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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리더십 석 달 만에 비틀

여당 독주 대응 못하고 청와대 회담 ‘밋밋’… “대권 의식 행보냐” 안팎서 비판
등록 2008-10-10 17:56 수정 2020-05-03 04:25

10월1일 오전 국회에서 만난 이목희 전 민주당 의원은 전날 열린 ‘민주연대’ 발기인대회를 복기했다. 그는 민주당 지지율 정체의 1차적 책임이 정세균 대표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어제도 봤겠지만 정 대표는 메시지 전달 방식과 표현에 문제가 있습니다. 야당 지도자라면 대중의 언어로 강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가뜩이나 당에 보수적인 의원들이 많은데, 대표도 두루뭉술하니까 거기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하루 전인 9월30일,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정 대표는 2분 안팎의 축사를 하면서 ‘변화’라는 표현을 십여 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런데 정 대표가 변화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변화를 통해서 과거의 부족함을 깨고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평가해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던진 메시지였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독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맨 왼쪽)가 9월3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민주연대는 앞으로 당내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정세균 민주당 대표(맨 왼쪽)가 9월3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민주연대는 앞으로 당내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서도 ‘엇박자’

반면 뒤이어 등장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투쟁’을 강조했다.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민간 독재정권’으로 규정한 김 전 장관은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노트북을 두드리던 기자들의 손놀림은 한층 바빠졌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던 정 대표와 달리 김 전 장관의 표정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민주당 내 개혁 성향의 전·현직 의원들이 모인 이날 행사에서 정세균 대표는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정세균 리더십이 출범 석 달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언론 장악 시도와 공안정국 조성, 종합부동산세 완화안 강행 등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방송 사태는 결국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과 이병순 사장 임명, 그리고 뒤이은 인사보복으로 마무리됐다. 낙하산을 타고 YTN에 착륙한 구본홍 사장은 여전히 노조원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고,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조계사에 갇혀 있지만 정세균호 민주당은 무기력한 상태다.

진보개혁 진영의 분노를 촉발한 결정적 계기는 9월25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대표의 청와대 회담이었다. 회담을 마치자마자 정 대표 쪽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회담 결과 브리핑에 나선 최재성 대변인은 “통상의 영수회담과는 다르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진행했다”며 “오늘 영수회담에서는 의미 있는 합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종부세와 지역균형발전 문제 등에 대해서는 “철학적 차이를 확인했다”는 ‘철학적 멘트’로 대신했다.

회담 결과에 대해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투 굿 투 비 트루”(too good to be true)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뜻이다. 보수 언론들도 회담 결과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는 정 대표가 합리적 야당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소개했고, 는 두 사람의 회동을 역사상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청와대 회담에 비유했다. 는 아예 “정 대표 영수 회담으로 떴다”고 했다.

청와대선 극찬하고 개혁 진영선 싸늘

문제는 정세균 대표의 부드러운 리더십에 대한 진보개혁 진영의 시선이 싸늘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와대 회담 전후로 ‘정세균 체제 회의론’이 급격히 고개를 들고 있다. 야당 지도자로서는 부적절하다고 평가받는 정 대표의 스타일뿐만 아니라 전략의 부재, 모호한 정체성 등 비판이 제기되는 지점도 한두 곳이 아니다.

초선의 최문순 의원은 10월2일 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것부터 잘못”이라고 말했다. “언론 장악 시도와 공안정국 조성 등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하는 일에 제대로 제동을 걸지도 못하면서 영수회담을 가진 것이 잘못입니다. 아직도 당이 여당 시절의 티를 못 벗고 있으니 국민과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대표가 합의했다는 8개 합의안도 진보개혁 진영의 박수를 받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특히 최재성 대변인은 회담 하루 뒤 추가 브리핑 형식으로 미분양 아파트 25만 채 구제 방안에 대해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분양 아파트 구제는 결국 건설업체만을 위한 정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당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미분양 아파트 구제안을 야당 대표가 먼저 제안한 것도 문제지만, 합의가 불가피했더라도 분양가 인하 등 건설업체의 과도한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적절한 공익적 규제 도입을 요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담에서 정 대표가 보여준 ‘부드러운 리더십’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정 대표가 지나치게 일찍 대권을 의식하고 있다는 평가다. 정치컨설팅업체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정 대표의 최근 움직임을 대권 행보로 보고 있다.

“(정 대표는) 반대만 하는 야당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적 지도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민주당의 현재 위치와 역량을 오판한 결과죠. 현재의 민주당 역량이라면 야당다운 야당 노릇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정 대표는 비판과 견제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협조도 하고 본인의 위상을 강화하려니 어느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9월25일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정세균 대표가 회담을 가졌다. 회담 직후 정 대표의 유약한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올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9월25일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정세균 대표가 회담을 가졌다. 회담 직후 정 대표의 유약한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올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규모 특보단 면면도 도마 위 올라

정 대표는 최근 민주당 원내외 인사 21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특보단도 꾸렸다. 특보단에는 단장을 맡고 있는 전병헌 의원을 비롯해 김춘진·우제창 의원과 노웅래, 노현송, 전해철 등 각 지역위원장이 포함돼 있다. 비슷한 시기에 꾸려진 ‘2010인재위원회’와 ‘뉴민주당비전위원회’ 등도 정 대표가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당 조직이다. 모두 정 대표의 대권 행보와 함께 거론되는 그룹들이다.

정세균 체제에 쏟아지는 비판 가운데 전략 부재와 정체성 혼란 등에 대한 책임은 정 대표를 둘러싸고 있는 측근 그룹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 대표는 7월6일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전병헌·최재성·강기정·윤호중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 이들은 전대 이후에 고스란히 당의 요직을 차지했다. 강기정 의원은 비서실장을 맡았고 최재성·윤호중 의원은 각각 대변인과 전략기획실장에 임명됐다.

특히 이 가운데 대표 특보단장을 맡고 있는 전병헌 의원은 청와대 회담 과정에서 당의 정조위원회 등 공식 라인을 제치고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 등과 회담 의제를 직접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핵심 관계자는 “특보단을 가동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특보단장에는 가치관과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을 앉혀야 했다”며 “대표 본인의 성향이 무색무취하다면 특보단장 등 주변에서 대표를 보좌하는 측근 그룹이 제대로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구실을 전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민주당 안에서 비교적 ‘오른쪽’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 열광적으로 환영받고 있는 정 대표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스스로 대권을 의식한 것이든, 측근 그룹에서 비롯된 정체성 혼란 때문이든, 분명한 것은 민주당이 점점 진보개혁 진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와대 회담 직후 정세균 체제에 대한 당 안팎의 비난이 쏟아지자 민주당은 10월1일 국회에서 부랴부랴 종부세 개악저지 결의대회를 열었다. 애초 계획은 민주당의 전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 당직자를 모아 대규모 결의대회를 연 뒤 여의도역으로 이동해 서명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18대 국회가 개원한 뒤 지역위원장 전원에게 ‘필참’(반드시 참석) 통보를 내린 행사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날 행사 일정은 결의대회만 열고 마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축소됐다. 지역위원장과 당원들은 상당수 참석했지만 국회에서 열린 행사임에도 현역 의원들이 절반 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시간에 맞춰서 나타난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민주당 사무처 당직자는 “정 대표가 각 방송사 카메라 기자들과 오찬 약속이 있는데 여의도역에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일정이 안 맞을 것 같아 여의도역 서명운동은 취소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한 지역에서 올라온 지역위원장은 행사장 밖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당 지도부와 중앙당의 타성을 꼬집었다. “지금 민주당은 국민의 사랑은 고사하고 당원들의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나도 오늘 새벽까지 올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하다가 와봤는데, 당원들이 애당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지도부와 중앙당이.”

73살 당원 “이렇게 유약한 당은 처음”

그 바로 옆 자리에 있던 73살의 당원 이춘국씨 역시 한나라당의 이념 공세에 변변히 대응하지 못하는 민주당 지도부를 성토했다. 이씨는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국민을 좌파와 우파로 갈라 이념전을 하자는 것인데, 민주당이 자꾸 피해다니기만 한다”며 “우리는 자유당과 공화당 시절의 탄압도 이겨냈는데, 지금 민주당은 너무 유약하다”고 말했다.

정세균 체제를 바라보는 당 안팎의 시선은 냉랭하지만 딱히 대안이 없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선 정 대표를 대체할 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 회담 직후 이종걸·추미애·최문순 의원 등이 지도부의 ’야성 부족’을 질타했다가 곧 잠잠해진 것도 이같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유비쿼터스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원우 의원은 “7월6일 출범해서 이제 3개월째 됐는데, 그동안 많은 혼란을 겪었던 민주당이 이제 안정 단계에 접어드는 것으로 이해했으면 한다”며 “무조건적 비판보다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오른팔 전병헌이 정 대표 오른쪽 견인

전병헌 민주당 의원. 한겨레 강창광 기자

전병헌 민주당 의원. 한겨레 강창광 기자

전병헌 민주당 의원이 정세균 대표의 최측근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1958년생인 전 의원은 1950년생인 정 대표와 고려대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은 2003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에서 각각 의장과 상임부의장을 맡으며 가까워졌다. 지난 7월6일 전당대회 이전에도 전 의원은 거의 매일 정 대표와 만나 경선 전략을 논의했다.
전 의원은 전대 이후 당 전략기획위원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9월24일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대표 특보단을 이끄는 쪽을 선택했다. 9월25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 성격과 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도 전 의원이었다. 회담 직전 정 대표 측근 그룹에서는 ‘타협’과 ‘강경’ 노선을 놓고 치열한 격론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강기정 대표 비서실장과 최재성 대변인 등은 영수회담 기조를 강경하게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전 의원은 거의 유일하게 온건 노선을 고집했다. 정 대표의 선택은 후자였다. 영수회담에서 채택된 8개 합의문 내용을 청와대 맹형규 정무수석과 만나 막후에서 조율한 것도 전 의원이었다.

전 의원이 정 대표 측근 그룹의 ‘실세’로 떠오르면서 당내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보수적 성향의 전 의원이 정 대표를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견인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실제로 전 의원은 촛불정국 당시 민주당의 장외투쟁 방침에 반발해 국회 등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같은 성향의 전 의원은 소속 상임위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에서 같은 당 소속 위원들과 엇박자를 내기도 한다. 애초 민주당에서는 국정감사 일정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불러야 할 증인이 많기 때문에 각각 이틀씩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증인 신청과 관련해서도 한나라당이 신청하겠다고 밝힌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과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최민희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등은 참여정부를 흠집내기에 활용될 것으로 판단하고 저지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문방위 민주당 간사인 전 의원은 간사 협의 과정에서 문광부와 방통위 일정은 각각 하루씩, 그리고 김 전 처장과 정 전 사장의 증인 채택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내에서 어이없다는 반응이 나온 것은 물론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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