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은 1년9개월 만에 집권당 대표가 됐다. 그를 집으로 들인 ‘개국 일등공신’은 야인이 되어 아직 허허벌판에 서 있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와 이재오 전 의원 얘기다. 2007년 12월3일 정 대표가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07년 대선 한 달여를 앞두고 이명박 후보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이명박계 좌장인 이재오 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 쪽과 심각한 갈등을 빚다 11월8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막바지에 이른 검찰의 ‘BBK 주가조작 사건’ 수사는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사 결과 발표 이틀 전, 민주당에서도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이 전격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정 의원의 입당은 이명박 후보 지지층을 안정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입당하자마자 전국을 누비며 지원 유세를 벌인 정 의원은 발 벗고 선거를 돕지 않는 박 전 대표의 빈자리를 메운, 훌륭한 ‘대체재’였다.
이런 구도를 만든 사람은 이재오 전 의원이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박희태 전 대표와 함께 이 전 의원은 여러 차례 정몽준 대표와 접촉해 입당을 권유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대 국회 때 처음 여의도에 입성한 이 전 의원은 한일의원연맹 활동을 하면서 당시 무소속이던 정 대표와 친분을 맺었고, 축구라는 공통의 관심사 덕에 정 대표 자택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다. 16대 국회에선 국회 교육위원회 활동을 함께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재벌 2세 기업인과 가난한 운동권 출신으로 배경이 전혀 다른 이들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에 불과했다.
특별한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한 건 지난 대선 때였다. 고리는 박근혜 전 대표였다. 최고위원직을 내놓은 이재오 전 의원은 당내 권력 구도상 박 전 대표를 견제할 중량감 있는 인사가 필요했고, 대권을 꿈꾸는 정몽준 대표로선 ‘둥지’와 함께 잠재적 경쟁자인 박 전 대표를 누를 ‘지원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 대표는 사퇴한 이재오 전 의원 자리를 이어받아 지난해 1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으로 추대됐다. 당내 권력 구도는 ‘박근혜-이재오-정몽준’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점쳐졌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재오 전 의원은 지난해 총선에서 탈락했다. 정몽준 대표는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극명한 계파 구도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정 대표가 2위에 오른 지난해 7월 전당대회 결과를 보면 정 대표를 향한 민심과 당심의 극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30%가 반영되는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정 대표는 46.77%(환산 득표수 2896표)를 얻어 박희태 전 대표(30.13%, 환산 득표수 1865표)를 1천 표 넘게 따돌렸다. 하지만 대의원 투표에서 정 대표는 박 전 대표보다 1873표 뒤진 2391표를 얻는 데 그쳤다.
물론 정몽준 대표는 이재오 전 의원을 발판 삼아 당내 입지를 넓히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전당대회 전인 지난해 5월25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이 전 의원 환송식에 초청받지도 않은 채 참석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 전 의원으로선 미 존스홉킨스대 객원교수로 초청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당 분열의 상징으로 지목돼 쫓기듯 미국으로 떠나는 그를 이명박계 의원·당선자 등 100여 명이 모여 ‘위로’하는 자리였다. 이날 정몽준 대표의 갑작스런 등장에 참석자들은 “우리와 접촉면을 넓혀 당권을 장악하려는 뜻 아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반박연대’ 밀약설 나돌기도지난해 10월10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으로 주미 한국대사관 국정감사차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도 정 대표는 이 전 의원을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정 대표는 “거기까지 가서 안 만나면 더 이상하지 않느냐”며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정치권에선 당내 입지를 넓히려는 시도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7월23일 서울시당위원장 선거 때는 ‘이재오-정몽준 밀약설’이 나돌았다. 정 대표와 가까운 전여옥 의원을 이재오 전 의원 쪽이 지원하는 대신, 박근혜계가 반대하는 9월 전당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 대표가 박희태 전 대표 등 다른 최고위원들의 사퇴를 압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여옥 의원이 경쟁자인 권영세 의원한테 지는 바람에 9월 전당대회를 통한 이재오 전 의원의 복귀는 물거품이 됐지만, 이것이 박근혜 전 대표라는 공동의 경쟁자를 겨냥한 ‘반박연대’였다는 풀이엔 별다른 이견이 없다.
10월 재보선 출마를 노린 박희태 전 대표의 사퇴로 대표직을 승계한 정 대표는 친이직계인 조해진 의원을 대변인에, 이재오계인 정양석 의원을 비서실장에 앉혀 당 주류에 다시 한번 ‘구애’를 했다. 당-청 간 소통을 강조하며 주호영 특임장관 내정자에게 당내 회의 참석도 요청했다. 계파 문제에 대해선 “정치를 ‘국민의 리그’로 원위치시키려면 현재보다 더 개방적인 분위기가 돼야 한다. 대통령 후보는 4~5명이 되는 게 국민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등 대선주자로서 박근혜 전 대표의 독보적인 입지를 부인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이재오 전 의원 쪽은 우선 정몽준 대표를 지켜보겠다는 태도다. 그의 한 측근은 “지금까지는 ‘박근혜-이재오’ 전선이었지만,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정몽준 대표가 전면에 나섬으로써 이 전 의원이 홀가분해졌다. 집권당 대표가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이재오를 ‘이명박 대리인’이라고 꿀밤 줄 이유가 있느냐”며 “게다가 아직 정권 2년차이므로 구원투수는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정몽준 체제’ 역공 나선 ‘친이재오’ 인사들하지만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재판이 늦어지면서 10월 서울 은평을 재보선을 통한 정계 복귀가 불투명한 이 전 의원 쪽에선 초조함도 드러난다.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던진 견제구가 너무 성장하면 자신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년 초 전당대회’에 계속 불을 지피는 것이다. 공성진 최고위원은 9월10일 “(정 대표의)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될지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정몽준 흔들기’에 나섰다. 이에 정 대표 쪽은 “대표직 맡은 지 얼마나 됐다고 시한부로 하라, 몇 달만 하라고 하느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지난 6월 당 쇄신특위는 내년 2월 전당대회를 여는 방안을 당 최고위원회의에 보고했다. 하지만 지금 당 안팎의 중론은 “정 대표가 10월 재보선에 이기고, 정기국회도 잘 이끌고, 계파 갈등도 무난하게 수습하면 굳이 내년 초에 전당대회를 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정몽준 체제로 지방선거를 치르기 어렵다는 여론이 높아지면 언제든 조기 전당대회는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반박연대’에 기댄 정몽준 대표 체제가 시한부로 끝날지, 내년 7월 임기까지 무사히 굴러갈지는 전적으로 정 대표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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