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달아오르고 있다. 불씨를 댕긴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9월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할 때가 됐다”며 행정구역 개편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어 9월25일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의 회담에서도, 10월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그는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사이(10월7일) 정부도 행정구역 개편을 ‘이명박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끼워넣었다.
민주당과 달리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 소극적이던 한나라당도 움직이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대통령의 국회 연설 하루 뒤 홍 원내대표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정식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한나라당에서는 11월 초 권경석 의원이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할 예정이다. 시·군·구 통합을 통한 행정구역 광역화와 도의 기능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법안이다. 권 의원은 10월24일 “현재 20명 안팎의 동료 의원들의 동의를 받아 법안 발의 요건을 채웠다”며 “행정구역 개편은 그동안 논의만 무성하고 실체가 없었는데, 이번 특별법을 단서로 좀더 구체적인 토론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한나라당 안에서는 이를 권 의원의 ‘단독 플레이’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행정구역 개편 논의는 이제 비등점을 향해 달아오르는 형국이다.
행정구역 개편은 사실 ‘대한민국 대개조’를 의미한다. 예컨대 논의 결과에 따라 충청·전라·제주가 ‘충전주’로 묶일 수도 있고, 경기와 강원이 ‘경강주’로 바뀔 수도 있다. 경북 김천과 구미, 군위가 하나의 광역시로 묶이는 등 230개 기초자치단체가 40~70개 광역시 체제로 전환될 수도 있다.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할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택하든 극심한 논란은 불가피하다. 행정수도 이전이 충청권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다면, 행정구역 개편은 전국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핵폭탄을 쏟아붓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목진휴 국민대 교수(행정학)는 “가령 서울에서 두 개의 기초자치단체를 하나로 뭉친다고 했을 때 구청장 자리가 하나 없어지는 것인데 당사자들부터 이를 수용하겠느냐”며 “정부·여당이 (행정구역 개편의) 뚜껑은 열 수 있겠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개인과 집단이 워낙 많아 만만치 않은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금 그 뚜껑을 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홍준표 원내대표는 “내년 상반기에는 합의점을 찾아 결과를 낳도록 하겠다”고 했다(10월27일). 뚜껑을 거침없이 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빨리 열겠다는 말이다. 이슈의 폭발력을 감안한다면 이례적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그동안 행정구역 개편에 대해 보여왔던 태도를 염두에 두더라도 이례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전국을 7대 광역경제권으로 묶는다는 이른바 ‘5+2 창조적 광역발전’ 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광역경제권은 경제 분야에 초점을 맞춘 반면, 행정구역 개편은 경제뿐만 아니라 지방행정과 자치 사무의 문제 등을 포괄하는 사안이라 인수위에서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했다”며 “선거구제 문제와 개헌까지 연계돼 있어 단기간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에는 행정안전부에서 대통령 업무 보고를 앞두고 16개 광역자치단체와 230개 기초자치단체를 40~70개 광역시로 바꾸는 안이 마련됐지만,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자 행정안전부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일축했다. 실무진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이해관계 얽혀 합의 도출 쉽지 않아한나라당도 마찬가지였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과 달리 박희태 당 대표는 지난 9월 행정구역 개편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내에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당론도 없고 허태열 최고위원과 권경석·이달곤·이은재 의원 등 몇몇을 제외하면 관심도 별로 없다. 허 최고위원은 지난 17대 국회에서 지방행정체제 개편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초선의 이달곤 의원은 행정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나라당은 행정체제 개편이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견인하게 될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달곤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행정구역 개편 논의를 선거구제 개편과 연계하는 사람은 없다”며 “(개인적으로도) 선거구제 개편 논의까지 끌어들이면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일각에서 행정구역 개편 논의의 고삐를 당기는 모습은 개헌 논의가 급격히 가라앉는 것과 대조적이다. 실제로 개헌 논의를 활발히 주도해온 김형오 국회의장은 최근 갑자기 “참 말을 많이 하고 싶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니 만큼 최대한 말을 줄이겠다”며 개헌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개헌에 대한 김 의장의 태도 변화가 나타난 시점은 이명박 대통령이 행정구역 개편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직후인 10월 중순이었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에 대해 “청와대가 개헌과 행정구역 개편 가운데 후자 쪽으로 교통정리를 한 것 아니겠느냐”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대통령 자신의 조기 레임덕을 불러올 수 있는 개헌을 뒤로 미루는 대신 행정구역 개편을 ‘역점 사업’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행정구역 개편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에 대해 정치권 안팎에서는 여러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요약하면 총론은 동의하지만 각론은 다르고, 그보다 의도가 대체 뭐냐는 것이다. 물론 전국시·도지사협의회와 지방행정학회, 그리고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개편 논의 자체에도 반대하고 있다.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쪽에서는 각종 규제 개혁과 공기업 선진화 등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들이 결실을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위기마저 심화되는 상황에서 불쑥 행정구역 개편론을 꺼내놓는 모양새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가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게다가 논의 구조에 대한 합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경제 실정에 대한 책임론을 피하기 위해 국민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밀어붙이기 배경 놓고 설왕설래반면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는 “슬쩍 국정과제에 끼워넣고 불을 지피는 모양새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처럼 거대한 동력이 필요한 국가적 과제는 임기 초에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내년만 하더라도 4월과 10월에 재·보궐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어서 말을 꺼내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관건은 야당의 대응이다. 사실 그동안 행정구역 개편 논의를 주도해온 쪽은 민주당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자 오히려 주춤하고 있다. 최재성 의원은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입장은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의원 개개인마다 완전히 엇갈릴 텐데,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방행정체제개편특위 간사를 맡고 있는 우윤근 의원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의지를 보이는 것 같은데, 과연 순수한 의도로 (논의를) 해줄 것인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일단 경계 모드이기는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은 민주당에 너무나 달콤한 열매다. 행정구역 개편과 맞물리는 선거구제 개편(중·대 선거구제 도입)은 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철저히 무시했던 것과 달리 민주당으로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을 일축하기 쉽지 않다. 물론 한나라당이 선거구제 개편이라는 당근까지 내놓았을 때의 이야기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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