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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을 너무 비민주적으로 장악하면…”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총선 공천 문제로 시끄러운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에게 듣는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각

▣ 글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한나라당 잔칫집이 ‘공천’이란 단어로 시끄럽다. 기쁨은 한나라당인 모두의 것이 아니다. 4월9일 총선에 걸린 이해가 조금씩 다른 탓이다. 이해가 다른 두 그룹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쪽과 박근혜 전 당대표 쪽이다. 쉽게 정리하면 이 당선인 쪽은 공천을 늦추자는 것이고, 박 전 대표 쪽은 늦출 것 없이 애초 일정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공천, 그것도 시기를 둘러싼 단순한 갈등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한나라당을 누가 주도해,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는 문제가 깔려 있다. 이 당선인 쪽에선 이명박 정부와 보조를 잘 맞출 수 있는 한나라당, 더 나아가 그런 당이 지배하는 의회를 원한다. 당내 경선의 패자로서 박 전 대표 쪽은 생사가 걸렸다. 여기에 ‘고급스럽게’ 당내 민주주의, 의회와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 등 다양한 문제들이 섞여 있다. 이 당선인과 박 전 대표가 지난해 12월29일 만났으나, 해결된 건 없이 되레 갈등만 커졌다.

1월4일 박 전 대표의 ‘입’이라 할 수 있는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을 만났다. 그를 통해 공천 갈등 등을 둘러싼 박 전 대표의 생각을 들어봤다.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국민들 처지에선 공천 시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공천은 중요하다. 중요하기 때문에 시기 문제도 맞물릴 수밖에 없다.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공천은 또 박 전 대표가 애착을 갖고 있는 정당 개혁 및 정치 개혁과 맞물려 있다. 공천은 한나라당이 어떻게 되고, 국회가 어떻게 되느냐를 좌우한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도 후보등록일인 3월25일까지 두 달밖에 안 남았다. 여론조사, 도덕성 및 전문성 검증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공천을 둘러싼 갈등의 본질은 지분 다툼이 아닌가?

=오늘 이 당선인 쪽에서 ‘공천은 어차피 전쟁’이란 표현을 썼다는데 이런 표현들이 계파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승자, 패자를 나눠선 안 된다. 경선에서 져서 불이익을 받고, 이기면 이익을 받는다면 앞으로 당내 경선은 절대 못한다.

총리 인준 등 몇 가지 정치 일정상 공천을 늦출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다. 총선 한 달 전에 후보를 정하겠다는 건 국민을 우습게 아는 거다. 대선에서 이겼으니 총선에서도 이긴다는 오만한 발상이다. 국민도 한나라당 후보가 누군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또 한나라당 외 다른 정당의 의석 수가 170석이다. 어차피 다른 정당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2월 말 대통령 취임 전에 하겠다는 총리, 장관 임명 동의안이나 정부조직법 개편안의 국회 통과가 어렵다. 그 이후에 공천하자는 건 공천 못 받은 의원이 국회에 투표하러 안 오거나, 반대표를 행사할지 모른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그런데 내가 공천 안 받았다고 해서 옹졸하게 처신해 반대하겠나?

공천 시기를 늦추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공천이란 방대한 작업을 미룬다는 건, 누군가 어디 숨어서 비선 조직을 통해 밀실 공천을 다 해놓고, 당의 공천심사위원회는 나중에 들러리만 선다는 거다. 당선인 측근 인사 몇몇이 모여서 공천 지원자 이름 옆에 동그라미, 세모, 가위 표를 하지 않겠냐는 의혹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거다. 밀실 공천으로 자기 식구, 자기 사람 공천해서 되겠는가?

이 당선인 쪽에서 이명박 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재편을 원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여당이면 대통령 취임 이후 행정부에 협력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구조가 돼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 여당이 거수기처럼 100% 따라가는 건, 망하는 지름길이다. 행정부가 잘못 가면 질책하고 여당 내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자정 및 정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잘못 들어선 길을 똑같이 따라가면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만 따라간 열린우리당이 결국 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말 잘 듣는 여당으로 만들려는 건 잘못된 유혹이다. 정치 선진화와도 거리가 멀다. 당권과 대권의 분리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 당선인 쪽의 이재오, 박형준, 정두언, 홍준표 의원이 제안해 만든 거 아닌가. 그 원칙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 이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소신도 강하다.

말 잘 듣는 여당은 잘못된 유혹

박 전 대표 쪽에서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게 이번 공천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 때문 아닌가?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공천하면 박 전 대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원칙과 기준이 중요하다. 도덕성, 전문성, 정체성 이 세 가지 기준으로 공천하면 된다. 그러면 박 전 대표를 돕던 사람이 날아갈 수도 있고, 이 당선인을 도운 사람이 날아갈 수도 있다.

계파를 만들지 않겠다던 박 전 대표가 결국 계파를 챙기려 이러는 거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오해다. 박 전 대표가 내 사람 살려야겠다는 차원에서 얘기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당선인 쪽에선 경선 패배 뒤에도 박 전 대표를 도왔던 40여 명의 의원과 40~50명의 원외 위원장 및 비례대표 의원들이 뭉쳐 있는 걸 제일 신경쓰는 거 같다. 그런데 그 주위에 있는 분들을 옛날식 돈 정치, 밀실 정치, 계보 정치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억울하다. 당 안에서 박 전 대표가 중시하는 정체성이나 정책에서 정치적 뜻을 같이한 분들이다. 새로운 의미의 하나의 그룹이 됐다. 계파라면, 오히려 이명박 계파가 자리와 권력으로 더 똘똘 뭉쳐 있다.

박 전 대표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을 거 같다.

=대선 끝나고 보름도 안 됐다. 하지만 시련은 이미 시작됐다.

시련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

=원칙으로 풀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원칙과 기준만 지키면 자기를 도왔던 의원들이 공천을 못 받을 수도 있다. 당권·대권이든, 당청 관계든 아니면 공천이든 원칙으로 돌파할 분이다.

앞으로 박 전 대표가 어떤 정치적 행보를 할지도 궁금하다.

=총선 때까지 당의 승리를 위해서 때론 쓴소리를 할 것이다. 이후엔 최대한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도록 협력할 것이다.

신보수를 표방하는 이 당선인 쪽에서 ‘올드라이트’(구보수) 색채를 띠는 박 전 대표 쪽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박 전 대표를 올드라이트로 규정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박근혜는 뉴라이트다. 바른 길을 추구하면서 깨끗하고 도덕적이다. 민주적 리더십을 지녔고, 가치와 원칙을 지킨다.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된다. 아버지가 좌파라고 아들도 좌파라고 할 순 없다. 당내 구보수라 할 만한 민정계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나? 16대, 17대 국회를 거치면서 다 교체됐다.

시련은 이미 시작됐다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당을 떠나 이회창 전 총재와 함께 총선을 치를지 모른다는 관측이 떠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 전 총재가 도움을 기대했을 때도 분명히 선을 그은 분이다. 박 전 대표는 오늘의 한나라당이 있기까지 누구보다도 주인 의식이 있는 분이다. 그런 분이 왜 당을 떠나나? 그렇지만 당을 너무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장악하면…. 박 전 대표 쪽 사람 입장에서도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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