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말폭탄 속에 숨은 불안

한-미 ‘키 리졸브’ 훈련 즈음해 쏟아진 북한의 호전적 언사
중동 민주화 영향 차단하려 목소리 높이지만, 대화 여지 닫지는 않아
등록 2011-03-11 00:45 수정 2020-05-03 04:26
키 리졸브·독수리 훈련 기간인 3월3일 오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롤에서 미군 장갑차 등을 철도로 운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키 리졸브·독수리 훈련 기간인 3월3일 오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롤에서 미군 장갑차 등을 철도로 운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서울 불바다’ ‘조준 격파’ ‘원점 타격’…. 3월을 맞은 한반도 정세가 험악해지고 있다. 남과 북은 다시 고강도 ‘말폭탄’을 쏘아올리고 있다.

말폭탄 공세가 시작된 건 2월27일이다. 한-미 연합 ‘키 리졸브’ 군사연습 개시를 하루 앞둔 날이다. 북한은 이날 두 건의 대남 군사 위협에 나섰다.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성명을 통해 “키 리졸브 연습이 그 누구(북한)의 급변 사태와 체제 붕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서울 불바다전과 같은 무자비한 전면전으로 맞서겠다”고 밝혔다. 이어 “침략자들의 핵공갈에는 핵억제력으로, 미사일 위협에는 미사일 타격전으로 맞서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은 세지고, 급은 낮아져

북한은 또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쪽 단장 명의의 통지문을 통해 “괴뢰군부의 심리전 행위가 계속된다면 임진각을 비롯한 반공화국 심리모략 행위의 발원지를 자위권 수호 원칙에서 조준 격파사격하겠다”고 밝혔다. 판문점대표부 성명이 큰 틀에서 대남 위협을 가했다면, 통지문은 구체적으로 남쪽의 대북 심리전이라는 보복 대상과 임진각이라는 보복 장소, 조준 사격이라는 보복 방식을 특정했다.

남쪽도 구체적 위협에 더 주목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군사 위협이 나온 지 이틀 만인 3월1일 서부전선 임진각 일대를 관할하는 1군단을 순시했다. 최종일 1군단장은 군단 사령부 지하벙커에서 이뤄진 보고에서 “북한군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추적하고 있다. 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할 것”이라며 “북한군이 임진각을 조준사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적의 공격이 있다면 원점을 타격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장관은 한발 더 나아갔다. “작전 시행시 현장에서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 조치 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북한군의 군사행동이 있을 경우, 1차적 대응 권한이 현장 지휘관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 장관은 이어 1군단 예하 포병대대의 다연장로켓(MLRS) 부대를 방문하고 대비태세를 점검했다. 다연장로켓은 60초 안에 12발의 로켓을 발사해, 축구장 2개 넓이를 한꺼번에 초토화할 수 있는 중화기다. 김 장관의 다연장로켓 부대 방문은 임진각에 조준포격이 이뤄질 경우 대량 보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국방부 당국자는 “김 장관 순시는 북한군이 심리전 발원지를 조준 격파사격하겠다고 위협하는 최근 상황 등을 반영한 조치”라고 말했다.

북한이 고강도 군사 위협에 나선 것을 두고는 키 리졸브 연습에 앞선 일상적 대남 위협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과거에도 늘 한-미 연합 군사연습을 앞두고 강경한 대남 위협을 쏟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2월25일에도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제와 남조선 괴뢰 호전광들이 침략적인 합동 군사연습을 감행한다면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맞받아나갈 것”이라며 “필요한 경우 핵억제력을 포함한 모든 공격 및 방어 수단을 총동원해 침략의 아성을 무자비하게 죽탕 쳐버릴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총참모부가 직접 나선 지난해에 견줘, 이번엔 비난에 나선 북한 기관의 급이 오히려 떨어진 셈이다.

‘체제 붕괴’ 노리는 움직임 겨냥

하지만 단지 키 리졸브에 대한 통상적 대응으로만 보기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두 건의 대남 위협이 남쪽의 ‘북한 체제 붕괴 시도’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잡는다. 판문점대표부 성명은 “우리 인민이 스스로 선택하고 제 손으로 일떠세운 우리식 사회주의 제도에서 ‘급변 사태’나 ‘붕괴’를 바라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기를 고대하는 얼빠진 자들의 개꿈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이 존엄 높은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에 감히 도전해 나서려는 자들을 최종 파멸시키기 위한 총공세에 진입하는 것은 천만번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비난 주체의 급은 지난해보다 낮지만, 어조는 한층 과격하다.

동시에 북한은 “키 리졸브 연습 감행과 때를 같이하여 더욱 집요하게 매달리는 반공화국 심리모략 행위와 관련해” 장성급 회담 단장의 통지문을 남쪽에 보냈다고 밝혔다. 대남 통지문 발송 사실을 전한 은 “역적패당(이명박 정부)은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25개 반공화국 보수단체들을 내세워 우리의 민족 대명절(김정일 생일인 2월16일)을 계기로 수십만 장의 삐라, 불순한 동영상 자료를 수록한 USB와 DVD, 불순 소책자, 1달러 지폐 등을 대형 풍선들에 매달아 우리 쪽 지역으로 날려보냈다”며 “극도의 대결 광기”라고 비난했다. 또 “괴뢰군부는 치졸하게도 옷가지들과 불순 녹화물, 불량 도서들을 담은 바구니를 풍선에 매달아 들여보내고 있다”며 “용납 못할 범죄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추악한 인간 쓰레기들과 너절한 물건짝들을 가지고 우리의 사회주의 제도를 흔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신념을 허물어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이 키 리졸브 연습을 계기로 남쪽의 대북 심리전을 체제 붕괴 시도로 규정하고 여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반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전문가들은 최근 중동의 정권 붕괴 도미노 사태에 따른 체제 위기감의 반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남쪽 군 당국이 튀니지·이집트 시민혁명과 리비아 반정부 시위 등의 내용을 담은 심리전 전단지 수만 장을 날려보내는 등 북한 체제에 치명적인 정보의 대량 살포에 나선 데 대한 반발이라는 지적이다. 김연수 국방대 교수는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을 앞두고 북한이 말로 거칠게 대응하는 것은 예상된 일”이라며 “다만 ‘급변 사태’와 ‘체제 붕괴’ ‘체제 모략’에 대한 우려와 대응을 앞세운 것은 중동 사태를 지켜보며 내부적으로 체제 결속을 다지고, 밖으론 외부의 체제 흔들기 책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외부 정보를 전면 차단·통제함으로써 불만의 표출을 막아왔는데, 최근 각종 심리전 전단이 평양 지역까지 날아들면서 체제 불안감이 깊어지고 있다”며 “지난해에도 조준 격파사격 위협으로 군 당국이 계획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전면 유보시켰듯이, 전단 살포도 확산되기 전에 조기 차단하겠다는 게 실질적 목표로 보인다”고 말했다.

바람의 방향이 국지전 부른다?

북한이 올 들어 전방위적으로 펼쳐온 대화 공세를 접고, 체제 단속과 결속을 겨냥한 군사적 긴장 격화 쪽으로 대남 기조를 튼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인민군 판문점 성명은 “우리에게는 평화도 소중하다. 긴장 완화 역시 변함없는 지향이고 요구”라며 긴장 완화를 위한 협상 여지를 남겨놨다. 또 3월1일 북한 외무성 담화는 “키 리졸브 연습에 대한 군대의 물리적 대응이 불가피해지고 있다”면서도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돼 있다”고 밝혔다. 김연수 교수는 “북한의 체제 위기란 게 외부의 심리전을 차단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외부 지원으로 식량 문제 등에 대한 불만을 잠재워야 풀리는 문제”라며 “북한 정권도 이를 모를 리 없는 만큼, 한편으론 도발 위협을 가하면서도 대화를 통해 지원을 끌어내겠다는 목표 자체를 접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3월 이후 바람의 방향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바뀌는 게 변수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대북 전문가는 “중동 사태 소식을 담은 대북 전단이 바람을 타고 북한 땅에 대량 살포될 경우 북한이 정권 유지 차원에서 실제 조준사격 등 군사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우발적 충돌이 국지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고, 남북이 다시 대화 계기를 잡기까지 상당한 냉각기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손원제 기자 한겨레 정치부문 wonj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