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과 김정일의 만남. “9년 전에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0년 가을, 클린턴은 평양에 가지 않았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중동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미사일방어망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부시 당선자 팀은 북-미 미사일 협상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클린턴 대통령이 방문하면,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고 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폐기하겠다는 합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9년 지각한 만남,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실패한 외교의 ‘부시 집권 8년’을 넘어서고,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오바마의 대북정책에 새로운 길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흘러간 시간 동안 제네바 합의는 깨졌고, 북한의 핵 능력은 향상되었으며, 미사일 성능도 발전했다. 부시에서 오바마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대북정책도 실패했다. 미국은 초조해하는 북한의 상황을 읽지 못했고, 실패한 외교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북핵 협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로켓을 발사했고, 핵실험을 해버렸다.
두 명의 여기자 억류는 우발적 사건이었다. 북한은 과거의 억류 협상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다가오게 만드는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다. 클린턴은 미국이 보낼 수 있는 최적의 특사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며,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다. 오바마 행정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클린턴과 김정일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사실 여기자 석방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길게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북한이 보도한 대로 북-미 양국 관계 현안들이 중심적으로 논의되었을 것이다.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대화의 형식이다. 북한은 이미 6자회담이 영원히 끝났음을 선언한 바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대화를 요구한다. 6자회담은 사실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마주 앉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의 6자회담은 북-미 양자가 중요한 쟁점을 합의하고 6자가 모여 추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다.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거부감에는 보수적인 일본과 한국 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아직 6자회담을 우선시한다. 북한과의 포괄적 접근에서 돈을 누가 낼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재정적 기여를 중시한다. 양자 대화를 보상으로 간주하는 네오콘적 발상의 관성도 작용했다. 클린턴과 김정일의 면담에서 이 문제는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김정일 위원장은 실질적인 북-미 양자 대화를 다시 강조했을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해답을 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클린턴-김정일 면담 자체가 간접적이지만 양자 대화가 아닌가. 오바마 행정부가 앞으로 대화의 형식과 관련해서 어떤 지혜를 발휘할지 지켜볼 일이다.
둘째, 포괄적 접근이다. 포괄적 접근은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를 병행적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클린턴 대통령도 익숙한 개념이다. 1999년 페리 보고서의 기본 원칙으로 제시되었고,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조-미 공동 코뮈니케’라는 양국 합의로 구체화되었다. 2000년 뜨거웠던 기억은 두 사람의 대화 진전에 윤활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포괄적 접근의 기본 원칙에 공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다. 2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기존의 협상 프레임과 다른 주장을 했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기존 핵 보유를 전제로 한 핵 군축 협상을 들고 나왔다.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추가적인 핵 활동 중단은 당연히 제시했을 것이다. 문제는 기존 핵에 대한 입장이다. 묵시적 인정을 요구했다면, 미국이 받기 어렵다. 김정일 위원장은 아마도 비핵화에 대한 의지에 변함이 없지만 추가 핵 활동 금지와 기존 핵무기 폐기를 단계적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검토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클린턴의 방북으로 대화의 문이 열렸다. 오바마 행정부가 그 문으로 입장할 것인가? 오바마 행정부는 클린턴이 갖고 온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클린턴의 방북이 워싱턴 내부의 대북정책 결정구조에 미칠 영향이다. 벌써부터 시끄럽다. ‘미국의 조갑제’인 존 볼턴 등은 클린턴의 방북을 비판하고 나섰다. 양자 대화 자체를 보상으로 간주하는 네오콘다운 주장이다. 그렇지만 모린 다우드가 8월5일 칼럼에서 비판했듯,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과연 외교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까.
중요한 것은 행정부 내부의 변화다.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대북정책은 그동안 비확산파가 주도했다.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의 임명이 미뤄지면서 유엔대표부·재무부·국가안보회의(NSC)의 비확산파들이 제재 국면을 주도했다. 대화 국면이 시작되면, 제재의 동력은 떨어진다. 이제 캠벨 동아태 차관보도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고, 6자회담 담당자들도 포괄적 패키지의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기본적으로 외교안보는 대통령 어젠다다. 여기자 석방은 오바마 외교의 성과다. 국내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외교정책에서도 북한 문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늪으로 변해가는 아프간 문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진행되는 이란 문제, 언제나 쉽지 않은 중동 문제와 비교했을 때, 북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쏟은 만큼 성과가 나온다. 미-중 전략 대화를 계기로 동북아 외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실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이번 기회에 협상의 힘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협상에 대한 용기를 가지면, 대북정책은 달라진다.
압축적·단계적인 포괄 패키지 불가피물론 오바마 행정부가 클린턴 방북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질 협상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원칙 때문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인질 협상을 공개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보상은 없다’는 원칙 또한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인질 협상에서 정부가 개입했지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보상을 했으면서도 그것 또한 인정한 경우가 거의 없다. 클린턴 대통령이나 미국의 외교 당국자들이 이번 방북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핵 협상의 복잡성도 작용했다. 북핵 문제는 과거와 다르다. 북한의 핵 능력이 질적으로 달라졌고, 북한은 협상의 프레임을 바꾸려고 한다. 국제적으로도 협상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한국과 일본을 이끌고 가야 한다. 국내적으로도 네오콘의 재등장 명분을 주지 않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선적으로 포괄적 접근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처럼 포괄적 패키지를 부시 시대의 프레임으로 읽는다면 협상안으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북-미 양국이 협상을 시작하려면 ‘선후 해결’이 아니라, ‘병행 해결’로 전환해야 한다. 일괄 타결 개념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포괄적 접근은 단계적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외교관계 정상화나 한반도 평화체제 같은 북핵 폐기의 상응 조처들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협상처럼 너무 단계를 세분화하면 이행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 좀더 압축적이면서도 단계적인 포괄적 패키지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화의 형식과 관련된 지혜도 필요하다. 당분간 6자회담의 재개는 어렵다. 그렇다고 곧바로 양자 대화에 나설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물밑 접촉과 간접 대화를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간접 대화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난 7월27일부터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중 양국의 전략과 경제 대화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의 전략·경제 대화와 달리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 대화와 경제 대화를 구분했다. 전략 대화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상대는 중국의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당 대외연락부장을 지냈고, 외교부 제1부장을 거쳐 탕자쉬안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다. 2003년 8월 6자회담이 이뤄지기 전의 예비 회담이었던 3자회담을 만든 협상가이기도 하다. 그때 다이빙궈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파월 국무장관을 설득했다. 이후 6자회담의 교착 과정에서 다이빙궈는 북한과 미국을 오가며 중재 능력을 발휘했다. 이번에 두 사람은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된 많은 논의를 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두 사람이 전략 대화의 대표로서 북핵 문제와 관련된 일상적인 협의를 해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클린턴-김정일 면담으로 중국이 움직일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었다. 중국은 움직일 수 있을 때에만 움직인다. 교착 국면에서 위기 국면으로 전환될 때, 또는 중국이 개입한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되기 어려울 때, 그럴 때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중국도 고위급 특사를 보낼 때가 되었다. 미-중-북 3자 대화 국면이 펼쳐질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방북이 부러워라
다시 말해 클린턴 방북 이후 한반도 정세는 본격적인 대화 국면을 열기 위한 준비 단계로 이행될 것이다. 당분간 북핵 협상의 기본 틀을 재정립하는 노력들이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한편으로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일본과의 외교적 조율을 계속할 것이다.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할 민주당 정부와의 외교적 협력에도 신경쓸 것이다. 동시에 중국을 통해 북-미 양국의 견해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물밑 대화도 지속할 것이다. ‘뉴욕 채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클린턴이 갖고 온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정리된 의견을 전달하려 할 거라는 점이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을 추진하는 것이다. 방북의 명분은 포괄적 패키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의미 있는 민간 대화도 지속할 것이다.
클린턴의 방북이 부럽다. 특히 외교정책에서 전직 대통령의 역할이 참으로 부러워 보였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우리는 왜 저런 전직 대통령을 갖고 있지 않은가? 살아 있으면 많은 일을 했을 대통령은 돌아가셨다. 언제나 한반도 평화를 걱정하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협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대통령은 병상에 누워 계신다. 그 이전 대통령은 아마도 북한이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전 대통령도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러고 보니 전두환 대통령만 남는다. 슬픈 코미디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유아무개씨가 묻고 있다. ‘나의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이명박 정부가 대답해야 한다. 국가의 책무를 더는 방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충고했다. 북-미 대화가 이뤄질 것이니, 한국도 남북관계를 개선해 새로운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미국은 여기자 석방을 위해 특사를 보낼 가능성이 크니, 그 이전에 유씨를 석방시켜야 한다고.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부재 중이다.
과거의 낡은 국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다리면 북한이 굴복할 것이라는 신념 역시 변하지 않았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남북관계도 풀릴까? 그렇지 않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가 시작되면, 이명박 정부에 대해 굴욕을 강요할 수 있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어려워진다. 많이 늦었다. 그러나 지금 바꾸지 않으면 그 뒤는 더욱 어렵다.
관중에겐 작전을 알려주지 않는다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엇박자는 조금씩 벌어질 것이다. 당장 정보 공유와 관련해서 틈이 벌어진다. 선수로 함께 뛰어야 작전을 공유한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구경꾼에게 자세하게 전략을 설명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선수가 아닌 관중은 일반적으로 정보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정보 과장을 떠올리면, 오히려 정보 공유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당장 클린턴-김정일 면담 내용을 얼마나 신속하게, 얼마나 자세하게 브리핑해줄지 의문이다.
남북관계 없는 한반도 정세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미-중 양국의 주요 2개국(G2) 시대를 경각심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 한반도에 다시 한번 강대국 정치의 구조가 정착된다면, 그것은 악몽이다. 그런 시대가 와서야 되겠는가. 한반도 평화는 우리의 운명이다. 자신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잃어버린 1년 반의 시간이 안타깝다. 나아가 잃어버릴 3년 반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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