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일 지방선거의 함의는 이명박 정부 심판이나 진보개혁 세력 연대가 전부가 아니다. 각 정당 안에서 복잡한 역학관계를 형성하는 여러 세력에겐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다. 누가 공천을 주도하느냐, 누가 많은 후보를 당선시키느냐에 따라 당내 정치 지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돋보기를 갖다대면, ‘원조 소장파의 귀환’과 ‘친노의 정치적 복권’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도드라진다.
인재영입·출마·공천 나눠맡은 ‘남·원·정’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으로 상징되는 한나라당 원조 소장파는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
사무총장인 정병국 의원(3선)은 공천심사위원회(공심위) 구성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 실제 공천 심사에도 참여하는 ‘공천의 핵’이다.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박근혜계 인사들이 이방호 당시 사무총장을 ‘공천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무총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남경필 의원(4선)은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한나라당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게 됐다. “중도실용·서민 가치에 맞는 인사, 비정규직·다문화가정·청년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을 영입하겠다”고 2월15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바 있다. 원희룡 의원(3선)은 서울시장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 나선다. 맞붙는 상대가 현역인 오세훈 시장이어서 쉬운 싸움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정두언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서지 않고 원 의원을 ‘지원 사격’하기로 했다는 말이 나오는 등 당내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다. 권영세 의원(3선)은 서울 지역 기초단체장·기초의원 공천을 주도하는 서울시당위원장이다.
이들이 지방선거 국면에서 전면에 나서게 된 일차적 배경은 어느덧 ‘소장파’라는 수식어가 민망한 중진 반열에 오른 데 있다. 같은 비판 목소리를 내더라도 초·재선 땐 “뭘 잘 몰라 저런다”는 반응이 돌아왔지만, 이젠 누구도 가볍게 흘려듣기 힘든 당내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정몽준 대표의 취약한 당내 기반, 이명박계와 박근혜계의 첨예한 갈등이란 조건이 더해지면서 이들의 몸값엔 ‘프리미엄’이 붙었다. 이명박계인 정병국 의원 말고는 대체로 ‘중립 성향’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양쪽 계파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정몽준 대표로선 손을 내밀기 가장 쉬운 상대가 이들이다. 양쪽 진영도 소장파의 완충지대 기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다. 한 원조 소장파 의원은 “우리도 나이가 들었고 나서서 일할 시기가 된 것 아니냐”며 “더구나 계파 갈등이 워낙 심화됐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정적 순간 ‘꼬리 내렸던’ 못 미더운 과거이들이 청와대 입김이나 계파 갈등 구조에서 자유롭게 공천과 선거를 이끌 수 있을지를 두고선 “기대 반, 우려 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의 중도개혁을 오래도록 주장해온 만큼 공천도 그에 걸맞은 결과를 보여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 뒤엔, 논쟁적 사안의 결론을 내릴 땐 언제나 당 주류를 따랐던 이들의 ‘과거’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17대 대선만 보더라도 소장파 모임이던 ‘새정치수요모임’은 이명박 당시 후보 캠프에 대거 합류한 바 있다. 또한 계파 갈등의 장벽은 소수파인 이들이 뛰어넘기엔 너무 높다는 평가가 많다.
민주당에서 신발끈을 조이고 있는 이들은 친노 진영이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에 정권을 뺏긴 뒤 스스로를 ‘폐족’(조상이 큰 죄를 지어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던 이들은 6월 지방선거의 광역·기초단체장 후보로 대거 출마한다.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는 한명숙 전 총리를 비롯해 이광재 의원(강원도지사 선거), 안희정 전 최고위원(충남도지사 선거) 등이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혁신관리수석비서관을 거쳐 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이용섭 의원은 광주시장 경선을 준비하고 있다.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은 경기 부천시장 선거 출마 뜻을 밝혔고, 최근 민주당에 입당한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과 차성수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각각 경기 성남시장, 서울 금천구청장 선거에 나설 계획이다.
이들은 2008년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인사들의 모임인 ‘청정회’를 만들 때부터 지방선거 출마를 논의했다. 그해 총선 때 민주당 공천을 신청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낙천한 탓에 다른 ‘살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지역주의 해소, 국가 균형발전, 지방자치 발전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을 실행하려면 단체장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노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이 계속 불거지면서 친노 진영의 정치세력화를 공개적으로 못박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민주당 안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친노 진영이 선거에 나서게 된 직접적 계기는 누가 뭐래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다. 한 민주당 당직자는 “여론조사를 해보면, 같은 예비후보라도 ‘노무현’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직함을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지지율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급작스런 서거를 애도하는 정서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향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안희정 전 최고위원도 주변 인사들에게 “(예비후보로 유권자들을 만나면서) 대통령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건 다 ‘노무현 좌희정’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친노 진영을 백안시했던 민주당의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친노 후보들이 선거 초반 바람을 일으키고, 이에 기대 다른 민주당 후보들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다. 특히 광주·충남의 ‘노무현 바람’이 수도권 쪽으로 불기 시작하면, 지난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이 쓸어갔던 서울 서남 지역의 구로·금천·관악구, 강북 지역의 동대문·성북·강북구 등 ‘전통적 민주당 벨트’를 탈환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도 나온다.
“유권자는 언제나 미래지향적 후보 선택”하지만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정치 컨설턴트는 “친노들은 5월23일이 노 전 대통령 1주기여서 추모 열기가 달아올라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잡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은 늘 ‘미래지향적인 후보’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의 가치를 어떤 비전과 정책으로 구현할지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친노 진영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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