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걸면 걸리는 선거법, 서러운 군소후보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인터넷 정책 토론도 위반, 민중대회도 위반…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법이나 마찬가지”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무소속 강운태 대선 예비후보는 군소후보로 분류된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조직과 세력도 변변치 않고 선거자금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서울 여의도의 한쪽 구석에 마련한 ‘강운태 선거사무소’가 강 후보의 유일한 선거조직이다.

언론 외면을 아이디어로 뚫으려 했는데

언론은 ‘군소후보 강운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강 후보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인터넷을 통한 누리꾼들과의 ‘직접 소통’이었다. 정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던 만큼 효과적으로 알리기만 하면 충분히 주목을 끌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전략이었다.

강 후보는 지난 10월18일부터 정치포털 서프라이즈를 통해 누리꾼들과 실시간 댓글 토론을 진행했다. 경제 정책이나 부동산 정책, 일자리 창출 등의 주제에 대해 강 후보가 관련 정책을 발표하면, 누리꾼들이 댓글을 달아 자신의 평가나 반론을 내놓는 방식이었다.

누리꾼들은 자신의 댓글에 일일이 화답하는 강 후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0월18일 ‘200조원의 재원 확보계획’에서 시작된 정책토론은 11월5일 ‘평화통일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많게는 150여 개의 댓글이 달렸고 조회 수 5천 회를 넘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만 한다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 유권자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 후보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1월1일 강 후보의 정책제안에 대해 선거법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것은 ‘누리꾼과의 정책토론 다섯 번째 - 부동산 정책에 관한 글’이었다.

선관위는 강 후보가 문제의 글을 통해 자신의 공약을 제시했고, 이는 곧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선관위는 강 후보가 내놓은 여덟 개의 정책제안 가운데 세 개에 대해 선거법 93조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선거법 93조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려고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광고, 벽보, 사진, 문서, 인쇄물 등을 배부하거나 살포하는 행위를 금지한 조항이다. 선관위에서는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것도 선거법 93조 위반으로 간주하고 있다.

강 후보는 선관위 결정이 선거법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11월13일 과 만나 “인터넷 공간에서 누리꾼들과 실시간 댓글 토론을 주고받으며, 오히려 선거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며 “다른 유력후보들은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선전하고 있는데, 언론조차 다뤄주지 않는 군소후보들에게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언론의 외면을 아이디어로 돌파하고자 했던 강 후보는 선거법의 높은 벽에 부딪혀 망연자실한 상태다. 11월25~26일로 예정된 대선 후보 등록기간이 지나면 사정이 조금 나아지겠지만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는 유력후보들과의 거리는 그 사이에도 더욱 벌어지게 됐다.

“입은 풀고 돈은 묶어야 할 선관위가…”

여느 군소후보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인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도 최근 선거법에 덜미를 잡혔다. 이명박, 이회창, 정동영 등 이른바 ‘빅3’ 후보에게 언론사의 관심을 뺏긴 권 후보가 의욕을 갖고 추진한 것은 11월11일 ‘100만 민중대회’였다.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권 후보는 ‘만인보’라는 이름으로 민심대장정을 시작했다. 10월19일 전남 순천을 시작으로 권 후보의 민심 탐방은 18일 동안 이어졌다. 당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후보가 여의도를 비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정책으로 승부하지 않고 거리의 정치, 동원의 정치로 눈길을 끌려 하느냐”라는 회의론도 제기됐다.

민주노동당 안팎의 비판에도 권 후보는 만인보와 100만 민중대회를 밀어붙였다. 언론의 외면을 넘어 노동자와 농민 등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 직접 만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권 후보의 ‘고육지계’는 선거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권 후보가 만인보를 끝낸 직후 100만 민중대회를 앞두고 있을 때 선관위에서 만인보와 민중대회에 대한 선거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우선 대규모 군중이 모인 장소에서 대선과 관련한 연설을 하는 것은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게 선관위의 해석이었다.

권 후보는 11월6일 기자회견에서 “입은 풀고 돈은 묶어야 할 선관위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며 “(만인보는) 노동자와 농민의 목소리를 듣는 기본적인 행보였음에도 이에 대해 선거법상 검토를 한다는 것은 선관위 본연의 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인보와 100만 민중대회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00만 민중대회’에 모인 사람은 2만여 명에 불과했다. 민중대회에서 연설을 강행한 권 후보는 선관위에서 경고 조치를 받았다.

언론의 무관심과 선거법의 높은 벽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은 다른 군소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역시 군소후보로 분류되는 국민연대의 이수성 후보 쪽도 언론의 보도 기준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지나온 이력만 놓고 본다면 이 후보가 다른 유력후보들에게 뒤질 것이 없는데도, 언론은 이 후보의 출마 배경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후보 쪽의 불만이다.

터무니없이 높은 선거법의 울타리도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11월14일 창당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 후보 쪽에서는 아예 검사 출신인 김진태 변호사를 선거사무장으로 임명했다. 언론사 인터뷰와 기자회견 이외의 선거 관련 이벤트는 법무팀의 검토 단계에서 차단되기 일쑤다.

김 사무장은 “나도 검사 출신이지만 현행 선거법은 특히 군소후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법이나 마찬가지”라며 “선관위나 검찰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른바 유력후보들의 최근 행보는 모두 선거법상 처벌 대상”이라며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무국장을 검사 출신으로 하기도

지난 8월 일찌감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금민 한국사회당 후보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이나 판도라TV 등에서 마련한 대선 관련 코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앙 언론의 관심은 이미 포기했다. 대신 지방 언론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선거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고작 그 정도라는 게 한국사회당의 판단이다.

최광은 한국사회당 대변인은 “대선 기탁금은 모두 똑같이 5억원씩 내면서 군소후보들만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일방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군소후보 처지에서는 선거법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더욱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최 대변인은 “아직은 선관위로부터 선거법 위반 사실을 지적받은 적은 없지만 상식이 있는 유권자라면 모두 반대하는 만큼 선관위의 과도한 제재는 풀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참주인연합 대선 후보는 유권자들과 직접 만나는 일정은 거의 잡지 못하고 있다. 주로 기자회견이나 보도자료를 통해 정책공약을 알리는 정도다. 애초에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누리꾼들과의 ‘끝장토론’을 진행할 계획도 있었지만 선거법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연식 참주인연합 공보팀장은 “현행 선거법상 허용되는 것이 방송 토론회 정도인데 여론조사에도 잡히지 않는 낮은 지지율 때문에 그것마저도 어려워졌다”며 “유권자들에게 우리 후보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군소후보들 대부분은 언론의 무시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으로 여기고 있다. 정작 서러운 것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 선거’마저 가로막는 선거법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판에도 ‘무조건 법대로’를 외치는 선관위가 이들의 볼멘소리를 귀담아들을 만한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