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 소지 다분한 정치관계법 제·개정안 들고나와 ‘오버’하는 한나라당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누군가 “대통령을 잘 뽑기 위해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하자”고 한다면 이런 반박에 시달릴 것이다. 대통령을 왜 선거라는 방식으로 뽑는가, 민주주의 하자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적 권리 행사를 유보하자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민주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라는 공간에서, 현재 지지율대로라면 올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을 배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당의 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3월 정치관계법 제·개정 특별위원회(위원장 안상수 의원·이하 특위)를 만들었다. 앞으로 국회 안에서 논의될 정치관계법 제정과 개정 과정에 내놓을 한나라당 안을 만들기 위한 기구인데, 김정훈·주성영·장윤석·김기현·이주영 등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 특위 내 5개 소위 위원장을 맡아 활동해왔다. 사실 ‘정치관계법’이란 이름을 가진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와 관련된 여러 법안들, 예를 들면 선거법·정당법·정치자금법 등을 하나의 이름으로 포괄적으로 묶어 부르는 것이다. 정치라는 이름을 내세웠지만 특위를 만든 시점이나 실제 활동 내용을 보면 선거 관계법이나 2007년 대선 관계법에 더 가깝다.
촛불집회도 하지 말라
대선을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선거 관련 법안을 정비하자는 데 반대할 이는 없겠지만, 4월16일 안상수 위원장(안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기도 하다)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사흘 동안 내놓은 법안들은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2002년 대선 패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나라당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다 보니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민주적 권리,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막는 위헌 소지가 다분한 법안들이 쏟아져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 기간 중 촛불집회를 금지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다. 특위의 개정안은 ‘선거 기간 중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합대회, 야유회 또는 촛불시위, 기타의 집회를 개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현행 선거법도 관련 규정이 있긴 하다. 각종 집회를 제한하는 제103조 3항을 보면 ‘선거 기간 중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단합대회 또는 야유회, 기타의 집회를 개최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현행 선거법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라는 목적이 비교적 분명한 반면, 한나라당 특위가 내놓은 개정안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으로 더욱 포괄적이다. 보통 집회라는 것이 선거권자와 대부분 겹치는 대중을 향해 발언하고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완벽하게 ‘순수한’ 집회는 없다. 선거법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로 개정되고 실제 엄격하게 집행된다면 선거 기간 중에는 어떤 성격의 집회도 불가능한 셈이니, 말하고 싶은 사안이 발생하더라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범법자가 되지 않는다.
현행 선거법에 ‘기타 집회 개최 금지’가 규정돼 있음에도 단합대회, 야유회와 함께 촛불시위를 따로 명기한 것에 대해 안상수 위원장은 “촛불집회가 미치는 폭발력이 이 법에 있는 단합대회나 야유회보다 더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을 기렸던 촛불시위와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로 인해 한나라당이 각각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했다는 인식 때문으로 풀이되는데, 2002년 대규모 촛불시위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씨도 참가한 적이 있다.
인터넷 정보 차단, UCC 실명 인증…
허위 사실 공표에 관한 조항은 국민의 알 권리와 충돌한다. 개정안은 후보에 관한 허위 사실 논란이 있을 때 법원은 72시간 안에 이를 결정해야 하며, ‘분명한 증거가 없는 한’ 언론의 보도 금지 가처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허위 사실이 대선에 중대한 영향을 줬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당선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치른다’는 조항은, 어디까지 허위 사실로 볼 것인지, 허위 사실이 대선에 얼만큼 영향을 줘야 ‘중대한’ 정도인지가 모호하다. 또 선거가 끝난 뒤 승복 문제를 놓고 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지속될 우려도 있다.
특위의 개정안은 선거에 부당한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터넷 언론사와 포털의 게시물에 대해 임의로 해당 정보의 접근을 차단하는 조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 지지·반대 의견을 담은 글·동영상(UCC)·음향 등에 대해 실명 인증을 받도록 하는가 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정당과 정당 후보자 또는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 사이의 후보자 단일화 토론 등을 방송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직 한나라당의 당론으로 확정되지 않았고 국회 논의 과정에서의 가감을 계산한 협상안임을 감안하더라도, 선거 기간에 언론과 인터넷,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는 법안이라는 비판을 살 만한 내용이다.
이런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다른 정당들이 가만두고 볼 리 없다. 최재성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4월18일 “대권 편집증 환자인 한나라당의 광기가 국민의 정치의식, 민주주의, 언론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라며 “군사정권의 후예가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영순 민주노동당 공보부대표도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한 유신시절에 빚대어 ‘한나라당판 긴급조치 10호’라고 규정하면서 “집권하지도 않은 정당이 이런 일을 하는데 집권하고 나면 얼마나 더 가혹할지 벌써부터 몸서리쳐진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특위의 정치관계법안은 심지어 당 내부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지 못한 상태다. 강재섭 대표는 4월19일 “발표 내용 중 위헌성이 있는 조항들도 있는 것 같다”며 “당 지도부와 논의 없이 특위 차원에서 ‘오버’해서 발표해 그것이 당론인 양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발표된) 정치관계법은 완전한 당론이 아니니, (지도부와) 상의를 좀 해달라”고 당부했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부터 적용해 보라
그럼에도 한나라당 정치관계법 제·개정 특위가 자신들의 정치관계법을 고집하려면, 제약사가 의약품을 시장에 선보이기 전에 임상실험을 거치는 것처럼 올 연말 대선 전에 열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적용해보는 방법이 있다. 우선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원들의 각종 모임은 문을 닫고 모이지 말아야 한다. 또 상대 후보의 정책이나 도덕성에 대해 제기하고 싶은 의혹이 있더라도 ‘분명한 증거가 없는’ 허위 사실을 공표하지 말아햐 하며, 언론들은 보도금지 가처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나라당 경선관리위원회는 허위 사실이 경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측정해 재선거 실시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이번 정치관계법을 내놓은 특위 의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지 모른다. 뭐 이런 법이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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