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에서 러브콜 받는 상황 즐기며 최대한 상품가치 높이는 전술…한나라당 지지층의 재평가 없고 여권도 선뜻 자리 펴주지 않아 고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주변에서 보기엔 서커스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어느 한쪽으로 떨어질 마음이 있겠냐. 양쪽에서 봐주기를 원하는 거지.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대통령이 되려고)줄을타는거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한나라당과 범여권 사이에서 줄 타는 곡예사로 비유했다.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인 손 전 지사가 최근 범여권으로부터 잇단 ‘러브콜’(구애)을 받으면서 그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것을 절묘하게 빗댔다. 손 전 지사의 몸값도 덩달아 뛰고 있다. 지난 1월28일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손 전 지사는 ‘범여권 단일 후보’로 열린우리당의 창당 주역인 정동영(14.0%) 전 통일부 장관을 제치고 14.9%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국민들은 손 전 지사가 범여권 후보로서 제일 훌륭한 카드라고 본 것이다. 정 전 장관은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쯤 하면 도대체 손 전 지사가 어느 쪽 후보가 될 것인지 헷갈릴 만도 하다.
당 대의원 지지율 4.9%에 불과
시간을 조금만 돌려보자. 고건 전 총리가 1월9일 대선 출마 포기 선언을 하자, 많은 이들이 그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지 주목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학규’라는 이름이 나왔다. 고 전 총리를 중심으로 정계 개편의 산파 구실을 하겠다며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당으로 둥지를 옮긴 신중식 의원은 1월17일 SBS 라디오 에 출연해 “통합신당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손 전 지사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파급은 컸다.
왜 범여권의 후보로 거론되는 고건의 바통을 한나라당의 손학규가 넘겨받을 수도 있다고 본 걸까? 간단히 말하면 고건의 탈락 이후 범여권에 상대적으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없는데다, 손 전 지사의 중도보수 이미지가 거부감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손 전 지사의 이름은 열린우리당의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명단에 자주 오르내렸다. 손 전 지사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당대표를 뛰어넘어 한나라당에서 살길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이쪽으로 오지 않겠냐”는 은근한 기대감도 그 같은 정치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해 민생 탐방으로 한때 5%를 넘어섰던 지지율이 상승 탄력을 받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다시 손학규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월30일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조사에서 지지율은 5.8%를 기록했다. 다른 여러 조사에선 정동영 전 장관과 3·4위를 다투고 있다. 손 전 지사는 당분간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범여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을 최대한 즐길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그렇게 해서 최대한 상품가치를 높이는 전술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1월31일 손 전 지사를 만난 남경필 의원은 “손 전 지사가 범여권으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오면 그만 자르려고 했는데, 참모들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이다.
한나라당이란 환경에서만 빛난다?
그런데도 범여권의 분위기와 달리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서 그를 재평가하겠다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명박 대세론과 박근혜의 두터운 고정표들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있다. 손 전 지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나라당에서 (나를) 대접을 잘 해줘야지”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당밖 평가와 당내 평가의 괴리에서 나온 그의 답답함을 보여준다. 가 지난해 12월 말 한나라당 대의원 110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손 전 지사에 대한 지지율은 4.9%에 불과했다.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등 모든 대선 예비 후보를 통틀어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대선 후보 적합도를 물었을 때와 절대 수치에서 거의 변동이 없는 절망적인 수준인 셈이다.
이는 한나라당 후보란 딱지를 달고 있는 한 손학규에겐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현재의 경선 방식(2:3:3:2=대의원 투표:당원 투표:일반국민 투표:일반국민 여론조사) 대로라면, 한나라당의 핵심 지지층인 당원과 대의원이 결정권의 50% 지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심을 사지 못하면 경선은 해보나 마나다. 대의원을 움직이는 의원들의 지지도 요원하다. 그와 이념과 노선이 가까웠던 이른바 소장개혁파들이 소속된 ‘수요모임’은 대부분 이명박 쪽으로 줄을 섰다. 그 가운데 몇몇은 박근혜 쪽이다. 공개적으로 ‘손학규맨’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정문헌 의원밖에 없다. 한나라당 경선관리위원회의 손 전 지사 쪽 대리인으로 나선 정 의원은 “(의원들이 손 전 지사에 대해) 관심은 많다. 그런데 참, 현실 정치가 그렇다. (손학규맨을) 좀 만들어달라”고 답답해했다. 그는 또 “요즘 우리보고 ‘당을 깨고 나와라’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 바탕엔 우리가 당내 비주류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27석이나 되는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 그를 돕는 의원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현실이다.
범여권 쪽도 마찬가지다. “오라”고 말하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누구도 자리를 펴주진 않는다. 손 전 지사의 정무특보인 김성식 전 경기 정무부지사는 “자기들 정치적 계산에서 자꾸 지사님을 거론하는 거지, 솔직히 맘을 줄 뜻은 없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손학규란 중도보수의 인물이 한나라당이란 환경에서 빛이 난다는 점을 냉정하게 볼 필요도 있다. 그가 한나라당의 변화와 당의 지나친 보수·수구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외부의 시선을 끌고 있지만, 당을 떠나는 순간 그 목소리의 차별성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는 경계인으로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경계인, 중간인으로 리스크(위험)도 안고 간다. 그의 딜레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에 쓴 ‘경계선에 선 손학규, 과연 올인할 것인가’란 칼럼에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고, 그렇다고 월경을 하자니 ‘저쪽’ 사정이 너무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어느 한 주자, 그것도 이명박이 중도 탈락한다면 당내에서 그에게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 또 이명박과 박근혜가 갈라서 요동치는 정치 국면이 펼쳐진다면 한나라당 또는 제3의 후보로서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남경필 의원은 “그런 전제가 아니라면 탈당하는 순간 자멸”이라고 말했다. 국민들도 63%(미디어리서치 조사)가 손 전 지사가 범여권 후보로 영입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당적을 옮기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당 뛰쳐나온다고 성공할까
지금 국면에서 한나라당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전제가 필요하다. 당이 그의 정체성 등을 문제 삼아 내쫓는 모양새가 돼야 한다. 명분을 쥐면서도 박해받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리가 정해지고 모양새가 갖추어진 정치적 공간에 무혈 입성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명분을 쥐고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자기 세력을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연출해야 한다. 이런 교집합 아래서야 그나마 성공을 점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현실성이 낮다는 점이다.
무리한 정치적 선택은 이인제 의원처럼 자칫 다음마저 영원히 기약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 가운데서 손학규는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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