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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킹이냐 킹 메이커냐

등록 2005-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4·30 재보궐 선거 승리로 ‘복귀론’ 가라앉았지만 집권 가능성 떨어지면 언제든 다시 떠오를 듯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지난 5월4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단암빌딩 ‘2105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년 동안의 칩거 생활을 접고 지난해 10월 마련한 사무실이 자리잡은 곳이다. 시야가 북쪽으로 확 트였다. 광화문 정부청사 뒤편으로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청와대가 인왕산 밑자락에 달려 있었다.

기자가 이날 단암빌딩에 도착한 지 몇분이 되지 않아, ‘창’과 사전에 약속한 남녀가 화분을 안고 들어섰다. 거의 매일같이 5~6명씩 손님이 찾아온다고 한다. 창은 평소보다 10여분 늦은 10시40분쯤에야 도착했다. 기자가 명함을 건넸지만 엷은 웃음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낯설은’ 기자에게 말을 아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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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전 총재를 직접 만났지만…

사무실은 정치적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21층 사무실 안내 명판에는 덩그러니 ‘2105’라는 숫자만 새겨져 있다. 벽에는 흔하디흔한 휘호나 사진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이종구 전 언론특보는 기자에게 “실망하지 않았냐? 보다시피 정치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창의 ‘조용한’ 행보가 최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사무실 밖은 그리 조용하지 않은 것 같다. 창의 정계복귀설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2번의 대선 패배 뒤 정계 은퇴까지 선언한 이회창 전 총재의 복귀설은 틈이 날 때마다 정치권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다를 것 같은 ‘징후’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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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은 4월27일 <열린 세상 오늘, 장성민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2007년 대선에 이르는 동안 여러 세력간에 긴장 관계도 발생하고, 합종연횡이나 전략적 제휴 등이 부각될 것이다. 그 와중에 이 전 총재도 큰 축을 담당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의 대선 ‘역할론’을 언급한 것이다. 공 의원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이 전 총재가 앞으로 보수세력들이 결집할 수 있게끔 역할을 해주셨으면 한다는 바람을 얘기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공 의원의 발언은 이 전 총재가 4월28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용산구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로 이사한 사실과 보태져 정계복귀설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이런 상황에 ‘창사랑’(대표 백승홍 전 의원)은 이제껏 정치적 수사에 그치던 창 정계 복귀를 ‘운동’으로 이끌어낼 계획이다. 물밑에 가라앉은 정계 복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밑으로부터 요구’라는 복귀 명분을 쌓아주겠다는 것이다. 창사랑은 5월7일 대구에서 창의 정계 복귀를 촉구하는 첫 대회를 갖고 오는 10월까지 100만명의 창사랑 회원 모집에 나섰다. 창사랑은 현재 다달이 5천원씩 회비를 내는 2만5천명의 온라인 회원과 지부를 갖추고 있다. 이종구 전 특보는 “우리와 창사랑은 아무 연관이 없다.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고 곤혹스러워했다.

최근 창 정계복귀설은 과거와 조금 다른 배경을 깔고 있다. 바로 한나라당의 위기론이다. 지난해 창이 단암빌딩에 사무실을 낼 때나 앞서 4월에 선친의 묘를 옮길 때 정계복귀설이 흘러나왔으나, 숫제 창 개인의 움직임이 빚어낸 파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연말 이후 한나라당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보수세력 내부의 자성과 박근혜 대표 카드로는 다음 대선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주장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창 정계복귀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명우 전 이회창 총재 보좌관은 정계복귀설의 배경에 대해 “현재 야당이 기본적으로 집권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대표가 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뭘 인정받았냐?”고 반문했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은 “국민들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많이 실망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창의 정계복귀설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잊혀질 법한 창이 보수세력의 대안으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론이 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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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복귀를 바탕으로 창의 ‘역할’에 대한 시각차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명우 전 보좌관은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당원이자 원로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며 “그러나 본인이 대권에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것에 집착하실 분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킹’을 배제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승홍 대표는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킹 메이커’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본인이 직접 대선에 나올 수도 있다.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해야겠지만 주위에서 본인이 직접 대선에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창이 정계 개편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결국 대선에서 킹이나 킹 메이커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창 복귀의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지금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다’라는 시기론이 대세다. 이 전 총재의 비서실장을 지낸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은 “주변의 호사가들이 복귀론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지, 정작 총재 자신은 초연하다. 총재는 오해를 살까봐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윤여준 전 의원은 “정계 복귀를 한다고 하면 다수 국민이 쉽게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박근혜 대표가 4·30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승리로 이끈 뒤 당의 위기론이 물밑으로 가라앉은 것도 창 복귀론을 누르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위기지수가 높아지고 보수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떨어지면 창 복귀론은 언제든지 다시 정치 무대에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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