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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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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실험 ‘잡초 외교’

등록 2005-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돌파하는 파격적 대일 강경기조… 정치권에서 뜻밖의 울림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운 외교 실험을 하고 있다. 3월23일 한-일 관계와 관련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그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 “우리의 요구는 반드시 역사의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등 직설적 화법을 동원했다. 일본쪽의 잘못을 이성적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동시에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감성적 표현들도 한껏 구사했다.

‘자주’와 ‘동북아 협력’의 키워드

노 대통령의 외교 실험은 기존 외교의 정석(定石)을 벗어난 것임에 분명하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청와대 홈페이지에 ‘사적 감상문’을 방불케 하는 글을 쓴 형식이 우선 그렇다. 그러다 보니 세련미를 중시하는 우리 외교관들은 노 대통령의 행보에 당혹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바둑 해설가 박치문씨는 한국의 서봉수 9단이 1993년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 9단을 꺾고 한국으로선 처음으로 세계선수권을 차지한 사건을 상기시킨다(<중앙일보> 3월24일치). 그에 따르면 서봉수는 저잣거리에서 바둑을 배워 온갖 때묻은 수법을 익힌 잡초류의 대가며, 오타케는 “바둑에서 질지언정 추한 수는 둘 수 없다”는 일본 미학의 상징이다. 박씨는 “(결승국에서) 벼랑 끝에 몰린 서봉수가 만신창이의 몸을 일으켜 미친 듯이 질주해 역전시켰다”고 말한다. <한겨레21>은 이 비유를 차용해, 노 대통령의 외교 실험을 ‘잡초 외교’라 부르고 싶다.

대통령이 정석을 버리고 ‘잡초류’를 택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듯하다. 노 대통령은 진작부터 ‘자주’와 ‘동북아 협력’을 외교 노선의 양대 키워드로 내세워왔다. 자주는 우리 국력의 성장에 걸맞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북아 협력은 할 말을 하되, 싸우지 말고 유럽연합처럼 동북아시아에도 공동체적 협력 관계를 만들어 함께 번영하자는 이야기였다.

노 대통령은 이런 기조에 따라 “(과거 문제에) 발목 잡혀선 안 되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가는 동력으로 서로 역할을 하자”(2003년 2월25일, 한-일 정상회담)고 말한다. 2003년 6월 일본 방문에서도 과거사 문제 언급을 애써 자제한다. 2004년 7월 제주도 한-일 정상회담에선 “제 임기 동안에는 한국 정부가 한-일간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다”고까지 말했다.

2004년 7월 제주 정상회담 직후 일본쪽은 노 대통령의 발언 배경을 매우 궁금해하면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진의 탐문을 시도했다. 왜 한국 대통령이 시키지도 않는, 그러나 일본으로선 뜻밖의 반가운 발언을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노 대통령으로선 동북아 협력 시대를 위해 선의를 먼저 보여온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그 뒤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독도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유력 정치 지도자들의 망언도 잇따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 지도자들의 행동은 과거의 사죄마저 원천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북핵 문제에서도 일본은 대북 제재를 앞장서 거론했다. 대북 제재론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우리 정부로선 ‘판을 깨려는’ 의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북 무력 봉쇄 불가’ 입장을 천명했다. 그럼으로써 근근이 미국을 진정시켜놓았다고 여겨오던 참에 이번엔 일본이 제재론을 거론하면서 ‘북핵 문제 주도권’을 다투고 나선 것이다.

일본에선 우익세력 일대 역공

그러나 일본의 태도에도 이유는 있다. 일본은 어느 때보다 단단한 미-일 동맹을 힘의 원천으로 삼아 유례없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 입장을 밝힌 반면에, 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독도 강의’를 듣고 난 다음에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런 흐름은 우아하고 세련된, 에둘러가는 외교적 수사 중심의 정석 외교로는 더 이상 풀기 어려운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계가 바둑’으로 집을 남기기 어려운 상황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정석이 아닌 파격, 그리고 다소 거칠더라도 급소를 정면으로 찌르면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잡초류’로의 발상 파괴를 노 대통령이 선택한 셈이다.

노무현식 잡초 외교의 성공 가능성은 아직 점치기 어렵다. 단호한 입장 표명을 토대로 일본을 실질적으로 압박할 지렛대가 동원돼야 하는데, 당장 그 수단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거꾸로 우익 세력의 일대 역공이 펼쳐지고 있다.

외교 전략의 성공 여부는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게 된다.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역학 관계가 깔린 탓이다.

이 시점에선 노 대통령이 발상의 파괴를 주문한 점을 주목해도 좋을 듯싶다. 노 대통령은 3월24일 국회 지도자들과의 만찬에서 “외교에는 진실과 혼이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믿는 것은 (우리) 국민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 발언들은 “수단이 없으니 안 될 수밖에…”에서, “과거의 도식으로 안 된다면 발상을 바꾼 다음에 새로운 수단을 찾아야…”라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정치·사회 세력의 반응이 엇갈리는 점도 흥미롭다. 보수 성향 신문들은 일제히 ‘대통령이 거칠게 나서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의 5선 중진인 강재섭 원내대표(57)는 “국민들이 시원하게 생각할 것이고, 근본적으로 우리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러나 좀더 세련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과 시민단체, 야당과 국회가 강하게 해야 하고 외교부도 점점 더 강하게 해야 한다”며 “그러나 대통령은 최후의 국면 조정자로서 뒤에 묵직하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월24일 당직자회의).

이들의 주장은 세련미를 중시하는 전문 외교관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다. 또 ‘우리 힘이 이것밖에 안 되는데…’를 전제한,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주장이다.

정치권에선 두가지 반응 엇갈려

반면에 386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원희룡 한나라당 최고위원(41)은 ‘일제 침략행위 왜곡 및 옹호 방지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차에 노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접했다. 그는 즉시 “오늘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정부의 이런 의지를 적극 환영합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말씀처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블로그에 적었다(3월25일).

원 의원은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 시사평론가 지만원씨의 최근 일본 관련 발언을 개탄하던 끝에 친일 사이트 등을 원천 봉쇄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민주주의자’ ‘반인권주의자’로 공격받던 참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블로그 글에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만 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다소 거칠더라도 발상을 바꿔 새로운 접근방식을 찾을 필요성에 공감한 경우다. 노 대통령의 잡초 외교가 정치권에서 뜻밖의 울림을 촉발한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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