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부지검 소속 비정규 노동자 박윤배입니다. 서부지검에서 조사 근무 중입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20일 만난 박윤배(53) 서울인베스트 대표가 인터뷰 도중 걸려온 수십 통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한 얘기다. 그는 기자들의 전화에 한결같이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태광그룹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박 대표는 전날 서울서부지검에서 두 차례 조사를 받으면서 “수사받는 사안에 대해 언론과의 접촉을 자제하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태광그룹 사건의 제보자로 대한민국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를 만나 사태의 전말을 들었다.
태광그룹 비리 의혹을 제보한 이유는 무엇인가.자동차와 반도체를 팔아서 매출을 올리는 기업도 있지만, 병든 기업을 고쳐서 돈을 버는 기업도 있다. 우리는 후자다. 태광산업은 1주당 110만원대(10월22일 종가 124만5천원)로, 현재 가치가 약 1조1천억원이다. 하지만 올해 매출 2조5천억원과 영업이익 3천억~4천억원이 예상되고 방송 계열사인 티브로드홀딩스의 주식을 58.99% 소유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1주당 500만원으로 7조원의 가치가 있다고 우리는 평가한다. 그런데 이호진 회장 일가 소유 및 차명주식이 90%에 달해 주식 거래가 안 되고, 배임·횡령 의혹도 있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보를 한 것은 이를 고치기 위해서다.
(태광산업은 자회사인 흥국화재해상보험 주식 37.6%를 흥국생명에 넘기면서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지 않았고, 역시 자회사인 동림산업개발의 골프장 회원권을 비싼 값으로 매입했다. 흥국생명과 동림산업개발은 지분을 오너 일가가 대부분 소유하고 있다. 이처럼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태광산업이 큰 손실을 보고 있다는 게 박 대표의 주장이다.)
오너의 횡포로 저평가된 기업이 다른 곳도 있는데 왜 태광그룹만 지목했나.태광그룹을 잘 안다. 서울인베스트와 태광그룹이 구조조정과 관련된 컨설팅 계약(1년 5억원)을 맺었다. 2002년부터 2004년 계약이 해지될 때까지 태광그룹의 구조조정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태광그룹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또 2년 전인 2008년 태광산업의 지분을 소유한 외국계 투자자들로부터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제안이 들어왔다. 주식가치를 올려주면 수익의 20%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계약은 맺지 않고 일단 태광그룹의 문제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가 1년9개월 만인 최근에 나왔다. 하지만 외국계 투자자와 계약해서 회사 가치를 올리려고 해도 ‘먹튀’(주가 상승을 위해 문제 제기를 한 뒤 차익만을 실현한다는 것) 논쟁에 휘말리는 등 좋지 않은 결과가 예상됐다. 이 때문에 단독으로 태광산업 주식 2주를 보유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호진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2002년 구조조정 당시 노조와 협상을 하는데 1분마다 전화를 걸어 결과를 확인하는 등 여린 스타일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으로 기업 가치가 올라가자 정상화 궤도에서도 구조조정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2003년 계열사 사장 5명과 함께 이 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노력도 했다. 당시 이기화 부회장(이호진 회장의 어머니인 이선애 상무의 동생)에게 건의해 ‘왕상무’(이선애 상무)에게 얘기가 전해졌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우리와의 계약이 해지됐고, 나머지 계열사 사장들도 잘렸다. 이호진 회장이 그룹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키워 ‘쥐어짜기’식의 경영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서부지검에 다녀왔다. 검찰 분위기는 어떤가.하루에 두 번도 들어갔다. 오늘(10월20일)부터는 내가 얘기한 것 이상이 언론에 나온다. 검사들에게서 태광그룹에 대해 끝까지 수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고,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높아져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본다.
대가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해 이런 일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27억원을 요구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의혹을 제기한 쪽에 물어봐라. 난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
(태광그룹 쪽은 인사담당 임원 등이 두 차례 박 대표와 만난 적이 있고, 이 자리에서 박 대표가 과거 컨설팅 대가로 27억원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럼 이번 사태로 서울인베스트가 얻는 이익은 없나.태광그룹 사태는 향후 ‘수술’과 ‘회복’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거칠 것이다. 워낙 불법으로 얼룩진 회사니까 큰 수술이 필요하다. 현 수술 국면에서 검찰이 집도하는데 (나는) 등을 떠미는 정도다. 하지만 이후 회복 국면에서는 나도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광산업 구조조정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오너 일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또 태광그룹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입장이어서 소액주주를 결집하기 쉽다. 한쪽에서는 오너 일가를 설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집단소송으로 경영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호진 회장이 퇴진하고 새롭게 이현준(이임룡 창업주의 장손)이 등장하거나 전문경영인, 사외이사 등 좋은 기업을 위한 요소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서울인베스트가 수술도 시키더니 회복도 잘 시킨다는 시장의 평가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 과정에서 소액주주나 외국계 투자자와 상담하고 기업 가치 제고 활동을 하면서 우리도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수술’할 기업은 없나.태광그룹을 상대로 여기(검찰수사)까지 끌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평가가 시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 오너의 횡포로 피해를 입었다는 주주들이 상담을 신청하고 있다. 오늘도 매출 1조원이 넘는 한 기업에 ‘(소액주주로서 불법 경영 혐의가 있어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조만간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내용증명에는 태광그룹 사태에서 서울인베스트가 한 일도 첨부할 예정이다. 통보를 받은 기업도 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쪽도 ‘내용증명을 보내면 대표이사에게 보고하고 대화를 주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올해 안으로 기업 1~2곳을 상대로 오너의 횡포를 근절하고 기업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행동이 좀 과격하다는 반응도 있다.나는 잘못을 시정해 좋은 방향으로 강제하는 ‘저승사자’나 ‘민간 금감원’ 역할을 할 것이다. 태광그룹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불법 경영을 일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이를 고치는 작업은 사회적으로도 정당하고, 돈도 벌 수 있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구조조정 전문가인 박 대표에 대한 관심도 크다.‘약탈꾼’ ‘내부고발자’ 등의 평가도 알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과거 노동운동가였고 사회주의자였다(그는 1976년 서울 신진공고를 졸업한 뒤 15년간 노동운동을 했으며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고문(1993~97),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1999~2002)으로 활동했다. 이어 2002년 사모펀드 회사인 서울인베스트를 설립해, 증권 관련 집단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제 태광그룹을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현재의 나를 표현하자면 ‘병든 기업을 고치는 의사’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업을 바꾸려고 노력했다.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폭로로 ‘불법 경영의 실태가 이렇다’라는 인식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도 2006년 태광그룹의 투명화를 위해 집단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방식이 점잖고 한계가 있었다. 나는 기업을 진짜로 바꾸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저승사자’식으로 불법은 하면 안 된다는 무서움을 느끼게 하고 싶다. 시장에는 여러 방식이 필요하다. 김용철 변호사처럼 내부자 고발을 통해 문제를 환기하는 방식, 소송으로 문제를 고치려는 장하성 펀드 방식과 함께 서울인베스트처럼 걸리면 끝까지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융합이 일어나서 여러 방식이 서로 어우러지는 방안도 나올 것이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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