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층 다가가기 제스처 적극 구사하면서도 실제 정책 내용에선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모습도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바뀌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이야기이지?
노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는 세간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이 화두는 특히 새해 국정운영 기조의 향배와 맞물려 한층 관심을 끈다.
정적들을 ‘안심’시켜라
노 대통령은 사실 바뀌었다고 볼 만한 행적을 최근 적잖이 만들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 대사에 깜짝 기용한 것이 시초이며,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송년 간담회(2004년 12월28일)에선 “언론과의 건강한 협력관계”를 말했다. 그가 애초 “언론과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주장했던 데 비춰 언론정책의 기조 변화 아니냐고 볼 대목이었다. 이를 두고 노 대통령이 ‘보수층 다가가기’를 본격화했다는 일각의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뜻에 밝은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바뀌었다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의 실체는 ‘본래의 노무현’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 그가 호남을 비롯한 전국 지구당을 돌며 ‘남들이 모두 DJ에게 돌을 던지더라도 우리는 그래선 안 된다’며 ‘희망가’를 부르던 시절의 초심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선 바뀐 대목부터 살펴보자. 홍석현 회장 기용을 발표한 얼마 뒤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코드 인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과 철학이 안 맞으면 같이 못 간다. 다만 역량이 없어도 우리끼리 한편이니까 하는 것은 안 된다”(12월13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홍 회장 기용에서 시작해 인사정책 기조를 송두리째 바꾸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즉, 홍 회장 기용은 ‘일부’이며 ‘폭을 넓히기 위한 전술’이라는 뜻이 담겼다.
‘언론과의 건강한 협력’도 비슷하다. 사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2년 동안 일부 대형 신문이 ‘수구적’ 행태를 보인다며 직접 나서서 강하게 비난해왔다. 이에 따라 해당 신문들은 최소한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노 대통령에게 역공을 퍼부었다. 그 결과 해당 신문이 바뀌기보다는 노 대통령의 지지율과 국정 리더십이 흔들리게 됐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손해를 본 것이다. 그의 참모들은 이에 따라 “손해볼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으시냐”고 수차례 건의했다. 노 대통령의 최근 변화는 그런 주문들을 ‘실용적으로’ 또는 ‘잇속’을 잘 따져서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된다.
이런 흐름을 거쳐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자극해 궐기시키기보다는, 거꾸로 ‘안심’시키는 쪽으로 ‘제스처의 변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정적 집단 또는 보수층이 “드디어 노무현이 정신 차렸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나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005년엔 경제에 올인할 것인가
사실 대통령이 바뀌었느냐 아니냐를 따질 때 중요한 것은 겉보기 제스처가 아니다. 좀더 본질적인 문제는 정책 기조가 어디로 가느냐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내년 경제정책의 키워드는 ‘동반 성장’이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동반 성장이란 말은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 기조였던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기조’를 새로운 용어로 리메이크한 성격이 짙다. 현 시점에서는 극심해진 경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정면승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5일 한국개발연구원(KDI)으로부터 ‘한국경제의 구조 변화와 양극화’를 주제로 보고를 받는 내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제의 양극화 추세가 시장 기능에 의해 자동 조절될 것이냐, 아니면 정부의 정책 전환(과거 사고틀의 근본적 점검)이 필요한 것인가?”
노 대통령의 지적은 경제 양극화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며 발상의 전환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읽혔다. 상황에 따라선 기존 경제정책 기조를 전면 수정할 가능성까지 담겼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이정우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과 김병준 정책실장(KDI팀) 양축으로 양극화 해법 연구작업을 진행 중인데, 새해 1~2월 중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한다.
또 노 대통령은 내부 회의에서 “범정부적·범국민적 설득이 필요할 경우 큰 타이틀을 내걸고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가 구상 중인 양극화 해법은 대체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소득 계층과 저소득 계층 사이의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가진 자’들의 양보와 ‘덜 가진 자’들의 협력이 처방의 핵심인데, 이런 합의를 만들기 위해선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노 대통령이 말한 ‘큰 타이틀을 내걸고 범국민적으로 설득’ 방안에 이런 그림이 담겼다는 것이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일찍부터 “내년에는 경제에 올인할 것”이라고 말해왔는데, ‘경제 올인’의 내용이 바로 이런 것으로 보인다.
새해 초로 예상되는 개각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유임이 확정된 상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양극화 해소를 위한 큰 그림을 기획하고, 이헌재 부총리는 책임지고 집행하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이 위원장도 기획 과정에서 재정경제부 등과 충분히 협의하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외교안보 정책 기조에선 노 대통령이 이미 11월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발언을 통해 가닥을 잡은 상태다. 그는 당시 “북한의 핵 보유 의지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는 점에서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며 대북 봉쇄와 무력 사용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미국 네오콘과 국내 보수층을 자극할 도발적 성격이 담겼음에도, 노 대통령은 그 뒤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몫’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해찬 총리와 일을 나누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그리고 취임 초기까지 김대중 정부가 만든 햇볕정책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다짐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첫해에 안팎의 압력 속에서 ‘대미 추종 외교’로 선회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개성공단 건설사업을 비롯한 남북간 직접대화에도 속도가 조절되는 흐름이 감지됐다. 참여정부 첫해에는 대북 송금 사건 특검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그러나 2004년 하반기 들어 노 대통령은 알게 모르게 기조 선회, 즉 ‘본래의 노선’으로의 복귀를 꾸준히 시도해온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번 LA 발언은 이런 흐름이 극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런 가운데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공식적으로 자주 찾았다. 이런 축적 속에서 최근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 도와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 하고 있다.
참여정부 첫해와 최근의 모습에선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해에 노 대통령은 보수신문 또는 기득권층과의 대결적 자세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노사 문제 등에선 대공장 노조의 이기주의 따위를 여러 차례 비난함으로써 “왼쪽 깜빡이를 켜고 (실제 정책에선) 우회전한다. 종잡기 어렵다”는 비난을 일각에서 받았다. 즉, 발언은 급진적으로 하지만 실제 정책은 그와 동떨어진 감을 노 대통령이 남겼던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의 행보에선 그와 반대인 흐름이 읽힌다. 즉, 보수층에 다가가는 제스처를 적극 구사하면서 실제 정책 내용에선 대선 후보 시절의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노 대통령의 한 참모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배경은 일차적으로 분권형 국정 운영의 약효(?)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사석에서 “대통령이 귀찮고 힘든 일은 모조리 나한테 넘기는 바람에…”라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곤 한다. 실제로 청와대 수석·보좌관들이 참석하는 일일현안 조정회의에선 하루 평균 10건씩의 안건을 ‘총리실로 이관’ 처리하고 있다. 대통령이 일상적 국정 운영을 총리실로 넘기도록 하고, 청와대로는 굳이 각 부처가 보고도 하지 말라고 하는 탓이다.
여당과 국회와의 관계도 총리한테 넘어간 상태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해찬 총리는 여당의 대표 성격으로 내각에 기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언젠가 당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날도 올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청와대는 올해 초 정무수석을 폐지하고 2명의 정무비서관 기능 정도를 남겼다. 그러나 정무비서관들도 “정무 기능 대부분을 총리실에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따라가는 형편”이라고 설명한다.
“자신감과 여유를 찾았다”
이런 흐름과 함께 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했던 2004년 9월5일 문화방송 출연을 거의 마지막으로, 정치 현안에 관한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이에는 “대통령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니 당과 국회가 알아서 해달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대통령이 정치 관련 발언을 계속하는 한 누가 그 말을 믿어주겠느냐”고 한 일부 참모들의 주문이 주효했다고 한다. 또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첫해 화물연대, 철도파업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던 바와 달리 지난 가을에는 공무원노조 파업 등에 일절 침묵했다. 대신에 이해찬 총리가 “법과 원칙 수호”를 외치는 악역을 떠맡았다.
그 결과 노 대통령은 온갖 현안에 골머리를 앓기보다는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주요 과제, 또는 본인이 즐기는 업무들에 전념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 노 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대통령이 자신감과 여유를 찾았다”고 한결같이 분위기를 전한다. 대통령이 감당할 몫은 국정과제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중장기적 기획들이라고 청와대는 설명한다. ‘정부 혁신’은 대통령 자신의 ‘시스템 마니아’ 취향까지 곁들여, 본인이 즐기는 종목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변신은 성공할 것인가? 참여정부는 3년차에 이르러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성과를 내기 시작할 것인가?
그의 변신은 일단 지난 2년간의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얻은 측면이 크다. 교훈의 핵심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이루려고 나섰지만 되는 게 없지 않느냐”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지난 2년간보다는 일단 나을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그의 국정 지지율이 다소 상승하는 흐름도 긍정적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난관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선 ‘경제 올인’의 주요 내용인 양극화 해소 문제만 해도 정책적 처방을 마련하는 게 실제로 쉽지가 않다고 한다. 또 어떤 처방을 마련하더라도 ‘대통령이 선두에 나서 범국민적으로 설득해야 하는’ 초유의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기득권층과 덜 가진 자들이 함께 양보하는 협력과 합의 모델은 우리에게 워낙 생소하다. 탁월한 리더십의 전제조건인 국민적 지지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참여정부 2년간의 혼돈에 따른 내상(內傷)은 여전히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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