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우연일까?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다. 사안의 폭발력이나 세간의 관심으로 보면 각각 상당 기간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할 만한 ‘거물급’ 인사 두 명이 지난 2월 말 하루 시차를 두고 나란히 귀국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한때 성공한 재미동포 변호사에서 수배자 신세로 전락한 에리카 김(47·한국 이름 김미혜)씨와, 주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을 겨냥한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2년가량의 도피성 해외 체류 끝에 귀국한 한상률(58) 전 국세청장이다. 이들의 입국 시점은 바깥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 등 중동 사태에, 안으로는 구제역 파동과 물가 폭등에 이목이 쏠린 때였다. 정교하게 연출된 ‘기획 입국’이라는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미리 조율한 ‘기획 입국’?
두 사람이 받고 있는 혐의는 별개의 사안이나 묘하게 겹쳐진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 12월 대선에서 최대 이슈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차명 재산 논란과 관련돼 있다. 시간순으로 보면 서울 도곡동 땅을 판 돈 가운데 일부가 자동차부품업체인 (주)다스로 가고, 다스는 BBK에 190억원을 투자했다. 도곡동 땅의 주인, 그리고 다스의 대주주는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큰형인 이상은씨와 처남인 김재정(2010년 2월 작고)씨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이라는 논란이 2007년 대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에리카 김씨는 BBK와 연관된 투자회사 옵셔널벤처스의 자금을 빼돌리고 주가를 조작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8년과 벌금 100억원을 선고받고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김경준(45)씨의 누나로, 한때 동업자 관계였던 이 대통령과 김경준씨를 연결해준 인물이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이 BBK의 실소유주라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한 전 국세청장은 재직 당시인 2007년 도곡동 땅을 구입한 포스코건설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실소유주를 알게 된 장본인으로 꼽힌다.
에리카 김씨는 2007년 11월 동생 김경준씨가 범죄인 인도 요청으로 한국으로 송환돼 구속 기소되자 미국에서 “BBK의 실소유주는 이명박 후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김씨는 동생과의 공모 혐의와 이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 기소 중지된 상태였다. 최근 귀국 직후 검찰에서 한 차례 조사를 받은 에리카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의 실소유주라고 주장한 것은 거짓이었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허위사실 유포)를 일부 시인하면서도, 동생 김씨와 BBK 횡령과 주가조작을 공모하지는 않았다고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리카 김씨의 사건이 비교적 실체가 드러나 있는 반면,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사안은 아직 수면 아래에 있다. 한 전 청장은 2007년 대선 당시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서울 도곡동 땅의 실제 소유주 등을 비롯해 여권 핵심부의 여러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로,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지난 정부 인사들에 대한 표적 수사 논란이 일었던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지시한 인물로 꼽힌다. 한 전 청장은 2009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 “대학에서의 연구”를 이유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정치권에선 노무현 정권 때 국세청장에 임명된 한 전 청장이 연임을 위해 선을 댔던 ‘형님 라인’(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 라인) 로비 의혹이 불거지자 여권 실세 쪽의 도움으로 도피했다는 ‘기획 출국’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한 전 청장이 검찰에서 어떻게 진술하느냐에 따라 정치권 전체가 출렁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국했을까? 검찰과 집권 여당 쪽에서는 ‘우연’을 강조하지만, 야당에서는 ‘레임덕’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기류가 강하다. 언제든 털고 가야 하는데 그나마 검찰이 통제 가능할 때 마무리짓지 않고 미뤘다가는 정권 말기에 대형 사고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들의 귀국 직후인 2월28일 “정권의 마무리 작업으로 어차피 터질 것을 막아보려는 수순”이라고 주장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민주당의 한 고위 인사는 3월2일 과 만나 박 대표의 주장에 살을 보탰다.
“이명박 정부의 검찰은 하명수사부였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문화방송 〈PD수첩〉, 미네르바(경제평론가 박대성씨)부터 한명숙 전 총리에 이르기까지 결국 무죄판결을 받은, 말도 안 되는 정치적 기소가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검찰은 권력이 힘이 있을 때는 꼬리를 내리지만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뒤돌아 주인을 문다. BBK 사건이나 이명박 대통령의 차명 재산 의혹, 한상률 전 청장이 알고 있는 정권 핵심부의 비밀이 검찰이 말을 듣지 않을 때 터져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한상률이 입을 열면 이상득은 한 방에 간다’고 할 정도다. 미리 뒷문을 단속하려는 것이다. 검찰 수사가 한 전 청장의 ‘개인 비리’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면 민주당은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할 계획이다.”
두 사람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같은 시기에 맞물리면서, 국내에서는 법적으로 일단락돼 집권 여당에 손해가 될 여지가 적은 ‘에리카 김’ 카드로, 불리하게 전개될지 모르는 ‘한상률’ 사건에 대한 여론의 쏠림 현상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두 사람의 귀국 배경과 검찰의 조사 내용 등에 대한 주요 일간지 보도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등이 에리카 김씨의 귀국 배경과 검찰 수사 내용을 1면과 사회면에서 비중 있게 전한 반면, 와 등은 진술 내용에 따라 파급력이 훨씬 클 수 있는 ‘한상률 게이트’에 주목했다. 의도를 했는지 몰라도 에리카 김씨가 어느 정도 한 전 청장 사건의 방어막 구실을 한 셈이 됐다.
“한상률 전 청장과 관련된 사안의 핵심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배경과 도곡동 땅 실소유주 논란이다. 그림 로비나 연임 로비는 개인 비리에 가깝다. 도곡동 땅 문제는 다스 실소유주와 BBK로 연결된다. 자신의 예전 주장이 거짓이라고 하는 에리카 김은 그 문제를 희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검찰이 에리카 김의 ‘배후’도 수사한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의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의 분석이다.
투자금 소송 둘러싼 모종의 합의?BBK 사건을 놓고 대척점에 서 있던 에리카 김씨와 다스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여권 핵심 인사의 증언도 ‘에리카 김 활용설’에 힘을 보탠다. 지난 대선 때부터 BBK 사건에 관여했던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최근 “에리카 김이 투자금 140억원을 다스에 돌려주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가진 함의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BBK 사건에 관해 대법원 판결까지 완료됨으로써 대부분의 법적 절차가 마무리됐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소송이 있다. 도곡동 땅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차명 재산 의혹을 받고 있는 다스는 BBK에 190억원을 투자했는데, 이 중 140억원을 받지 못해 에리카 김씨 남매 등을 상대로 투자금 반환 청구소송을 진행해왔다. 다스도 도곡동 땅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대부분의 주식(95.8%)을 소유하고 있다. 2007년 8월 1심에서는 다스가 패했으나 이후 다스가 항소를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인데, 소송 당사자들이 최근 ‘새로운 합의’를 했다는 얘기다.
이 합의가 극적인 이유는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김경준씨가 “이명박 대통령이 다스의 실소유주”라는 청원서를 미국의 해당 법원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이 소송과 무관하므로 원고에서 배제해달라는 다스 쪽의 청원에 대한 반대 주장이었다. 미주 한인 사회의 언론인 이 확보해 지난 1월 공개한 이 청원서에서 김씨는 “이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가 다스의 해외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점이 실소유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BBK 등 관련 회사들도 이 대통령이 전권을 행사했다고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그런데 공범 혐의를 받고 있는 에리카 김씨는 동생 김경준씨의 최근 청원, 그리고 2007년 대선 당시 자신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에리카 김씨와 복역 중인 김경준씨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에리카 김씨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불과 몇 개월 전까지 2007년 대선 당시의 기세로 싸우다가 ‘새로운 합의’에 이른 배경은 뭘까? 인과관계가 분명치는 않지만 에리카 김씨 남매가 관련된 미국에서의 또 다른 소송의 결과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주가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김경준씨 가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지난 2월 김씨 가족이 피해자들에게 37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씨 가족의 공개된 재산은 주가조작과 횡령으로 만든 3천만달러(약 330억원)가량이다. 스위스의 한 은행 계좌에 동결돼 있는데, 재판 결과에 따라 이 돈을 주가조작 사건 피해자들에게 반환하는 것보다는, 다스의 투자금으로 만들어 다스에 반환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모종의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하면, 모든 것을 잃을 최악의 상황에 몰린 상태에서 상대편의 곤란한 상황을 풀어주면서 약간의 이득을 취하는 거래가 있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여권의 핵심 인사가 언급한 ‘새로운 합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김씨 가족과 다스 사이의 투자금 반환 청구소송이 이 합의에 의해 취하되거나 에리카 김씨가 스위스 은행 계좌의 돈의 성격에 관해 한국 검찰에서 종전과 다른 진술을 한다면 어떤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다스 1대 주주의 지분 상속자는?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 논란과 별개로 다스의 실소유주는 의외로 간단하게 밝혀질 수 있는 사안이다. 지난해 2월 고인이 된 1대 주주 김재정(48.99%)씨의 지분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보면 된다. 김씨의 유족에게 상속됐다면 비교적 분명하지만, 아직 상속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았거나 제3자에게 증여됐다면 실소유주 의혹이 증폭될 수도 있다. 은 3월3일 다스 쪽에 주주 변동 내역을 확인하려 했으나 다스 쪽이 답변을 거부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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