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로 의심될 만한 17대 국회의원 외교활동 집중 탐구… 취재 거절하거나 “관광도 학습이다”항변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업무 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가는 직장인들은 해외 혹은 국외 출장이란 표현을 쓴다. 국회의원들처럼 ‘외유’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놀이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외유라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의원 보좌진들도 “외유 중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사전을 뒤져보니 외유(外遊)는 ‘공부나 유람을 목적으로 외국에 여행함’(민중서림)이라고 정의돼 있다. 공부인지 유람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의원 외교활동에는 외유만큼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은 변화와 개혁이라는 기대를 안고 출발한 17대 국회의원들의 외교활동에 현미경을 들이대보기로 했다. 외유가 집중되는 7·8월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공부나 외교활동보다는 유람에 무게가 실려 해마다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던 구태가 사라졌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 이전 국회의 구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건설교통위원회(이하 건교위)다. 건교위의 김한길 위원장(열린우리당)과 여야 간사인 이호웅 의원(열린우리당)·김학송 의원(한나라당) 등 3명은 8월5일부터 14일까지 9박10일 일정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4개국을 부부 동반으로 방문했다. 지난해 국회에서 신설한 상임위별 국회시찰 예산 3800만원에 부인 비용으로 각자가 1천만원씩을 보탰다. 은 이들의 출국 당일인 8월5일, 관광이 공식 업무보다 많아 보이는 ‘세부일정’(표 참조)을 확보했으나 “관광 표시는 일정이 확정되지 않아 유동적이기 때문에 공란으로 비워둘 수 없어 그냥 쓴 것”이라는 건교위쪽의 설명을 존중해 세 의원이 귀국하고 나면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들어본 뒤에 판단하기로 했다. 부부 동반에 관광일정이 업무 시간보다 많은 본말이 뒤집힌 일정은 그 자체로 ‘외유성’으로 의심할 구석이 많았지만,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부일정표를 채운 관광, 관광, 관광
김한길 위원장은 아예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기자는 9월3·4일 건교위원장실과 의원회관은 물론 수행비서에게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김 위원장과의 면담이나 통화에 실패했다. 대신 김 위원장의 한 보좌관에게서 “공식적인 보고서를 작성 중이니 보고서를 참조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김 위원장의 보좌관은 “외국에 가면 어떻게 일만 하냐. 좀 놀 수도 있지”라고도 했다. 기자가 ‘문제는 본말이 전도됐다는 데 있다. 세부 일정에 여러 차례 관광 일정이 들어 있다’고 지적하자, “그렇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버젓이 관광이라고 썼겠느냐”며 더 이상 취재에 응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회의원의 외교활동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결과보고서는 ‘활동 종료 후 20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돼 있지만 건교위의 보고서는 20일째인 9월4일에도 ‘작성 중’이었다.
이호웅 의원과 김학송 의원은 취재에 응했다. 이 의원은 “철도와 고속도로가 발달한 유럽의 교통 시스템과 행정수도에 관해 해당국 고위 간부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새로 알 수 있었고, 특히 개발을 하면서도 환경과 옛 도시 보존을 고려하면서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 의원도 “자세한 것은 보고서를 참조하면 되겠지만 공식 일정 외에도 현지 대사관·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현장 시찰을 자주 했다”고 답했다. 두 의원의 답변으로 미뤄볼 때 사전에 작성된 세부 일정에 보태진 프로그램은 없는 것 같았다. 두 의원은 면담과 기관방문 등 공식 일정 외에 현장 시찰과 관광도 학습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학습에 세금으로 수천만원을 지불해야 하는지는 따져볼 구석이 있다. 이들 세 의원 부부가 열흘 동안의 일정 가운데 업무로 꼽을 만한 △독일 헤센주 경제교통지역발전부 차관 면담 △오스트리아 교통기술혁신부 방문 △헝가리 국회 방문 △체코 프라하 공항관리공단 방문 등을 모두 합쳐도 채 하루가 되지 않는다. 프라하 공항관리공단 방문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성격이 짙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인천공항을 지어놓고 프라하 공항에서 뭔가를 배울 점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이들 의원의 눈높이는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김학송 의원은 관광 일정이 많다는 지적에 “관광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스위스 융프라우에 가서는 어떻게 그 높은 곳까지 철도를 끌어와 관광자원으로 개발했는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보면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고 해명했다. 게다가 부부 동반 외유에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오히려 다른 상임위에 권장할 만하다. 공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여행은 부부 동반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국회의원들은 관광도 학습의 연장이라고 인식하는 것에 놀란 데 이어 부부 동반 외유를 권장하겠다는 말에 입이 다물어졌다. 앞으로 공무원이 해외출장을 갈 때 추가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부부 동반이나 가족 동반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고 물었다. 김 의원은 “정치인과 일반 공무원은 다르지”라고 했다가 잠시 뒤에 “사정이 좋아지면 그런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부부 동반 외유가 더 낫다고 말한 배경은 이호웅 의원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의원은 “의원들끼리 가면 밤에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더 퇴폐적으로 노는데, 부부 동반으로 가니까 건강에 더 좋더라”라고 말했다. 16대 국회에서 여러 차례 외유를 다녀온 적이 있는 이 의원의 이같은 발언은, 평소 해외에서 국회의원들의 ‘밤생활’을 미뤄 짐작할 만했다.
“부부 동반하니 밤이 덜 퇴폐적이더라”
김 위원장 등 세 의원이 이번 외유 일정에 대해 스스로도 떳떳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지역구 활동이나 국회 의정 활동에 대해서는 최근 일정까지 자세히 올려놓았지만, 유럽 4개국 외유와 관련해서는 사진은 물론 짧은 소식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올 7·8월에 추진된 10여건의 다른 상임위 경우는 어떨까. 은 국회에 정보 공개를 청구해 ‘17대 국회 의원 외교활동 현황’을 확보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의원 6명(박희태·이미경·김재윤·안민석·정병국·고흥길)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참관단(개막팀)’이란 이름으로 8월11일부터 9일간의 일정으로 그리스 등 유럽 4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항공료와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3600만원가량을 썼고 숙박비·경기장 입장료 등 현지 경비는 문광위 피감기관(대한체육회)의 산하기관(올림픽위원회)이 지원했다. 이들의 활동 내역을 보면,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국 선수단과 취재진 격려 방문과 개막식 참석이 전부이고 이어진 일정에서는 불가리아·슬로바키아·폴란드의 국회·문화부·언론사를 방문했다. 개막팀이 돌아오면 후발대로 출발할 예정이던 ‘폐막팀’은, 가 8월7일치에 이같은 사실을 보도하자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내용 검증 불가능… 당당한 외교 활동 못하나
재정경제위(김무성·김종률·문석호·엄호성 의원), 통일외교통상위(임채정·박계동·박세일·이화영 의원), 환경노동위(이경재·단병호·장복심·이덕모 의원), 산업자원위(배기선·오영식·맹형규·안경률 의원)와 법제사법위·농림해양수산위 등도 적게는 4천만원에서 많게는 8천만원까지 7·8월에만 모두 4억여원가량의 예산을 썼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의원 외교활동이 얼마나 내실 있게 진행됐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단병호 의원 등 홈페이지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가서 뭘 했구나’ 알리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아예 말이 없다. 국회에 자료를 요청하면 해당 상임위나 의원들에게 알아보라거나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는 싸늘한 답변이 돌아온다. 아직도 쉬쉬하면서 떠나고 돌아와서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면 그냥 뭉개는 식의 구태가 이어지는 셈이다. 올여름 의원들의 외유가 예년에 비해 늘어난 것은, 16대 국회에서 2004년 예산심의를 하면서 상임위별로 3800만원가량의 국외시찰 예산을 따로 배정했기 때문이다.
행정부를 향해서는 “경제가 어려우니 불요불급한 예산을 삭감하겠다”라고 엄포를 놓는 국회의원들이 세금으로 외교활동에 나서면서, 떠나기 전에 보도자료를 내고 다녀와서는 얼마를 썼고 뭘 보고 배웠으며 어떤 성과를 남겼다고 당당히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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