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23대 0’ 패배 뒤 계파간 갈등만 되풀이… 민주당 합당론·정동영 복귀론 등 해묵은 카드만 복창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4·2 전당대회에서 열린우리당의 새 선장이 된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한창 삽질 중이다. 전당대회 2위 득표자인 염동연 상임중앙위원은 얼룩말이 있는 초원에서 무릎을 포개고 앉아 있다. 그의 눈은 초점이 없다. 그저 허무하게 허공을 응시할 뿐이다.
영화배우 조승우씨와 김미숙씨가 자폐아 마라토너 초원이의 인간승리와 모성애를 열연했던 영화 <말아톤>의 홍보 포스터를 차용한 패러디물 ‘2005년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말아문’이다.
삽질하는 문 의장, 초점 잃은 염 상임중앙위원 위로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개혁? 할 수 있니?
국보법 폐지! 흉내만 내자고?
과거사 청산! 너도 나도 피곤한데…
적당히?
적당히 흉내만 내면 선택받을 거라 생각했니?’
운명론 “여당은 재보선에 진다”
4·30 재보선에서 시쳇말로 ‘23 대 빵’으로 완패한 열린우리당을 공박하며 ‘말아문’(희상)을 외친 것이다.
요즘 열린우리당 홈페이지 게시판과 인터넷 공간에는 이런 패러디물이 넘쳐난다. ‘윤카피의 세상을 쉽게 사는 방법’이라는 ‘9계명’도 등장했다. 1. 온라인 여론이 중요한데 맘대로 안 된다 → 알바 푼다 2. 기간당원제의 압박에 잠을 못 이룬다 → 돈 주고 페이퍼 당원 만든다. 3. 선거에 진다 → 만만한 당이랑 합당한다. (중략) 8. 지방선거에 이기고 싶다 → 아무나 될 사람을 불러온다. 9. 될 사람 같았는데 안 됐다 → 원래 여당은 보선에 진다고 말해버린다.
한결같이 여당이 4·30 재보선에서 보여준 무원칙한 공천과 승리지상주의, 재보선 뒤 입으로만 반성하는 행태 등을 꾸짖는 내용이다.
‘23 대 빵’. 단 한곳도 건지지 못한 충격적 패배에서 열린우리당은 무엇을 배웠을까. 문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재보선 직후 며칠 동안은 너나 없이 ‘통렬한 반성’을 입에 달고 살았다. 패배 원인 진단도 속출했다. ‘정체성 없는 실용주의 노선’(장영달·유시민·우원식), ‘실천 없는 탈레반식 말로만 개혁론’(박상돈·유재건), ‘호남 유권자 분산 등 지지기반 취약론’(문희상·임종석), ‘충청권에 기댄 신지역주의론’(우상호)….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다.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다. 단 하나의 결정적 패인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재야파인 이인영 의원은 “과거 총선 때 내가 구로에서 패배한 뒤 ‘왜 졌을까’ 곰곰이 따져보니 무려 18가지 패인이 나왔지만, 결정적인 게 뭐라고 꼭 집어낼 수 없었다”며 “4·30 재보선도 안 될 일들만 모두 겹쳤다”고 말했다.
그런데 ‘반성’을 외치던 여당은 점차 충격적 패배는 뒷전으로 한 채 운명론적 패배주의, 계파간 책임 떠넘기기, 해묵은 노선투쟁에 몰입하는 낮익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부담을 느낀 상당수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여당은 원래 재보선에 지고, 대선과 총선 등 큰 싸움에 이긴다”는 미신에 가까운 운명론으로 도피했다. 선거기간 동안 “결과에 책임지겠다”던 문희상 의장을 비롯한 여당 지도부는 △혁신위원회 △재보선 평가단 구성 등으로 발을 뺐다. 그러나 당원들의 “책임 추궁” 요구가 거세지자 각 계파는 이른바 ‘재방송 정치’ ‘재활용 정치’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월 전당대회 훨씬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로 생생하다.
‘대장군 귀환론’은 개혁 블록이 주도
각 계파가 ‘재방송 정치’의 주제로 부여잡은 것은 3가지다. 민주당과 통합론, 정동영·김근태 장관 당 복귀론, 기간당원제의 효율성. 지난 1년 가까이 날을 지새웠지만 정답도 승자도 없는 주제들이다.
민주당과 통합 논쟁은 재보선 패배로 궁색한 처지에 몰린 문 의장이 난국 돌파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경선 때 송영길 의원 공동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임종석 의원은 “이 구도로는 어떤 선거에서도 이길 수 없다”며 세게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카드는 새로울 게 없는 재활용품이다.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으로 지지층이 삼분된 정치구도 아래서 치러지는 각종 재보선,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에서 여당은 고전할 수밖에 없다는 실용 블록의 정치공학적 확신이 담긴 해묵은 해법이다. 이미 정세균 원내대표는 지난해 ‘노무현 대선빚 변제’ 카드로 민주당과 통합을 위한 명분쌓기에 나섰다가 법률적 한계와 내부 반발로 좌절된 바 있다. 지난 4·2 전당대회 때는 문희상 의장, 염동연 상임중앙위원 등 실용 블록 후보들이 선거전략으로 꺼내들어 재미를 봤지만, 결실은 없었다. 당사자인 민주당의 반발, 호남 유권자의 시큰둥한 반응이 문제였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 재야파와 개혁당 그룹 역시 ‘재방송 정치’로 맞서고 있다.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은 ‘조선시대 보쌈론’ ‘민주노동당보다 한나라당과의 통합이 낫다’는 특유의 거친 어법으로 문 의장과 임종석 의원을 공격했다. 개혁당 그룹인 참여정치연구회, 그 분파인 ‘중단 없는 개혁을 위한 전국당원연대’도 “창당 정신을 우롱하는 행위”라며 거들고 있다. 재야파의 좌장격인 장영달 상임중앙위원장도 “통합론은 호남표가 있는 곳만 바라보는 낡은 정치공학적 사고”라며 가세했다. 장 상임중앙위원은 “이번 성남·중원 재선거에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후보가 얻은 표를 다 합쳐도 한나라당에 지고, 지난해 4월 총선 때는 호남표가 적은 곳에서도 열린우리당이 당선됐다”며 “지금 통합을 얘기하면 오히려 호남당으로 찍혀 더 고립된다”고 주장했다.
‘김근태·정동영 장관 당 복귀론’, 이른바 ‘대장군 귀환론’은 거꾸로 개혁 블록이 재방송을 주도하고 있다.
이인영 의원은 “경북 영천 선거는 박근혜 장수와 유시민 장교의 싸움이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잘 드러냈다”며 “10월 재보선, 내년 지방선거전에서 박 대표는 물론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까지 뛸 텐데, 문희상·염동연·유시민 이런 얼굴로는 상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정동영 장관이 수도권에 출마하고, 김근태 장관이 선대본부장을 맡아 헌신적으로 뛰는 모습을 보이면 두 사람 모두 상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영달 의원도 “당장 당으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10월 재보선 전에는 복귀해야만 한다”면서 “원외인 정 장관이 10월 재보선에 출마해 원내로 진출하는 게 좋다”고 거들었다.
안개모의 재방송 ‘기간당원제 개선’
두 장관 복귀론은 재야파 인사들이 저작권을 갖고 있는 위기돌파책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내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 승리를 명분으로 이런 주장을 계속해왔다. 대중성을 갖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당해낼 ‘장수’가 없는 한 각종 선거에서 여당은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 핵심 논리다.
이에 맞선 실용 블록쪽 의원의 반박 논리 역시 과거와 판박이다. 참여정부 성공과 노무현 대통령 조기 레임덕 방지, 여권의 대권주자 관리 일정 등을 감안할 때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민병두·전병헌 등 정동영 장관과 가까운 여당 의원들은 “두 장관이 복귀해 재보선이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조기 복귀론에 반대했다. 정 장관쪽 인사들은 특히 재야파가 ‘정 장관의 10월 재보선 출마’를 역설하는 것은 정 장관에게 무리한 정치적 승부수를 강요해 2007년 대선을 고려해 막판까지 아껴둬야 할 정동영 카드를 조기에 무력화하려는 김근태 장관쪽의 정치적 계산이 녹아 있다는 의심도 한다.
경선 때 송영길 후보쪽에 섰던 우상호 의원은 이와 관련해 “과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당 안팎에서 자신을 흔드는 세력에 대항에 송파 보선에 출마해 당선된 뒤 대권 행보에 힘을 더한 예가 있지만, 정 장관은 경우가 전혀 다르다”며 “두 장관이 당에 있었다고 이번 재보선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실성 없는 정치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좀 다른 점은 일부 네티즌 논객들 가운데 박근혜 대표에 대항할 카드로 강금실 전 법무장관 등 제3의 간판스타를 키우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당 안팎에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반응이 대세다.
기간당원제 개선 논쟁은 여당의 중도·보수 성향 의원 모임인 안개모가 주도하는 재방송 프로그램이다.
유재건·조성태·이계안·이근식·조배숙 등 안개모 소속 의원 16명은 지난 4일 모임을 열고 “일부에서 재보선 패배의 원인을 개혁 중단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지만, 어불성설”이라며 “현실과 괴리된 공직 후보자 선정 문제점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기간당원제 확대를 주장하며 재보선 패배의 원인을 정체성 훼손에서 찾는 유시민 의원 등 개혁당 그룹쪽을 정면으로 겨눈 것이다.
안개모 간사인 박상돈 의원은 이와 관련해 “민주노동당은 기간당원과 실제 선거에서의 지지가 일치하지만, 한달에 2천원만 내면 자격이 주어지고 출마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몰아오는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 수는 실제 선거에서 지역 유권자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한다”며 “이상론에 치우친 기간당원에 의한 공천제 개선은 필수”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책임 있는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한 조사 결과에 따른 후보선정 방법을 대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체성 논쟁 2라운드 벌어진다
전당대회 대의원 선출 자격이 주어지는 지난 2월1일 23만8천명에 이르렀던 기간당원 수가 5월 현재 15만명 수준으로 9만명이나 격감하고, 수천명의 기간당원을 모집한 모범 지역인 공주·연기 재보선에서 여당이 무참히 패배한 사례 등은 이들의 ‘기간당원제 개선’ 주장에 공감대를 넓혀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 역시 ‘재방송 정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권은 지난해 기간당원제 도입 당시부터 비슷한 논란을 벌였다. 당시 기간당원제를 더 엄격히 적용하자는 개혁당 그룹과 좀더 완화된 규정을 내세운 실용 블록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현 기간당원제도다. 이와 관련해 수도권의 한 의원은 “굳이 기간당원 제도에서 재보선 실패의 원인을 찾는다면, 개혁당 그룹이 기간당원제 도입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페이퍼 기간당원’ ‘몰아오기 기간당원’ 모집의 길를 열어준 얼치기 기간당원 제도에 타협한 각 계파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여권의 각 계파는 재보선 패패의 원인 분석과 대안 마련에 자못 사활을 건 듯한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기간당원제, 국가보안법 폐지, 제2기 지도부 구성 등의 문제를 놓고 지난 1년여 동안 첨예하게 갈등과 대립, 경쟁을 거듭해온 여당 내 각 계파간의 경쟁이다. 전당대회에 이은 ‘정체성 논쟁 제2라운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23 대 빵’이라는 충격적인 재보선 성적표를 앞에 두고서도 지도부가 총출동한 ‘재보선 지역 낙선사례 버스투어’ 말고는 뭐 하나 새로울 게 없는 재방송 정치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과거사법 표결에서 선보인 ‘여야 합의’의 상생 정치 모델은 여당의원 과반수가 반대하거나 기권하는 망신을 자초했다. 여당 안에서조차 “당 지도부는 국민보다 한나라당을 보고 정치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감동과 지지를 함께 이끌어낼 수 있는 참신한 기획, 이벤트가 아닌 진정성이 돋보이는 현장정치, 말을 앞세우기 전에 작은 것이라도 먼저 실천하고 평가받는 겸손함…. 재보선에서 버림받은 열린우리당 지도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이런 생방송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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