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공황 상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미국 여기자 두 명과 함께 유유히 귀국길에 오르자 정부와 한나라당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대북정책 기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북정책 담당자를 전면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요약하면 ‘정부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100일 넘게 북한에 억류돼 있는 현대아산의 개성공단 직원 유아무개씨 신변이 목 안에 걸린 가시다. 7월30일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가 나포된 연안호 선원의 송환 문제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불행은, 그동안 대북 강경정책을 고집하며 북한을 자극해온 이명박 정부의 능력으로는 현대아산 직원 유씨와 연안호 선원의 송환 문제를 풀기 어려워 보인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남북 간 대화 채널이 모두 무너졌다는 사실이 심각하다. 박순자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8월5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는 현재 103일째 억류돼 있으며, 연안호 선원 4명을 비롯해 우리 국민 5명이 사실상 북한에 인질로 잡힌 상태”라며 “우리 정부는 남북 간 대화 채널이 단절된 상태에서 북한의 태도가 바뀌기만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경험을 보더라도 대화 채널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다. 남쪽 민간인이나 미국인이 북한 방문 및 여행 도중 북한 당국에 의해 억류됐던 사건은 과거에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대표적 사례가 1999년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 사건이다.
민씨는 금강산을 관광하던 중 북한 안내원에게 무심코 남쪽 탈북자 이야기를 꺼냈다가 정보기관 공작원이라는 의심을 받고 억류됐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처음 발생한 사건이었다. 민씨 억류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대응은 민첩했다. 공식적으로는 금강산 관광 사업자인 현대아산이 적극적인 석방교섭에 나서는 한편, 국정원과 북쪽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사이의 비공식 대화 채널까지 풀가동했다. 현대아산과 정부의 노력 덕분에 민씨는 억류 나흘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6년 8월 압록강을 헤엄쳐 건넌 한국계 미국인 에번 헌지커의 사례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귀국한 두 명의 미국 여기자 사건과 유사하다. 당시 26살의 헌지커는 본인 주장에 따르면 북한 선교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입북했다. 헌지커의 처리에 고심하던 북한은 한 달 반이 지난 뒤 그를 ‘남조선의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한반도 상황도 지금과 비슷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해 북한의 사과를 요구하며 대북 강경정책을 주도했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도 아울러 교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대화였다. 북한과 미국은 뉴욕의 유엔대표부, 즉 ‘뉴욕 채널’을 통해 논의를 계속했고, 마침내 북한과 관계가 깊은 빌 리처드슨 의원의 방북이 성사됐다. 리처드슨 의원은 미 국무부와 백악관의 물밑 지원 아래 군용기로 평양에 들어갔다. 북한은 헌지커를 활용해 미국과 포괄적 대화의 기회를 잡았다. 미국은 대신 북한에게서 제네바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약속과 미군 유해조사를 위한 조사단의 입국허가를 얻어냈다. 민간인 억류 사건이 오히려 양국 관계 개선의 호재로 활용된 사례다.
YS 정부, 사과문 보내 억류 항해사 구해와이밖에도 1995년 삼선 비너스호 항해사 이양천씨가 청진항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억류된 사건이 있다. 이씨에게는 정탐 행위 및 간첩 혐의가 적용됐지만, 김영삼 정부는 그래도 사과문이라도 보냈다. 이씨는 곧바로 석방됐다.
1996년 5월말에는 미국 국적의 재미동포 목사인 이광덕씨가, 1998년 9월 중순에는 역시 미국 국적의 옌볜과학기술대학 김진경 총장이 간첩 등 혐의로 북한에 억류됐다. 1999년 6월에는 미국 국적의 한국계 여성 캐런 한이 북한 관리 모욕 혐의로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넉 달 뒤 풀려났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억류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석방의 이유는 하나로 모인다”며 “물밑 접촉이든 공개 접촉이든,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마침표를 찍었지만, 두 명의 여기자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미국이 들인 공은 적지 않았다. 우선 7월 초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 등 민간 채널을 활용해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고,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직접 여기자 사면을 요청하기도 했다. 최대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며 실리를 얻어내겠다는 의도였다.
반면 현대아산 직원 유씨 문제 등을 대하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달랐다. 북한과 대화하는 대신 국제적 압력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나서서 유엔인권위 제소 방침을 거론하는 등 북한을 자극해왔다. 이렇듯 북한을 압박해서 현대아산 직원 유씨를 송환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대다수 북한 전문가는 이런 태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는 특사 파견도 지금 단계에서는 효과적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보다 닫힌 남북 간 대화 채널을 열어 협상 분위기를 조성해나가는 게 먼저라는 이야기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정치권 일각에서 대북특사 이야기가 거론되는데, 특사 파견은 이미 상당 수준의 논의가 진척된 상황에서 이뤄지는 것이 맞다”며 “이명박 정부가 지금처럼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대뜸 대북특사를 제안한다면 북한은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 명명백백하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유씨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북한을 교류와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우선 6·15 및 10·4 합의를 이행하겠고 선언한 뒤, 구체적으로는 개성공단 기숙사 신축 등의 약속을 실천해나가면 유씨 문제도 자연스럽게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북 사정에 밝은 한나라당 관계자도 유씨 문제를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 및 개성공단 정상화와 엮었다. 이 관계자는 “특사를 보내든 당국자 간 접촉을 재개하든 대화의 노력이 필요하며 아울러 남북 교류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운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며 “지난 10여 년간 정부와 민간이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이룬 성과를, 지난 정권의 업적이라며 무시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고 말했다.
뒤늦은 MB의 발언, 믿을 수 있을까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여름휴가 중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뒤 현대아산 직원 유씨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오늘(8월7일)로 131일째 억류돼 있는 개성공단 근로자와 연안호 선원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는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이 북한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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