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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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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한, 60년 만의 명예회복

‘대구 10월 항쟁’ 유족회의 첫 추모행사…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당시 사진도 발굴
등록 2010-10-14 16:30 수정 2020-05-03 04:26
1946년 10월2일 대구 태평로에서 경찰이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다. 경찰의 발포에 쫓기는 시위 군중들이 왼쪽 도로가에 웅크리고 있다. 그 앞에는 쓰러진 주검들이 보인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946년 10월2일 대구 태평로에서 경찰이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다. 경찰의 발포에 쫓기는 시위 군중들이 왼쪽 도로가에 웅크리고 있다. 그 앞에는 쓰러진 주검들이 보인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946년 10월1일 오전, 1천여 명의 학생·시민·노동자들이 대구 부청(오늘날의 시청) 앞에 모여들었다. 쌀을 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배가 고팠다. 광복 직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쌀 수급 정책에 무능했다. 농촌에서 쌀을 공출하고 도시에서 이를 배급했지만, 농민도 시민도 쌀을 구하지 못해 굶주렸다.

미군정 쌀 수급 실패가 촉발… 60여 명 희생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했으나, 대구 사람들은 더 배고팠다. 때맞춰 콜레라가 창궐한 탓이다. 미군정은 대구를 봉쇄해버렸다. 사람은 물론 생필품도 시 경계를 넘지 못했다. 닫힌 도시에서 경찰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대구 경찰 가운데는 친일 인사가 적지 않았다. 대구 시민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사회주의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 총파업이 시작됐다. 9월 말, 박헌영이 이끄는 좌익계가 전국 총파업을 도모했다. 명색은 전국 파업이었으나, 실질은 대구의 파업이었다. 대구의 철도·우편·섬유·운수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기근·질병·파업·이념이 함께 했다. 10월1일 대구 시위는 그렇게 시작됐다.

진실화해위는 10월1일부터 이틀에 걸쳐 대구에서만 민간인 18명, 경찰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족회는 ‘24번’이라 적힌 팻말이 걸린 주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망자가 24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진실화해위는 10월1일부터 이틀에 걸쳐 대구에서만 민간인 18명, 경찰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족회는 ‘24번’이라 적힌 팻말이 걸린 주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망자가 24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그날 오후, 시위 군중은 1만여 명으로 늘었다. 대치하던 경찰이 끝내 발포했다. 학생 1명이 죽었다. 다음날인 10월2일, 분노한 군중은 대구 경찰서를 점령했다. 이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이 다시 총을 쏘았다. 시민들이 또 죽었다. 미군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봉기는 경북으로 번져 멈추지 않았다. 이틀 동안 대구에서만 18~24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죽은 사람들은 이름마저 잃었다. 언급하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뒤이은 한국전쟁과 군사정부 시절, 그들의 후손은 조상의 죽음을 하소연하지 못했다.

그 사건을 어떤 이는 ‘10월 (인민)항쟁’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10월 (좌익)폭동’이라 부른다. 사건 발생 64년 만인 지난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 사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실화해위는 “사건을 진압하러 출동한 경상북도와 대구 지역의 경찰에 의해 60명의 민간인(대구·경북 포함)이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잠정적인 진실규명 조사 결과를 유족들에게 통보했다. 몇몇 논란을 조정하느라 최종 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쨌건 나라의 이름으로 진실을 확인했으므로, 유족들은 대명천지에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지난 3월 ‘10월항쟁유족회’를 만들었다.

지난 10월1일, 추모행사를 대구 국채보상공원에서 열었다. 행사장에서 공개한 사진 자료를 10월항쟁유족회가 에 보내왔다. 세상의 빛을 처음 쬐는 사진들이다. 사건 조사를 벌인 진실화해위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했다. 미군정 관계자들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월2일 오전, 수천 명의 시민이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로 향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0월2일 오전, 수천 명의 시민이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로 향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아직도 연좌제 피해 우려하는 유족들

유족회의 이성번 사무국장은 “돌아가신 분들은 그동안 ‘좌익 폭동의 수괴’라는 오명을 썼다. 지금도 과거를 드러내 자신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유족이 많다”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의 할아버지는 당시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950년 7월 경북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서 학살당했다. 서점을 운영하던 이 사무국장의 아버지는 망자의 명예회복을 도모하다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에 체포돼 교도소에서 5년을 보냈다. 이 사무국장도 평생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3대에 걸친 60여 년 현대사의 격동이 사진 속에 정지해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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