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없이는 집권없다” 한나라당의 계속되는 이벤트
달라진 대접 실감하지만 지지율 상승까진 장애물 산적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먼 곳’이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비행기로 1시간, 광주에서 다시 버스로 1시간30분을 달려서야 목포 선착장에 다다랐다. 바다 저편으로 신안군 압해도가 코앞이다. 이곳에서 다시 신안군 행정선을 타고 1시간10분 동안 물길을 헤쳐, 하의도에 뱃머리를 댔다. 다행히 파도가 울지 않아, 걱정했던 배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의도 섬주민들이 타는 여객선은 뱃길을 더 돌아서 온다고 한다. 섬에서는 금방이었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은 후광리에 위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에 도착했다.
“온껭 반갑서야, 꿈에도 몰랐어야”
5월26일 한나라당 의원들은 처음으로 DJ 생가를 방문했다. 한나라당에 그만큼 ‘먼 곳’이었다. 정의화 한나라당 의원은 “일반 뱃길로 목포에서 3시간이나 가야 하는 지리적인 거리감 외에 솔직히 정치적인 거리감 때문에 그동안 선뜻 방문에 나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정 의원을 비롯해 심재철·김재경·김애실 의원 등 당내 지역화합발전특위 위원과 진수희 제6정조위원장 등 5명의 의원이 오랫동안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민주당의 ‘성지’를 찾은 것이다. 한나라당이 지난 1999년 DJ 생가 복원을 반대했던 것을 떠올리면, 커다란 변화다. 동네 주민 장일웅(65)씨는 “참, 온껭 반갑서야. 꿈에도 몰랐어야”라고 반가움을 내비쳤다. 정 의원은 A4용지 3장짜리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방문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통해서도 “칭송받아 마땅하다”며 DJ의 남북관계,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높게 평가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DJ의 업적을 치켜세운 것은 드문 일이다. 지역화합발전특위 의원들이 이날 방문하기에 앞서 지난 4월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도 신안군 압해도를 방문했다. 당시에는 하의도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가 선거철 지역 유세를 돌듯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박 대표는 5월18일을 비롯해 지난 1년여 동안 광주 5·18국립묘지를 네번이나 참배했다. 지난해 대표 취임 뒤 첫 방문지가 광주일 만큼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김무성 사무총장은 사무처 당직자 80여명을 데리고 5월12일 5·18묘지를 다녀갔다. 의원들의 자발적 호남행도 줄을 잇고 있다. 소장개혁파 의원들이 주축인 ‘수요조찬모임’은 지난해 7월 전남 강진군에서 1박2일 동안 농촌 봉사활동을 한 데 이어, 지난 5월24일 전북 지역을 방문하기까지 틈날 때마다 호남을 찾았다. 중도파 의원들의 모임인 ‘국민생각’이나 ‘푸른정책모임’, ‘국가발전전략연구회’ 등 당내 의원모임 차원에서도 호남행 행보가 활발하다. 호남을 텃밭으로 하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에 비해 몇배나 더 발길이 잦다.
이 때문일까. 이재성 당 사무처 기조국 팀장은 “한나라당에서 호남에 갈 때마다 과거 관련단체나 일반 시민들이 보였던 적개심은 전혀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과거 한나라당 차원에서 호남을 방문할 때마다 신경써야 했던 경호 문제는 이제 옛이야기다. 호남의 한나라당에 대한 ‘대접’이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이는 호남의 정치적 상징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을 지낸데다 호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다는 자신감 같은 게 호남민들에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더 이상 호남을 상징하는 정치인이나 정당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것도 한 요인이다. 이 때문에 호남민들이 한나라당을 대놓고 미워할 이유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호남민들이 한나라당을 ‘선호’하지는 않는 게 현실이다. 권철현 의원실의 김성현 보좌관은 “호남 사람들이 아직 한나라당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호남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한나라당이 호남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그 자체를 나쁘게 보거나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표면적이고 단발적인 이벤트식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효과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과 박 대표의 인기는 별개
사실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지난 1년여 동안 의미 있는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집계한 지난 한해 동안의 광주·전라 지역에서 한나라당의 월 평균 지지율은 2.8%에 불과했다. 최근에도 5% 안팎을 오르내렸다.
한나라당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호남민들의 정서는 박근혜에 대한 높은 호감도로도 읽을 수 있다. 박 대표가 호남을 방문할 때마다 그의 얼굴을 담으려는 젊은 학생들의 카메라폰 세례와 손을 잡아보려 남녀노소가 벌떼처럼 모여든다. 정치 스타로서 박근혜의 인기가 호남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5월10일 조사한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광주·전라 지역민들의 51.4%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 호남민들의 박근혜에 대한 호감도가 당에 견줘 훨씬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김성현 보좌관은 “한나라당이 내부의 변화를 통해서 호남에 다가가지 못한 채, 박 대표의 개인기로 끌고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호남민들의 과반수가 여전히 한나라당이 “과거와 차이가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박 대표는 과거 이회창 전 총재에 비해 호남민들의 높은 호감을 사고 있다. 김형준 국민대 정치학 교수는 “이 전 총재보다 박근혜에 대한 호남인들의 거부감이 적은 까닭은,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웠던 DJ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라며 “박근혜가 DJ 은퇴로 공백이 생긴 호남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외생적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호남쪽에서도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호남이 앞으로 과연 박근혜를 지지할지는 미지수다. 고건, 정동영, 이명박 등 여러 대권 예비후보들을 나열했을 때, 호남민들이 박근혜를 선택하는 비율은 아주 낮다. 한기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실장은 “박근혜 대표에 대한 호남의 절대적 지지도가 낮지 않지만, 다른 대권 후보들과 같이 놨을 때 호남에서의 한나라당 지지도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한나라당이 호남 공들이기를 하는 까닭은 동서화합이라는 당위와 원칙은 제쳐놓고, 몇 가지가 있다. 김재경 의원은 “사실 과거 호남에서 눈을 돌렸다고 해서, 우리도 눈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집권당도 아니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좁게 보면 집권 전략이고 더 넓게 보면 우리가 집권당이 됐을 때 져야 할 짐을 미리 더는 것”이라고 말했다. 호남을 껴안지 않고서는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정현 당 부대변인은 “호남을 포기해서는 도저히 정권을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난 두 차례의 대선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어차피 집권을 생각한다면 전국정당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에서 최근 민주당과 연대 또는 연합정권 창출 얘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당내 호남인맥은 거의 빈사상태
그러나 호남을 자주 방문하는 것 이외에 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야당으로서 호남에 던져줄 선물이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또 박 대표, 강재섭 원내대표, 김무성 사무총장 등 ‘당 3역’이 모두 영남 출신이라는 점은 호남이 다가서기 어려운 정서적 벽이다. 더 나아가 당의 정책결정 과정에 호남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창구가 없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사실상 당내 호남 출신이 없다”고 말했다. 김덕룡 전 원내대표를 비롯해 호남에서 나고 자란 의원들은 당내에 대여섯명이 있지만, 꾸준히 호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역구나 비례대표 의원은 없는 게 현실이다. 진수희 의원은 “한나라당이 호남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호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호남 출신 의원이 없다는 것”이라며 “최소한 호남 지역 출신의 비례대표 2~3명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 4·15 총선 전 광주·전남·전북에 각각 한명씩 모두 세명의 비례대표를 배정하기로 했으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당 혁신추진위에서는 호남·충청 등 한나라당의 취약지역에 비례대표의 30%를 배정하자는 안을 제안해놓은 상태다. 또 권역별 비례대표 의원이 나올 수 있도록 석패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현실에서 한나라당의 호남인맥은 거의 빈사상태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한나라당이 당원 한명을 끌어들이는 것은 50kg짜리 돌덩어리를 맨손으로 들어 트럭에 싣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며 “호남에서 당원 확보가 어려운 만큼 지역기반이 약화하고, 좋은 인물이 수혈되지 않는다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중앙당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호남 다가서기를 시도당에서 제대로 받쳐주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박형준 의원은 “그동안 호남에서 당 지지율을 높이기보다 당내 지분을 놓고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 사실인 만큼, 호남 다가서기는 당내 호남 내부 개혁과 같이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덕룡 의원실의 유용승 보좌관은 “당원 하나 모시는 데 영감님 모시듯이 하는 한나라당의 호남 시도당 구조로는 호남에서 뭘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최근 5·18묘역을 심심찮게 참배하면서도 전신인 민정·민자당 등이 과거 호남 지역에서 행한 차별에 대한 사과나 반성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당이 5·18묘역을 찾아만 갔지, 대외적인 메시지를 던진 게 없다. 지난해 과거사법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이 친북·용공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몰두했지, 과거 호남인들의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물론 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가 지속된 것은 겨우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성권 의원은 “30여년 동안이나 차별한 지역을 고작 1년 공들였다고 해서 뭔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다들 ‘나서 자란 곳’ ‘어머니의 고향’ ‘직장 근무’ 등 나름대로 호남과의 인연을 풀어냈다. 이들에게 사실 호남은 그리 ‘먼 곳’만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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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성이면 감천 아니겠나” |
[인터뷰/ 한나라당 지역화합발전특위 정의화 의원]
호남에 사과할 건 사과하고 배려해주는 당 지도부 리더십 필요
다른 당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나라당 내 기구가 하나 있다. ‘지역화합발전특위’다. 최근 한나라당의 부쩍 잦아진 호남 방문의 중심에 바로 이 특위가 있다. 지난해 5월 특위 구성을 제안하고 현재 위원장까지 맡고 있는 정의화 의원은 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 전도사다. 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기 하루 앞서 지난 5월25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호남을 포기한 과거 한나라당의 전략 자체가 포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산 토박이 출신인 그는 부산 중·동구를 지역구로 하고 있다. 그는 의회에 진출하기 훨씬 전인 지난 1991년 ‘영호남민간인협의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호남과의 교류를 위해 계속 노력해왔다.
지난해부터 한나라당의 호남 방문이 부쩍 늘어났는데.
한나라당이 지역정당으로 추락하지 않고 전국정당이 되려면 당연히 호남을 끌어안아야 한다. 아니, 껴안겨야 한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호남에 기여하고, 인정받을 것을 인정받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호남에 대해 과거 호남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시대적으로 이제는 동서 화합의 문제를 내버려둘 수 없다. 대선 등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좀더 표를 많이 얻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차기 대선에서 호남을 끌어안지 않고는 승리가 힘들다고 보나.
개인적으로 보면 대선에서 호남 표가 몇%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가 가치 중심에 있지 않다. 표가 더 오고 안 오고는 그 다음 단계의 일이다.
최근 호남 공들이기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나.
지성이면 감천 아니겠나. 747점보기는 엔진을 가동해 시속 400~500km 정도 속도가 붙어야 공중에 뜬다. 한나라당이 지금 시속 100km인지 200km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호남에 뿌리를 둔 민주당과의 연합론이 나오는데.
구태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정치공학적 생각이 아니겠나. 우리는 지역정당을 벗어나야 한다. 탈지역정당이 돼야 한다. 이념 중심 정당으로 재편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호남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한 정책이 있나.
솔직히 야당인 한나라당이 뭘 할 수 있겠나? 우린 집권당이 아니다. 하지만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영·호남 지역화합특구를 만드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호남에 예산 지원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광주·전남·전북의 예산 지원을 통해, 호남에서 애초 기대한 것보다 40~50%의 예산이 더 갔을 것으로 본다.
정책결정 과정에 호남인들이 배제되는 게 현실 아니냐.
이게 당 지도부의 문제다. 호남인들에 대한 배려가 리더십의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최병렬 전 대표가 17대 국회 비례대표에 호남쪽에 3석을 준다고 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동서 화합 프로그램은.
6월15일 헌정기념관에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 대한 재평가 토론회를 연다. 광주·부산·대구를 돌면서 할 예정이다. 국회 ‘민족 대통합을 위한 연구모임’ 차원에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두분을 만나게 해서, 화해를 도울 기회를 만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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