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이명박계 의원들이 지난해 말 ‘1차 입법전쟁’에서 ‘학습’을 많이 한 것 같다. 앞으로도 쟁점법안을 처리할 땐 대통령과 계파 의원들이 나서 국회의장을 압박해 여야 합의를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다. 2월 임시국회 폐회는 입법전쟁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의 한 고참 보좌관은 ‘협박 정치’로 얼룩진 2월 임시국회를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2월 본회의장 점거농성이라는 민주당의 초강수에 밀려 언론 관련법 등의 강행 처리에 발목이 잡혔던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이번엔 김형오 국회의장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목적을 거의 달성할 뻔했다는 얘기다.
임시국회가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김 의장은 여야가 쟁점법안을 협의해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 김 의장이 강경한 태도로 돌아선 것은 2월26일이었다. 그는 이날 성명을 내 “국회의장은 대화와 타협이 더 진전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안이라면 국회법에 따라 처리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며 쟁점법안 직권상정을 시사했다. 이 성명은 이명박 대통령이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건 뒤 발표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학 국회의장 정무수석은 “가끔 하는 안부전화였지, 별다른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정무수석을 비롯해 실무자들이 있는데, 두 분이 업무적인 얘기를 하겠느냐”며 통화의 의미를 축소했다. 하지만 김 의장이 한나라당의 직권상정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1차 입법전쟁 땐 ‘안부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대통령의 전화가 김 의장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게 하는 대목이다.
김 의장은 2월27일에도 “여야 협상 중인데 언론 관련법을 (직권상정) 한다, 안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나는 안 한다고 한 적이 없다. 언론 관련법을 (직권상정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아예 틀린 이야기다”라고 한 발 더 나아갔다. 당시 언론 관계법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는 “여당이 지리멸렬해서는 안 된다. 강하게 가자”는 이 대통령 친형 이상득 의원의 채근에 한나라당 소속인 고흥길 위원장이 관련법을 기습 상정함에 따라 민주당이 점거농성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때까진 김 의장이 여야 합의 처리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줄다리기 협상 끝에 3월2일 새벽 의견 접근을 본 것은 언론 관련법 6월 처리를 핵심으로 하는 김 의장의 중재안 덕분이었다.
박근혜 절묘한 개입으로 또 전리품하지만 중재안 소식을 들은 한나라당 이명박계 의원들의 무차별 공세에 김 의장은 무릎을 꺾고 말았다. 이날 새벽 국회 로텐더홀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던 한나라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었고, 이명박계 의원들은 “미디어법을 뒤로 미루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발목을 잡는 좌파세력의 장을 끝없이 벌여주겠다는 것과 같다” “김 의장이 개인 욕심 때문에 한나라당을 볼모로 잡고 있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심재철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의장이 쟁점법안 처리를 미룬다면 의장의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이날 의총장에서 터져나온 ‘김형오 탄핵론’을 대변하기도 했다.
결국 김 의장은 이날 오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한나라당 지도부를 만나 “직권상정 수순을 밟겠다”고 ‘투항’하고 말았다. 오후엔 언론 관련법을 포함한 15개 법안을 직권상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결과적으로는 중재안이 수용됐지만, 청와대와 강경파들의 완력에 의장이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 상황까지 가지 않았느냐”며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카드로 야당을 협박해선 안 되는데, 대통령과 이명박계 의원들이 일방적으로 ‘속도전’을 밀어붙이는 통에 김 의장이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김 의장이 안팎으로 시달리는 사이 어부지리를 한 사람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였다. 박 전 대표는 2월27일만 해도 “지난번에 분명히 이야기했다”며 언론 관계법 처리에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1월5일 당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 다섯 달여 만에 참석해 “한나라당이 내놓은 법안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점이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3월2일 오전엔 “무한정 (언론 관련법) 처리 시기를 늦출 수는 없지 않느냐. 처리 시기를 못박는 것 정도는 야당이 받아줄 수 있다고 본다”며 민주당에 김 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이미 김 의장이 여야 협상이 최종 결렬된 것으로 간주하고 한나라당 지도부에 직권상정 뜻을 밝힌 뒤였지만, 박 전 대표의 말은 여야 모두에게 적지 않은 압박이 됐다. 당 내부적으론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에 부정적이던 박근혜계 의원들이 ‘딴소리’를 못하도록 단속하는 효과가 있었다. 언론 관계법 처리를 100일 늦추는 데 여야가 합의한 뒤엔 그의 정치력이 파국 직전의 국회를 구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상득 의원도 “박 전 대표가 역할을 잘했다”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중재안을 마련했던 김 의장은 △2월27일 본회의 취소 △민주당 국회의원·보좌진 출입통제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회동 등을 이유로 3월5일 민주당으로부터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당했다.
여야는 일단 언론 관계법 처리에 100일이란 완충적 시간을 벌었지만, 이는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여야가 간신히 합의한 ‘사회적 논의기구’의 구성과 역할 규정을 둘러싼 이견은 차치하고라도, ‘일자리 창출’과 ‘언론 장악 기도’라는 여야의 근본적인 시각 차이는 쉽게 좁혀지기 어려운 탓이다. 이 때문에 “6월 임시국회는 ‘3차 입법전쟁’이 될 것”이라는 말도 벌써부터 나돈다. 논의 상황에 따라선 대규모 추가경정 예산안 처리가 예정된 4월 임시국회도 파행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수도권의 한 한나라당 초선 의원은 “큰 틀에서 합의가 있었지만, 세부 논의 과정에서 어느 쪽이든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4·6월 임시국회 모두 쉽지 않다”고 말했다.
‘탈여의도’ 아닌 ‘피여의도’가 문제청와대와 한나라당 사정에 밝은 한나라당 인사는 이렇게 진단했다. “이런 현상은 대통령의 ‘탈(脫)여의도’가 아니라 ‘피(避)여의도’에서 비롯됐다. ‘탈여의도’는 정당 모리배의 행태를 벗어난 초당적인 통치력을 뜻하지만, ‘피여의도’는 의회 민주주의 자체를 피하고 무시하려는 태도다. 대통령이 정당끼리의 타협,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인정하지 않으니 공식적인 당 지도부가 쟁점법안 하나도 조정 못하고, 국회의장은 이를 핑계 삼아 ‘자기 정치’를 하려 드는 거다. 또 이상득 의원 같은 비선권력, 박근혜 전 대표 같은 미래권력이 판도를 좌우하게 되는 거다. 국회 안에선 똑같은 결정권을 가진 의원인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대통령이 청와대와 국회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2월 임시국회가 보여준 ‘대통령의 유·무형의 요구 → 한나라당 이명박계 의원들의 압박 → 국회의장·원내 지도부 무력화 → 여야 대화 중단·격돌’ 과정이 앞으로 쟁점법안을 처리할 때마다 반복될 것이라는 근본적인 우려인 셈이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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