 ‘1인1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훼손하게 된다는 얘기다. 1999년 헌재가 밝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은 정치적 상황과 여론에 따라 막혔다 풀렸다를 반복해온 셈이다.
정치자금 신뢰 회복이 개정의 전제2008년 말 국회 입법조사처는 ‘2009년 입법 및 정책현안 과제’ 가운데 하나로 정치자금법을 꼽으면서 “법인 및 단체의 기부를 전면 금지한 것은 정치자금에 관한 각종 비리 및 부정에 대한 반성에 따른 것이었다”며 “이를 다시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정치자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개선 등 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몇몇 조항을 손보는 차원에서 처리하려 했던 정치자금법 개정이 커다란 벽에 부닥친 이유는, 이런 과정을 생략해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논의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밟는다면 여론의 풍향은 바뀔지 모른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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