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야당 후보 뒷조사’ 주장에 명예훼손 소송 건 청와대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정치권에는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 말을 잘해서 급부상한 정치인이 말 때문에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다가 위기를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선후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에서 “재떨이로 흥한 자, 재떨이로 망한다”라는 명대사가 유행한 뒤 더 자주 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말’ 이나 ‘재떨이’ 자리에 ‘소송’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청와대는 9월7일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국세청이 이 후보의 재산과 납세 기록 등을 조회한 것이 정치 쟁점화한 이후인 9월3일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에서, 이 후보가 “권력의 중심세력에서 이것을 강압적으로 지시하고 있다”고 말한 게 빌미가 됐다. 청와대는 왜 ‘사상 유례가 없는’ ‘대선 개입 논란을 부를’ 소송이라는 강수를 둔 것일까.
참여정부 업적 훼손당할까… 절박감
우선 ‘업적 지키기’용으로 볼 수 있다. 9월5일 문재인 비서실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밝힌 ‘이 후보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통령 비서실 입장’과 다음날 홍보수석실이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을 보면 청와대는 피해자로 그려져 있다. 문 실장은 이날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정부가 지켜온 대원칙이고 참여정부가 지난 5년 동안 가장 공들여 지켜온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야당 후보 뒷조사”라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도 “국세청이나 국정원이 불법·비리 첩보를 입수해 조사하는 것은 국가기관의 당연한 책무”이며 “국가기관 스스로 판단하고 추진하는 정당하고 정상적인 업무”라고 반박했다. 가장 공들여온 참여정부의 업적까지 훼손당해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묻어 있다.
이런 인식은 노무현 대통령이 8월31일 한국방송프로듀스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한 발언과도 맥이 닿아 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처음 시작한 일이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경찰 전부 각기 자기 일들을 하게 하고 그들의 특별한 도움, 말하자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체의 도움을 받지 않는 대신에 그들도 가외의 권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고 잘못이 있어도 비호받을 수 없다. 내가 불법적인 명령이 아니라 청탁을 해서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불법적인 일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의 오류, 과오가 발견됐을 때도 징계할 수가 없다. 그런 공생관계를 청산했다.”
가장 곤혹스러운 건 대통합민주신당
청와대 정치공작 주장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경부운하 보고서 유출사건’과 ‘주민등록 초본 유출사건’ 때부터 줄곧 제기돼왔다. 그런데 실제 청와대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난 것은 없었던 터라 노 대통령이 자신 있게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마당에 이 후보가 ‘뚜렷한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단정적인 표현’으로 얘기하자 바로 소송으로 직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 가까운 온갖 주장과 설이 ‘근거 없이’ 난무하는 곳이 정치판인 점을 감안하면 이 후보의 주장이 일상적인 정치공세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청와대의 소송은 올 연말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가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선 개입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소송이란 초강수를 꺼내든 이례적인 상황이다. 일종의 ‘재발방지책’이다. 문재인 실장은 대선 개입 논란에 대해 “한나라당은 청와대 정치공작설을 통해 검증을 피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것 아닌가. 반칙을 통해 공정성을 해치고 있는데 (이번 소송은) 선거의 공정성을 바로잡는 정부의 책무이다”라고 주장했다.
부담스러운 숙제를 넘겨받은 검찰은 청와대가 소송을 제기한 당일 사건을 공안1부에 배당하고 “통상적인 고소사건의 수사 원칙과 절차에 따라 수사를 진행해나갈 계획”(신종대 2차장 검사)이라고 밝혔지만, 소송을 당한 당사자들을 검찰에 소환하는 일부터 수월치 않을 전망이다. 이명박 후보와 함께 소송을 당한 3명 중 하나인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국정원·국세청의 야당 후보 뒷조사 의혹 국정조사 요구서를 낼 텐데 국정조사에서 진상이 밝혀질 만큼 검찰이 수사할 필요가 없다”며,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검찰이 이 후보를 소환해도 일절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의 이번 소송은, 3개월가량 남은 대선의 변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기는 쉽지 않다. 청와대의 예상치 못한 공세적 태도에 한나라당이 움찔하고는 있지만,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쪽은 오히려 대통합민주신당이다. 추석 전에, 국회 국정감사 전에 이명박 후보 검증 국면을 만들면서 동시에 이 후보에 맞설 대선 후보를 선출해 무대에 세우느라 바쁜 마당에 노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한 모양새가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는 청와대가 소송을 제기하기 직전까지 공개적으로 자제를 요청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신당의 한 의원은 “친노세력의 결집으로 친노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득을 보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이명박 후보가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다”며 “이명박을 이렇게 키운 것이 노무현인데 발 벗고 나서 아예 끝까지 밀어주려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가 법정으로 가면 초라해져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를 떠나 정치를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국정원, 국세청이 ‘정상적 업무 범위’를 넘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부분은 있다. 청와대가 이를 지시하거나 공작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주장을 법으로 막는다. 대선이라는 특수한 시기가 비약을 증폭하면서 결국 정치를 법정으로 가져가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선거를 앞두고 검찰과 법원이 바빠지고 선거 이후에는 이를 취하하는 일이 반복돼왔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굵직한 소송만 꼽아봐도 △개표 부정 소송 △노 대통령 탄핵 소송 △행정수도 이전 위헌 소송 등이 있다. 한나라당 혹은 한나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쪽에서 제기한 소송들이었다. 최근 논란을 빚은 소송은 노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헌법재판소에 선거법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고 제기한 소송이었다. 정치가 법정으로 가면 정치의 영역이 초라해진다. 개인 간의 다툼에도 소송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게 상식이다. 소송으로 흥한 자는 소송으로 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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