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지배하는 것은 바람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노풍’에 실려왔다. 2004년 총선 때는 ‘탄핵 역풍’이, 2007년 대선에서는 ‘경제 살리기 바람’이 대세였다. 바람이 불면 선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지역도 있었다. 한 곳이 영남이었고, 다른 한 곳은 호남이었다. 호남을 포기해도 아쉬울 게 없었던 보수 정당은 굳이 호남에 공들이지 않았다. 관심 지역은 늘 영남이었다. 2010년 지방선거도 마찬가지다. 진보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영남에서 민주화 세력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열쇠는 친노 그룹이 쥐고 있다. 주목해야 할 곳은 부산·경남(PK)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바람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PK 지역의 민심 이반 현상이 심상치 않다. 6월22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정당 지지도 조사를 보면, 한나라당은 PK에서 20.7%의 지지를 얻었다. 전국 평균(23.3%)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반면 민주당은 19.6%를 기록해, 한나라당을 턱밑에서 위협했다. 물론 이 수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7월13일 같은 KSOI 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다시 36.8%까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18.5%)은 6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만 본다면 PK에서 한나라당이 다시 지역 맹주의 지위를 회복했다고 풀이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올 초(3월23일) KSOI 조사와 비교하면, PK는 여전히 한나라당 지지에 유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나라당 지지도는 48.8%였다. 민주당은 한 자릿수에도 미치지 못했다(5.8%). 박병석 KSOI 연구조사팀장은 “여론의 흐름으로 볼 때 PK에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하락하는 추세인 반면, 민주당 지지도는 세 배 이상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PK의 동요는 지난 선거 결과와 비교할 때도 잘 드러난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울산을 포함한 PK에서 55.6%의 지지를 얻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PK에서 50.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등 돌리는 속도가 빨라진 측면은 있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PK의 감정이 예전만 같지 못한 것은 분명한 현상인 셈이다.
PK 민심의 이탈은 이명박 정권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 때 PK는 이명박 정권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지만, 대가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은 초기부터 4대 권력기관장 등 정부 요직에 대구·경북(TK) 인사를 고집스레 우겨넣었다. 보수 언론의 한 논설위원마저 “10년 굶은 TK의 잡식성 인사”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참여정부가 ‘부산 정권’을 자처하며 PK 인사를 중용한 것과 정반대였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으로부터 이탈한 PK의 반MB·비한나라당 유권자를 담아낼 그릇이다. 이철희 KSOI 수석 애널리스트는 “PK의 여론 흐름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에서도 이런 민심이 표출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반MB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그쪽으로 정치적 지지를 보낼 가능성이 있지만, 기존의 한나라당 대 민주당 구도에서는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치적 보폭을 넓히고 있는 친노 그룹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PK에 정치적 뿌리를 둔 이들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PK를 중심으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는 선거 전체를 지배하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적 자원도 풍부한 편이다. 친노 그룹에서 울산을 포함한 PK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은 10명 안팎이다. 부산시장 후보로는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오거돈 부산해양대 총장이 꼽힌다. 이 가운데 김정길 전 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로서 의무감을 갖고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가까운 지인의 말이다. 김 전 회장은 친노 직계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1990년 3당 합당 때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잔류를 선택한 인연이 있다. 김 전 회장은 그 뒤 ‘꼬마’ 민주당을 만들 때, 그리고 평화민주당과 야권 통합을 이룰 때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출마 가능성은 아직까지 낮은 편이지만, 민주당과 부산 지역 시민사회단체에서 조직적으로 출마를 촉구할 태세다. 부산 전체, 더 나아가 영남 지방선거 전체를 아우르는 부산시장 후보로 문 전 실장만 한 상징적 인물이 없다는 평가다. 부산 지역 친노 인사가 참여한 ‘사단법인 자치21’의 최상영 사무처장은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정치적 가치를 실현할 주체로서 (문 전 실장이)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며 “산 자의 몫을 다하려면, 싫든 좋든 문 전 실장은 친노 그룹의 구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부산시장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뤄내려면 문 전 실장이 유일한 카드라는 것이 지역 정가의 관측이다. 민주당과 진보 정당, 친노 그룹 등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문 전 실장이라는 이야기다.
부산시장 선거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지역은 경남이다. 부산이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면 경남은 실제 고향이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부산만큼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경남지사 후보로는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친노 그룹의 핵심 인사는 “아직 출마를 확정지은 상황은 아니지만 세 번 물어보면 두 번은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한 번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있다”며 김 전 장관의 출마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울산시장 후보로는 참여정부 시절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송철호 변호사가 출마 결심을 거의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역시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을 지낸 차의환 울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의 출마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PK에서 친노 바람이 유의미한 결실을 맺으려면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1995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가 직선제로 바뀐 이래 TK를 포함한 영남권에서 비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적은 없었다. 경남 양산 국회의원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다 모두 낙선한 송인배 전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은 “민주개혁 세력의 후보로 영남 선거에 나선다는 것은 매번 새롭게 맨땅에 머리 박기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직선제로 비한나라당 광역단체장 나온 적 없어
PK에서 친노 바람이 지역주의를 뚫기 위해 먼저 넘어야 할 벽이 있다. 2008년 총선 때부터 PK 지역을 지배해온 ‘친박 바람’이다.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박근혜 전 대표가 다시 한나라당 간판으로 나설 경우, 한나라당은 영남 지방선거를 박 전 대표 중심으로 치를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표가 당권이나 지방선거 공천권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2010년 지방선거만큼은 박 전 대표가 손 놓고 구경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영남 일부를 친이계나 친노 후보에게 내준다는 것은 안방을 내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현기환 한나라당 의원(부산 사하갑)은 “내년 지방선거 결과가 2012년 대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봤을 때, 대권에 뜻을 둔 박 전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며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직을 맡는 것과 관계없이, 지원 유세 등의 방식으로 지방선거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영남, 그중에서도 PK 지방선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친노 그룹에게는 힘겨운 싸움이 된다. PK 지역에서 반MB 여론이 높아지는 것과 별개로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박 전 대표 개인에 대한 호감도가 줄지 않았고, 친박 그룹이 ‘여당 내 야당’으로 인식되는 것도 현실이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박계에서는 이미 부산시장 후보로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서병수 의원, 울산시장 후보로 3선에 도전하는 박맹우 현 시장과 정갑윤 의원의 출마를 거론하고 있다.
친노 그룹도 선거가 ‘한나라당 대 반MB 후보’의 싸움이 아닌 ‘친박 대 친노’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의 공간이 돼야 할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친박’ 후보로 나서는 것은 유권자를 현혹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친노 관계자는 “영남 민주화 세력에게 지방선거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도전인데, 만약 ‘친박-친노’의 구도로 선거가 전개된다면 이는 필패 구도”라며 “물론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바보 노무현’처럼 원칙과 상식을 갖고 끝까지 정면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친노-친박-친이 양산 재선거, 2010 전초전반면 보수 진영 후보가 2008년 총선과 지난 4월 경주 재선거 때처럼 친이와 친박 후보로 각각 출마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 선거는 친이와 친박, 그리고 친노 후보의 3자 대결이 된다. 친노 그룹으로서는 ‘친박-친노’의 싸움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오는 10월 경남 양산에서 치러지는 국회의원 재선거는 2010년 PK 지방선거의 전초전이 될 전망이다. 선거전은 일단 친노와 친박, 그리고 친이 후보의 각축전으로 시작됐다. 친노 그룹에서 송인배 전 청와대 비서관이 사실상 출마를 선언했고, 친박 진영에서 유재명 한국해양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친이 그룹에서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출마가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친박연대 엄호성 정책위의장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관건은 난립하고 있는 한나라당 성향 후보 사이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다. 박 전 대표가 특정 후보에 대해 명확한 지지 의사를 나타내지 않을 경우, 친노 바람을 탄 송 전 비서관이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평가다. 반면 박 전 대표가 친박 후보나 한나라당 후보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때부터 친노와 친박의 ‘영남대전’이 시작된다. 영남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영남 민주화 세력인 친노 후보는 비주류일 수밖에 없지만, 일단 바람이 몰아치면 그때부터는 알 수 없는 것이 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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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안팎에서는 이 가운데 한명숙 전 총리의 출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온화하면서도 합리적 조정자 이미지를 가진 한 전 총리는 민주당 후보가 표를 얻기 어려운 중·장년층 유권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카드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한 전 총리는 한나라당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편이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초선 의원은 “유시민 전 장관은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는 한계가 있지만, 한명숙 전 총리는 연령과 계층에 관계없이 두루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눈물의 조사를 낭독할 때는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라고 말했다.
유시민 전 장관은 대구시장 후보로도 꼽히고 있지만, 반대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당락을 떠나 출마 자체가 고행인 대구시장 자리에 유 전 장관의 출마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사지로 밀어넣으려는 의도라는 주장이다. 친노 핵심 관계자는 “대구시장 선거에 나서는 것은 대구에서 총선 출마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며 “유 전 장관을 막연히 대구시장 후보로 거론하는 것은 영원히 중앙 정치 무대를 떠나라는 이야기와 같다”고 말했다. 유 전 장관 쪽은 내년 초까지 정치적 행보로 해석될 움직임은 자제하겠다는 태도다.
그 밖에 친노 그룹의 대구시장 후보로는 2006년 대구시장 선거에 나섰던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과 윤덕홍 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친노 인사 가운데 가장 뚜렷한 행보를 보이는 사람은 오히려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다. 정 전 수석은 7월15일 조영택·김동철 의원 등 민주당 내 광주 출신 국회의원들과 두루 접촉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를 마친 뒤 지역 출신 의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광주시장 출마를 염두에 둔 행보라는 해석이다.
부산=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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