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뉴민주당 플랜’ 발표가 임박한 가운데, 이 ‘뉴민주당 선언’ 전문을 입수했다. 이 확보한 선언은 뉴민주당 플랜의 구체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분량은 목차 한 쪽을 포함해 모두 17쪽으로 구성돼 있다. 참고로 ‘뉴민주당 플랜’을 주도하는 김효석 의원(뉴민주당 비전위원회 위원장)은 5월7일 인터뷰에서 “(선언 분량은) 16~17쪽 분량 정도로 예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세균 대표(왼쪽 두 번째)가 지난해 7월 추진을 선언한 뉴민주당 플랜 발표가 임박했다. <한겨레21>이 입수한 17쪽짜리 ‘뉴민주당 선언’(오른쪽)은 ‘지속 가능한 성장, 모두를 위한 번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민주당은 뉴민주당 선언을 통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제3의 발전모델’로 사회 양극화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민주당이 뉴민주당 플랜을 고민하게 된 계기는 2007년 대선과 지난해 총선에서의 참패였다. 이후 지난해 7월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세균 대표는 뉴민주당 플랜의 공식 추진을 선언하며 ‘뉴민주당 비전위원회’를 만들었다. 비전위원회가 지난 1년간 고민과 논의를 거듭한 결과가 선언으로 나타난 셈이다.
민주당은 5월19일 국회의원을 포함한 전국 지역위원장 회의에서 최종 의견 수렴을 거친 뒤 선언과 뉴민주당 플랜을 발표할 계획이다. 뉴민주당 비전위원회 관계자는 “비전위원회에서 최근 뉴민주당 선언을 확정해 당에 보고했다”며 “당 최고위원회의 논의 등을 지켜봐야겠지만 며칠 사이에 선언의 핵심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민주당 플랜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평가는 일단 긍정적이다. 주요 정당이 위원회와 당내 구성원의 일정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노선, 비전을 선언 형태로 발표한다는 시도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정치학 박사)은 “정당의 강령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으로부터 공적 권력을 위임받으려는 정당의 당연한 책무지만, 과거 야당은 민주화 요구, 권위주의 체제 극복을 통한 정권교체 요구 등 시대적 과제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강했다”며 “민주당이 선언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정당인지 선명하게 밝히겠다는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선언 내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선언은 ‘지속 가능한 성장, 모두를 위한 번영’이라는 제목 아래 모두 5장으로 구성돼 있다. ‘제1장-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에서는 국가 발전전략으로 ‘새로운 진보-신중도개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선언은 ‘새로운 진보’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새로운 진보는 글로벌 경쟁과 지식정보라는 새로운 세계경제의 도전에 대처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 경제의 시대적 과제가 되어버린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진보는 변화와 개혁을 중시하는 진보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이러한 시대정신을 투영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 새로운 진보의 길은 신중도개혁의 길이기도 하다. 신중도개혁의 길은 중도개혁의 합리적 핵심은 보존하되 세계화의 강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라는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노선이다.”
세계화 수용 전제로 양극화 대처 주장새로운 진보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두 개의 열쇳말은 ‘세계화’와 ‘양극화’다. 선언은 “세계화로 인한 무한경쟁과 지식정보화로 인하여 일자리 창출과 사람에 대한 투자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됐다”며 세계화와 지식정보화를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세계화와 글로벌 무한경쟁은 혁신과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에서는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며 세계화와 복지국가 강화를 이중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선언은 양극화 심화를 ‘정치의 실패’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주된 표적은 한나라당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중산층과 서민의 살림이 갈수록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철 지난 토건국가 모델과 이미 시험대에 오른 시장만능주의를 앞세워 우리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통치로 일관해 지난 20여 년간 민주화의 성과마저도 후퇴시키고 있다.”
선언이 이에 대한 해법으로 내놓은 것은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즉각적인 구제’다. 선언은 “민주당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진보의 핵심 과제는 다름 아닌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즉각적인, 그리고 포괄적인 구제라고 우리는 믿는다”고 말했다.
중산층과 서민 구제를 통한 양극화 해소라는 정책 방향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반면 세계화와 지식정보화, 지식경제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주한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제조업 기반이 강한 일본과 독일의 사례가 있음에도 탈산업화가 이미 완료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논리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예컨대 선언은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제3의 발전모델’, 즉 새로운 진보의 비전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 모두를 위한 번영’(Sustainable Growth, Prosperity for All)을 제시했다. 선언이 말한 지속 가능한 성장이란 노동자와 서민이 더 많은 성장의 지분을 누리는 것으로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 통해 민생이 나아지는 경제’를 뜻한다. 이처럼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면서, 제조업 강화가 아니라 지식경제로의 이행을 당연시하는 것은 자칫 앞뒤가 맞지 않는 공허한 이데올로기로 들릴 수 있다.
중산층·서민 즉각적 구제 주장하지만…당면한 현실에 대한 피상적 이해는 선언의 ‘반성과 교훈’ 항목에서도 드러난다. 선언은 “민주당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 뒤 2007년 대선과 지난해 총선 패배의 원인을 내부로 돌렸다. “참패의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동반 성장과 양극화 극복, 지역균형 발전 등 참여정부와 민주화 세력이 표방한 기본 가치와 정책목표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수단은 유효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양극화 심화 등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지난 10년간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투항한 데 있다”며 “그럼에도 반성한다면서 한편으로 ‘산업화를 넘어 지식경제 시대로 접어들었다’ ‘분배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겠다’고 한다면 반성이 아니라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모두를 위한 번영’도 논쟁이 불가피한 부분이다. 선언은 “모두를 위한 번영은 민주적 시장경제(democratic market economy)하에서 이뤄진다”며 “민주적 시장경제하에서 노동자는 성장에 대해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역시 ‘말의 성찬’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성장의 과실을 대기업이 독점해온 것이 현실인데, 한편으로 “대기업을 적대시하지 않겠다”며 “노동자가 성장의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면, 선언 스스로 반성한 것처럼 ‘유효한 정책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언에서는 뉴민주당의 3대 가치도 제시하고 있다. 선언은 “진보의 전통적 가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회(Opportunity), 정의(Justice), 공동체(Community)를 뉴민주당의 가치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민주당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정의’ ‘함께 사는 공동체’로 재정립하고자 한다.”
선언을 보면 ‘더 많은 기회’는 보수주의의 ‘소수만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기회의 확대’를 뜻한다. 이를 위해 선언은 자율적으로 균등한 기회를 창출하지 못하는 시장경제 대신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다.
선언이 ‘더 높은 정의’를 통해 “개인과 집단이 성, 장애, 연령, 인종, 지역, 종교, 신념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고 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지향할 것”이라고 밝힌 부분은 그동안 주류 정당이 주목하지 않았던 다원적 가치를 골고루 포착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선언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이 초안이 무익한 좌우 논쟁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속 가능한 성장, 모두를 위한 번영의 길’로 전진시키는 현대적 해법을 창조하는 과정이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며 끝맺었다.
선언의 기대와 달리 뉴민주당 플랜에 대한 민주당 내부의 논란은 이미 점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당 비주류 모임인 ‘민주연대’ 소속 이종걸 의원은 “지도부가 추진 중인 뉴민주당 플랜이 새로운 진보라는 미명하에 ‘당의 우경화’를 재촉하는 위장술이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당 원로 가운데 일부에서는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중도우파까지 포용할 수 있는 당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진보’라는 표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당 우경화 위장술 돼선 안 될 것” 지적하지만 정작 선언을 보면 뚜렷하게 좌우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양쪽 이념을 현란하게 넘나들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해법을 강조할 때는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주의에 대한 지배적 담론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시도는 자칫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선언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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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석 의원. 사진 한겨레 강재훈 기자
-‘뉴민주당’과 ‘구민주당’은 어떻게 다른가.
=‘구민주당’을 버리고 간다는 개념이 아니다. 민주당이 그동안 지켜왔던 민주·평화·개혁의 가치와 역사는 이어가되, 다만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없으니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가치와 개념을 정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민주당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뉴민주당을 구민주당과 대립 개념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다.
-‘뉴민주당 선언’을 통해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뛰어넘겠다고 했다. 선언이 말하는 진보와 좌파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자꾸 ‘뉴민주당이 과거 민주당에 비해 우향우냐 좌향좌냐’를 묻는다.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개념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도 정의가 변한다. 굳이 과거 개념으로 말하더라도 뉴민주당의 길은 어느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 분야는 민주정부 10년간 기반을 다져왔지만 새로운 시대는 더 폭넓은 사회복지와 사회투자를 요구한다. 그러면 더 늘리자는 것이다. 반면 지속 가능한 성장과 경쟁의 효율도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좌우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논쟁이다. 이제는 정책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가치가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는데도, ‘좌와 우를 뛰어넘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진보와 좌파가 낙인으로 통하는 현실에 굴복한 것 아닌가.
=진보 정당이라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진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민생의 관점에서 보수적 가치도 필요하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진보 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국제 경쟁을 위해 이념을 뛰어넘어 실용적 접근을 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개방해야 한다거나, 세계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끝난 문제라고 보나.
=그게 차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개방 자체에 반대한다. 민주당은 국익을 위해 파이를 키울 수 있다면, 그리고 피해 계층에 대해 충분한 대책이 마련될 수만 있다면, 과감하게 개방해야 한다고 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만 해도 민주노동당은 그 자체에 반대하지만, 우리는 국익의 관점에서 미국보다 먼저 비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피해 농어민에 대한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한다. 반대 이유가 다르다.
-뉴민주당이 성장주의를 표방하는 동시에 개방에도 적극적이라면 한나라당과 다른 건 뭔가.
=보수 정당은 파이를 키우는 데 관심이 있고, 진보 정당은 파이를 나누는 데 관심이 있다는 식의 구도로는 필패다. 우리는 국민 모두를 위한 번영을 지향해야 한다. 파이 전체를 키우되, 한나라당처럼 특권층에게만 과실이 돌아가는 성장은 지양한다. 우리가 말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란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언의 핵심은 결국 ‘모두 잘살게 해주겠다’는 건데, 너무 두루뭉술한 것 아닌가.
=중산층과 서민을 기반으로 하지만 부자와 대기업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번영’이란 표현을 썼다. 참여정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당시 일부 정책이 마치 대기업과 부자에 대한 징벌적 정책으로 인식됐다. 히스토리가 담긴 표현인 셈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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